7
무언가 잘못됐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아직 카엔의 혀는 닿지도 않았는데, 입술 밖으로 토해지는 숨결이 가파르게 변해갔다.
스위치라도 켜진 듯 바뀌어버린 몸 상태.
이대로 카엔의 봉사를 받게 된다면,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절대 그녀들 앞에서 실수하지 않을 것.』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언제나 첫 번째에 있던 대원칙.
그것이 깨지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점점 끓어오르는 성욕이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지워나간다.
귀족.
예의.
절제.
인내.
그 모든 귀찮은 단어 앞에 '성욕'이란 두 글자가 당당히 앞장섰다.
어느새 내 손은 침대를 짚고 있지 않았다.
도망치듯 뒤로 눕혔던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고, 눈앞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름아닌, 카엔을 향해.
"…응?"
카엔은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함께 내 행동을 유심히 지켜볼 뿐이다.
결국 천천히 뻗어 나가던 손끝이 카엔의 앞머리에 닿는다.
대련 중엔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카엔에게 닿을 수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녀의 몸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왜? 뭐 묻었어?"
부드러운 머릿결이었다.
살아오며 얼마나 관리를 받았길래 이 정도의 감촉을 가지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
그저 이것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왜 이러는 걸까.
고작 카엔을 향한 성욕 때문에 이러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혀 밑에서부터 어이없을 정도의 군침이 새어나와 목구멍을 축였다.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이 욕망을 토해내고 싶다.
눈앞의 카엔을 써서 바닥까지 비워내고 싶다.
훅, 뱉어낸 숨결의 끄트머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푹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조금 젖힌 뒤, 머리카락 위에 손을 올리곤 천천히 쓰다듬었다.
"…뭐해?"
애정이나 사랑같이 아름다운 감정이 실린 손놀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폭력적인 감정이었다.
고작 혀로 핥아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대로 카엔의 머리를 붙잡아 마구 입안을 범해버리고 싶다, 라고.
나를 위해 스스로 봉사까지 해준 카엔에게 더러운 성욕을 품었다.
"야. 그만해. 머리 망가져."
"……."
"…아니다. 마음대로 해. 오늘 아니면 네가 언제 또 내 머리를 만져보겠어."
얼마든지 만지라는 듯 스스로 머리를 가져다대기까지 하는 카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남아있던 이성마저 사라져갔다.
성욕으로 지끈거리는 머릿속엔 괴상망측한 의심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오늘 낮 내가 나무 밑에서 쓰러져 있었을 때, 왜 카엔은 진작 노트를 펼쳐보지 않았을까.
진작 봤으면 내 뺨을 때리며 깨운 뒤에 미친 새끼냐고 욕을 박았을 텐데.
왜.
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가만히 있었을까.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이쯤 했으면 슬슬 그만 좀 쓰다듬지? 계속 이렇게 머리를 짓누르면 핥아주기 힘들어."
"카엔 님."
"응?"
"솔직하게 말해봐요."
평소 카엔을 대할 때와는 다른 날카로운 목소리.
나는 결국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
선을 넘고.
짓밟고.
모래 속에 흐트러뜨렸다.
이제 그런 선 따윈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낮에 본 그 노트. 처음 보는 거에요?"
멍청한 질문이었다.
글을 읽은 카엔이 질겁하며 변태새끼라 외쳤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음에도, 이성적인 판단은 불가능했다.
내가 더 엇나가지 않도록 카엔이 선물을 준비했다.
이 간단한 이유를 내버려두고, 카엔이 선물을 핑계로 제 욕망을 채우려 한다, 라고 내 머리가 억지로 노선을 비튼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고작 카엔이 입안에 싸는 것을 허락한 것 가지고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말이다.
생각은 잠시였다.
그 보다는 본능이 훨씬 앞섰다.
다소곳이 꿇어앉아 짓눌린 허벅지.
자지와 닿아있지 않음에도 스스로 빼꼼 내밀어 놓은 혓바닥.
제 침에 젖어 반짝이는 입술.
흐리멍텅한 열기로 가득한 연보랏빛의 눈동자.
내 손길에 이리저리 망가진 앞머리.
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에, 어른의 쾌락을 심어주고 싶었다.
"처음 보는 거냐고?"
질문을 받은 카엔의 표정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구긴다.
"당연하지. 내가 그런 걸 또 어디서 봤겠어?"
"그럼 왜 제가 깨어날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어요?"
"…기다려?"
"기다리고 계셨잖아요.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그건 그냥….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
거짓말이다.
머리를 쓰다듬던 와중 느껴진 귀의 떨림.
평소 그녀의 습관을 토대로 결론을 도출했다.
카엔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와서 숨길 것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거짓말."
"무, 무, 무슨 소리야?"
"뭐, 내가 자는 동안 뭘 했는진 모르겠고."
"자, 자는 동안 아무 짓도 안 했어."
