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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12화 (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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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네요."

"……?! 풉, 콜록…! 콜록……."

평소보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큰 식당 안.

별안간 옆에서 들려오는 개소리에, 멍하니 고기를 씹던 카엔은 식탁 위에 고깃덩어리 몇 개를 뿜어내고 말았다.

"뭐, 케흑, 뭐라는 거야?"

"아니, 그렇잖아요."

"그렇긴 뭐가 그래."

"아가씨가 최근 들어 감정표현이 많아지긴 했잖아요?"

"안 많아졌어."

"많아졌어요!"

"그리고 그런 거랑 사랑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엄청나게 많죠! 제가 로맨스 소설을 몇 권이나 봤는데요!"

"로맨…. 하아……."

카엔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언제나 그렇듯 쾌활한 메이드의 목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안 그래도 방금 루크에게 '그렇고 그런 일' 을 당하고 온 참인데 말이다.

미안하지만 그냥 내쫓아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카엔은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키아라."

"네. 아가씨."

"사랑 같은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에이…. 또 그러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한테는 솔직히 밝히셔도 되잖아요."

"솔직히 밝힌 거야. 사랑 안 해."

"증거가 이렇게나 많은데도요?"

"…증거?"

언제나 주변의 인기척을 확인하고 했으니 그런걸 남겼을 리가 없다.

고개에 이어 아예 몸까지 돌린 카엔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메이드를 노려보았다.

어스름한 조명 밑에서 그녀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으나, 메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첫 번째!"

"……."

"본가에 계실 때만 해도 미소 한 번 짓지 않던 까칠한 아가씨께서, 아카데미에 온 뒤로 엄청나게 밝아지셨다."

"……."

잘 모르겠다.

그땐 그냥 웃을 일이 없어서 안 웃었던 것 같은데.

자신감 가득 담긴 첫번째 주장을 들게 된 카엔의 감상은 딱 이것뿐이었다.

"두 번째!"

"……."

"도대체 언제쯤 몰래 만나실까 했더니, 오늘 드디어 사복을 입은 채 그 남자가 있는 곳에 다녀오셨다."

"간 적 없는데? 운동 다녀온 거라니까? 옷도 엄청 가벼웠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나가실 때 꼬리를 붕붕 흔들고 계셨는데, 거기 말고 다른데 갔을 리가 없잖아요."

"그게 뭐 어쨌다고."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기분 좋으실 때 무심코 꼬리를 흔드는 습관이 있어요."

"……착각은 자유지. 재밌네. 계속 해 봐."

그랬었나.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앞으로는 조금 더 몸가짐에 신경을 쓰기로 마음먹은 카엔.

그녀의 귓가에 계속해서 메이드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

"저택에 돌아오신 아가씨께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방으로 뛰어들어……."

"나가."

"네?"

"그런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을 거면 나가라고."

메이드의 마지막 주장을 들은 카엔은 다시 식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꼬리나 귀를 움직이지 않게 주의하면서.

더 이상의 여지를 주면 며칠 동안 이 이야기로 떠들어댈 게 분명했다.

그런 건 사양이었다.

"……설마."

"설마?"

"진짜 하셨나…?"

"뭘 해? 나가라고. 키아라."

"아, 맞아. 보세요. 감정 표현이 이렇게나 격해지셨는데…."

"안 나가? 직접 내보내 줘?"

"히잉…. 아가씨……."

"지금 안 나가면 본가로 돌려보낼 거야. 여기서 빨래랑 청소만 하다 보니 심심해졌나 봐?"

진심이 담긴 말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녀는 카엔이 아장아장 걷던 시절부터 쭉 함께 해온 가장 친한 메이드였으니.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식기를 들자, 눈앞의 새하얀 식탁보가 자그마한 고깃덩어리로 얼룩진 모습이 보였다.

잠깐 메이드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으나 카엔은 억지로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건 몰라도 감정이 풍부해진 건 사실인 듯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래. 알겠으니 지금은 일단 나가 있어."

"제가 가지고 있는 소설, 아가씨께서 참고하실 수 있게 얼마든지 빌려 드릴게요."

"……제발 나가라고."

다시금 훅 솟구치는 짜증도.

감정이라면, 감정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카엔은 곧장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평소라면 뒤통수가 침대에 닿게 몸을 던졌겠으나, 지금은 반대로.

"후으……."

노곤노곤하게 풀어지는 몸.

평소의 카엔이었다면, 이대로 이불 속에 들어가 잠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자꾸 신경 쓰이던 평민 하나 때문에.

그 평민과, 기어코 오늘 이상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침대 시트와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에서 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으……."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머릿속 어딘가에 죽을 때까지 묻어두려 한 기억이 자꾸만 물 위로 떠올라 카엔의 이성을 흩트려 놓았다.

혹시 오늘 있었던 일 전부가 꿈이 아닐까?

낮에 '루크가 쓴 야설' 을 읽어버린 시점부터, 루크의 기숙사에 다녀오기까지 모든 게 다 꿈이 아니었을까.

라고 낙천적인 생각을 하기엔, 조금 전 느꼈던 감각들이 너무나도 생생히 남아있던 탓이다.

손 끝에도.

혀 끝에도.

무심코 냄새를 맡아댔던 코에도.

갖가지 형태의 루크가 잔뜩 남아 카엔을 괴롭히고 있었다.

"아우으…."

결국 카엔이 도달한 곳은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잠깐 미쳤었나?' 라는 생각이다.

루크가 어떤 남자인가.

조금 눈길이 가고.

뭐,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다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몸 좋고 잘생기기까지 한.

애정이란 마음이 살짝 고개를 내민.

그런 평범한 남자 1일 뿐.

그래서 기특한 마음에 '포상'이라도 하나 내리려 했던 건데.

어쩌다보니 결국 그의 방에서 성처리 도구처럼 다루어질 뻔 했단 치욕이.

"……."

치욕, 이.

"……."

카엔은 침대 시트에 파묻혀 있던 몸을 돌려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넓은 도화지.

그 위에 조금 전의 기억이 얼핏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잠깐 운동을 다녀오겠다며 저택을 나서는 자신.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중앙 구역으로 내려가는 자신.

생각보다 더러운 중앙 구역의 풍경에 당황하는 자신.

루크의 방을 보고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는 자신.

그리고.

─꼴깍

과장을 좀 보태 제 팔뚝만 했던 자지.

─꼴깍

그 밑에 꿇어앉아 애완동물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어지는 자신.

─꼴깍

처음 들어보는 루크의 반말.

─꼴깍

마지막으로, 입술 안으로 그 커다란 걸 강제로 집어넣으려는 루크의 모습까지.

"으으…."

더듬더듬 머리맡에 있던 베개를 찾아내 품속에 꾹 끌어안은 카엔은 발등으로 열심히 침대를 두드려댔다.

그런건 잘못됐다.

귀족 대 평민으로서, 아니,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런 취급을 받으면 필시 기분 나쁠 것이다.

하지만 왜 자꾸 루크의 묵직한 목소리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루크…. 루크으……."

적당한 말을 붙이지 못한 그의 이름만이 입속에 맴돈다.

아직 카엔이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탓이었다.

나는 루크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천장을 올려다본 카엔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첫 번째.

당장 죄를 묻는다.

이 경우 사형은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루크는 남들 몰래 귀족을 상대로 천박한 야설을 집필했으며 결국엔 레나스 제국의 북부대공녀인 카엔, 자신의 몸까지 손대고 말았다.

하나만 있어도 큰일 날 일을 두 개나 저지르다니.

카엔이 한마디만 하면 루크는 당장 처형될 게 분명했다.

미들네임은커녕 성씨조차 없는 평민 출신이지 않던가?

대단한 가문을 등에 업고 있는 것도 아니니, 법의 심판 앞에 서는 순간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루크가 미운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 말이다.

입술에다가 자지를 꾹꾹 들이밀던 루크를 억지로 침대에 내리꽂았던 것도, 혐오라는 감정보단 당황이란 감정이 커서였다.

이미 혀로 한참 동안 핥아댔는데, 그걸 입 속에 넣지 못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으니까.

루크가 눈앞에서 펼쳤던 페이지에서 그런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 못할 짓은 아니었다.

빨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줬다면 마지못해 빨아줬을지도 모르지.

왜 자신보고 야설을 썼니 마니 했는지까진 여전히 미스테리지만, 이미 다른 걸로 머릿속이 꽉 찬 카엔에겐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게 왜 갑자기 머리카락을 움켜쥐어서……."

몰라. 다 네 탓이야.

카엔은 품속에 껴안은 베개를 만지작거리며 다시금 침대 위에 풀썩 엎드렸다.

그 상태로 생각하는 것은 두 번째 처분.

덮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이럴 경우 루크는 평소와 같은 아카데미 생활을 보낼 수 있다.

귀족의 몸을 마음대로 만져댔으니 평생 카엔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되겠지만, 어쨌든 죽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

그럼 그다음엔?

루크와 서먹서먹한 관계로 남은 채 끝나게 되는 걸까?

지금껏 장난치며 차근차근 쌓아온 친밀한 관계마저 와르르 무너뜨리고선?

"……싫어."

이게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루크와 더욱 가까워질 방법을 찾다가 마침 그 야설을 읽은 뒤 큰맘 먹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딱 한 번만 꾹 참고 그가 원하는 걸 해주자고.

그걸 빌미로 나중에 내가 원하는 것도 슬쩍 요구하자고.

하지만 당황한 카엔이 루크를 침대에 내다 꽂아버린 바람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게 생겨버렸다.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취향이 있다.

그렇기에 루크와 카엔의 취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대게 이런 경우.

희생하는 사람은 조금 더 마음이 불그스름하게 물든 사람이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짜증 나…. 다신 안 해준다고 큰 소리 쳐놓고…. 변태 같잖아……."

카엔 자신.

"…열심히 빨기만 하면 되나……."

꼴깍, 침을 삼킨 카엔은 루크의 자지를 입에 물고 있다고 가정하고 고개를 앞뒤로 흔들어보았다.

역시 이상하다.

이렇게 남자 혼자 기분 좋아질 바에야, 서로의 성기를 맞대는 편이 훨씬 낫지 않나?

자연스런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일단 그것은 구석에 대충 처박아 두었다.

일단은 루크의 취향에 맞춰준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빌미로 카엔이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연습.

루크가 어떤 해괴한 걸 요구해와도 당황하지 않을 연습.

자지를 빠는 것 이후엔 무엇이 있을까?

정액을 삼켜주는 것까진 야설에서 읽었고.

……이것보다 더 한 게 있긴 한가?

"끄응……."

이런쪽으론 지식이 없기에 고뇌에 빠진 카엔.

그러기를 몇 시간.

카엔의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멎어든 것은,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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