다시 한 번 귀 한쪽이 움찔거려 엄지손가락에 닿아왔다.
"네가 쓴 거였구나. 카엔."
"…? 내가 쓴 거라고?"
잠시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는 카엔.
내 말을 곱씹어보듯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꼬리를 바짝 세우곤 시끄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그런 글을 왜 써!!"
안 그래도 은은히 달아올라 있던 카엔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카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어쩐지. 네가 갑자기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졌나 했는데."
"고분고분이라니…! 이 손 치워! 내가 애완동물인 줄 알아? 난 그냥 네가 이런 걸 좋아하나 싶어서…."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거겠지."
"안 좋아해! 싫다고! 그리고 변태 너 지금 나한테 은근슬쩍 말 놓고 있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어. 이것도 네가 원하던 거잖아."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웁?!"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카엔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그녀의 입을 내 자지 끝에다 가져다 댔기 때문이다.
지금껏 몽롱하게 뜨여있던 카엔의 눈이 화들짝 크기를 키웠다.
그리고는 쿠퍼액이 꿀럭 솟아나오는 자지와 내 얼굴을 이리저리 황급히 번갈아 보기 시작한다.
수컷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기분 좋은 반응.
그런 그녀의 입술에 자지를 툭, 툭, 두드리며 명령했다.
"기회를 줄게. 네 스스로 봉사해 봐. 정성을 다해서."
"……."
"마음에 들면 네가 노트에 써놓은 것들 전부 다 해줄 테니까."
카엔의 시선은 여전히 반항적이었다.
억지로 화를 눌러담고 있는 듯, 은은한 살기가 느껴질 정도의 시선이었다.
오싹하다.
극치에 다른 성욕 탓에 오싹한 건지.
카엔의 살기 때문에 오싹한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아직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있다는 것이고.
카엔은 아직 내 밑에 꿇어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노트에 적혀있던 문장 몇 가지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게 진심으로 강간당하기 위해선 언제나 싸가지없는 영애를 연기해야 한다고 했었나.
생각은 잠시. 행동은 빨랐다.
"으큽?! 푸하…!"
나는 카엔의 입안으로 억지로 자지를 들이밀었다.
딱딱한 앞니가 침입을 거부하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카엔이 온 힘을 다해 내 손을 뿌리친다.
내 추측이 맞다면 이것도 전부 연기일 것이다.
억지로 범해지고 싶어서.
조금 더 내 성욕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귀엽게 생긴 것과 달리 음흉한 여자였다.
싫진 않았다.
순순히 본성을 드러내고 따먹어달라 애교부리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아닌 척 반항하는 편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놔…! 변태 새끼야, 내 머리카락에서 손 떼라고…! 키스도 못해봤는데…."
악에 찬 카엔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진짜 그녀를 강제로 범하는 것 같아 배덕감이 장난 아니다.
하지만 진짜 싫었으면 진작에 날 때려눕히고 잘근잘근 밟아댔겠지.
추측에 확신이 더해 갈수록, 내 손길엔 머뭇거림이 지워져 갔다.
다시 한 번 카엔의 머리를 내 자지 가까이 잡아당겼다.
이번엔 그녀가 목에 힘을 주고 버틴 탓에 쉽지 않았다.
그래봤자 목은 목이다.
다른 신체 부위였으면 모를까, 목은 카엔이 쉽게 단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결국 질겁하며 도망치려는 카엔의 입술을 또다시 내 자지로 꾹 짓눌렀다.
열심히 고개를 돌리려 하면서도 곁눈질로 힐끔힐끔 자지를 살피는 카엔.
이대로 목구멍까지 퍽, 퍽, 찍어누르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목구멍을 개발하기 전까진 힘들겠지.
그런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아?"
천장.
잠들기 직전마다 곰팡이를 세던 기숙사 천장이 눈앞에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가깝다.
그제서야 내 몸을 감싼 부유감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바람속성 마력에 휩쓸릴 때의 느낌과 꼭 닮은 부유감이었다.
나는, 공중에 떠있었다.
"다시는 안 해줄 거야!! 이 나쁜 새끼야!!!"
이상한 방향에서 들려오는 카엔의 목소리.
쾅. 현관문이 부서질 듯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바보 같은 자세로 침대 위에 거꾸로 내리꽂아졌다.
***
─쿵
왜 그랬을까.
─쿵
도대체 왜 그런 병신같은 짓을 저질렀을까.
─쿵
사실 난 성욕 하나 컨트롤 못하는 개병신새끼인걸까?
─쏴아아아아───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밑.
나는 욕실 벽에 몇 번이고 머리를 박았다.
냉수마찰의 효과는 확실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성욕만으로 그득하던 머릿속이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았으니.
어쨌든 멀쩡해진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오히려 정신이 돌아오니 방금 저질러버린 일이 하나하나 정확히 떠올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
카엔이 노트의 주인일 리가 있나.
나는 왜 그런 카엔의 입에 억지로 자지를 들이밀려 했을까.
어쩌면 큰 결심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기숙사 창고에 튼튼한 밧줄 몇 개가 남아있을 것이다.
"시발."
그나마 다행인 점은 큰일 내기 전 카엔이 도망간 덕에 강간미수로 그쳤다는 것 정도?
이딴 걸 위로 삼아 자위해야하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
내일 이리저리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다 카엔을 만나면 흙바닥일지라도 당장 머리를 박아야 할 듯하다.
이 정도로 카엔의 화가 조금이나마 사그라지면 다행이겠다만, 과연 어떨지…….
"하…."
샤워를 마친 나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밖으로 걸어나왔다.
제발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이길 빌었으나, 꿈 깨라는 듯 침대 옆에 동그랗게 남은 물 자국 몇 방울과 말려 올라간 침대 시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럼 그렇지.
땅이 푹 꺼질듯한 한숨과 함께 책상 앞까지 다가갔다.
하도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검법서 몇 권. 그 옆에 놓인 탁상 달력을 들어 올렸다.
잠도 다 달아나버렸겠다, 고민해봤자 자살 말곤 괜찮은 답이 나오지 않는 카엔은 잠시 제쳐두고 내일 일정을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개인실 청소. 308호 야크툰 폴리네어 교수.」
「실험 경과보고. 유즈 베르나.」
다행히 내일 일정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원소 마법학 교수인 야크툰 교수의 개인실 청소, 그리고 북쪽 구역에 있는 유즈의 연구동을 찾아가 잠시 실험에 어울려 주는 게 전부였다.
이 정도면 익숙하기에 눈 깜짝할 새 끝마칠 수 있다.
오늘의 일정이었던 서쪽 구역의 중앙 가도 정리는 피곤한 탓에 못했으니, 이것까지 내일 한 번에 몰아서 하면 될 것 같다.
계획을 마친 나는 슬그머니 옆을 돌아보았다.
"그럼…. 저건 어쩐다."
거기엔 걸레짝이 된 문 하나가 바닥에서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이미 제대로 닫는 것도 힘겹던 문이 더 고장 날 수 있겠나 싶었다만, 경첩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돈 금방 고칠 수 있는 일이다.
창고에 있는 경첩 두 개만 후딱 가져와서 고친 뒤에 자면 될듯하다.
나는 젖은 수건을 의자에 걸쳐두곤 잠옷 차림으로 문밖을 나섰다.
"……?"
뭐지 이게.
문턱을 넘는 순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내가 기숙사로 돌아올 땐 못 본 것 같은데.
피곤해서 못 본 걸까?
종이 위에 남은 진한 발자국은 아마 카엔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냥 어디서 날아들어 온 쓰레기인가보다.
쪼그려 앉아 종이를 주워들었다.
『미안해요.』
서두에 적혀 있는 것은 사과.
『오늘은 좀 과했던 것 같아요. 대처할 수는 있게끔 힘 조절을 해야 했는데,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이 되어버렸네요. 다음부터는…….』
종이의 정체는 편지였다.
발신인은 따로 적혀있지 않지만, 내용으로 보아 아마 백야가 쓴 편지인 듯 하다.
미안해요라니.
성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백야에게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뭐 잘못 먹은 모양이다.
그 밖의 감상이라면 시로아의 고위 귀족답게 정갈한 필체가 인상적이었다.
잠시 야설 노트의 필체가 떠올랐으나, 이쪽은 아무래도 작은 종이 안에 억지로 구겨 담은 모양새라 비교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나중에 야설을 옆에 두고 번갈아보며 비교해야 제대로 확인 할 수 있을 듯하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창고로 걸어가며 쭉쭉 읽어내리니 어느새 마지막 문단이었다.
여긴 필체가 조금 달랐다.
급하게 휘갈겨 쓴 티가 난다고 해야 하나.
달빛만으로 읽어내리는 덴 무리가 있는 탓에, 창고의 마력등을 켜며 시선을 내렸다.
『미쳤어요?』
말머리에 적혀 있는 것은 욕.
『평민이라 제대로 된 성교육을 못 받았나? 당신은 그렇다 치고, 카엔은 왜 그걸 자연스럽게 핥고 있는 거에요?』
글쎄요.
당근이라고 하던데.
『둘이 몰래 만나는 건 제가 관여할 바 아닌데, 이 말만은 꼭 해야겠어요. 그건 사람의 입에 물리는 게 아니에요.』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내일 아침에 일정 비면 도서관으로 와요. 제가 얕게나마 성교육을 해줄테니까. 10시까지 기다릴게요.』
이어져 적혀있는 이상한 개소리에, 나는 왜 창고를 찾아왔는지도 잊고 멀뚱멀뚱 편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