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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24화 (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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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생각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기껏 건네온 호의를 거절할 필요도 없고.

정리하자면 아직까진 카엔이 유력한 후보.

나머지는 흘려넘기기 힘든 의심쩍은 행동이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후우, 내뱉은 한숨에 잡념들을 담은 나는 성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백야 님이요?"

"네. 소설 제일 앞에 적혀있었잖아요. 강간당하고 싶어서 루크를 괴롭혀왔다고."

"강…. 음, 네."

생각보다 노골적인 성녀의 표현에 살짝 당황했다.

강간이라니, 평소 음담패설을 일삼던 그녀라도 저 정도 단어까지 입에 올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보지라든가, 자지라든가, 상스러운 단어가 전부였었는데.

성녀의 입에서 저런 단어까지 듣게 되다니 내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이래저래 저지른 게 많으니 이번 생 천국은 포기하자.

나는 자정을 넘긴 시계를 흘겨보며 말했다.

"…많이 괴롭히시긴 했죠. 다른 분들에 비하면 특히 육체적으로."

"그렇죠. 당장 어제만 해도 어깨를 박살 내버렸잖아요?"

"……으음."

"엄청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나요?"

제 일인 것마냥 두 눈을 반짝거리며 '백야 작가 설'을 주장하는 성녀.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글쎄요…."

"네?"

무척이나 미적지근했다.

나 혼자 그 결론에 다다랐으면 모를까, 옆에서 백야가 작가일 수 밖에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니 어째 이상한 부분부터 짚어보게 된 까닭이다.

이게 청개구리 심보인가?

딱 들어맞는 표현은 아닌 것 같다만, 어쨌든 나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저리 흥분했다면 다른 사람은 동조할 게 아니라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법이니까.

괴롭힘의 정도 말고도, 하나하나 따져보아야 할 것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게 전부잖아요."

카엔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녀는 평소 쫄래쫄래 날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다가, 결국 내 방을 찾아오며 선을 넘었다.

이번에 날 불태우려 한 유즈의 경우엔, 평소 온갖 약물로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다가 결국 흥분한 척 젖가슴을 쥔 내게 존댓말을 꺼내고 말았다.

하지만 백야는?

대련 시간마다 바닥에 널브러질 때까지 날 두들겨 팬다는 점 빼면 딱히 수상한 점은 없지 않던가.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성교육을 해주겠답시고 도서관으로 부른 게 야설에 나와 있던 상황과 어느 정도 닮아 있었고,

그 이후 내게 어깨를 주물러지며 생각 이상으로 민감한 모습을 보였다는 게 있긴 한데….

대놓고 내 방을 찾아온 카엔, 그리고 제 입으로 루크 님이라 부른 유즈에 비하면, 수상하다기보단 그냥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게 아닌가 싶었다.

"고작이라뇨? 이 정도면 되게 수상하지 않아요?"

"고작 괴롭힘 가지고 추측하기엔 용의자가 너무 많아져서요."

"그…래요?"

"안 한 사람을 세는 게 훨씬 빠를 정도니까요. 셀 필요가 없어서."

"응? 아니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세야죠. 1명."

피곤한듯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성녀는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또한 평소의 장난인가 싶었으나, 어째 그럴 때마다 보이던 히죽거리는 미소가 입에 걸려있지 않았다.

결국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괴롭힌다는 자각도 없으셨습니까?"

"…제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요?"

"예."

고개를 끄덕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성녀.

"저는 지금껏 당신이랑 즐겁게 이야기한 게 전부인데요?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나름 착한 귀족 아니었나요?"

"물론 백야 님이나 유즈 님과 비교하면 별거 아니긴 한데…. 그간 제가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건 한 번도 못 느끼셨나 봅니다."

"그럼요. 애시당초 곤란할 게 어딨어요?"

"당장 3일 전쯤에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진 기억하고 계십니까?"

"…음양 치료법?"

"처음에나 그랬지 중간부턴 계속 자지 치료법이라 하셨습니다."

"그, 그래서요? 어차피 남자들은 그런 야한 이야기를 좋아하잖아요. 특히나 저같이 여자가 이런 얘기를 먼저 꺼내주면 더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성녀는 평소 여유롭던 모습과 달리 우다다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곧 흥분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 아직 남아있던 차 조금을 다소곳이 홀짝이기 시작했다.

뭐,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도 같은 신분 사이의 대화에서나 그런 것이다.

성별을 바꿔 생각한다면, 백작가 아들내미가 순박한 시골 처녀를 앞에 데려다 놓고 보지가 어쩌니 자지가 어쩌니 떠들어 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네요' 라고 맞장구를 치기도 좀 그렇고.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라고 반박하기도 좀 그런 관계.

지금껏 성녀는 그 미묘한 분위기를 읽지 못한 모양이다.

"성녀님."

"네."

"지금껏 기회가 없어 말씀드린 적 없지만, 저는 그런 거 안 좋아합니다. ……그다지."

거짓으로만 가득 담긴 목소리가 테이블을 건넜다.

내뱉고서야 아차 싶었으나, 말을 주워 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야설 작가는 왜 찾아다니고 계신 건데요? 작가랑 야한 걸 마구마구 하고 싶어서 그런거 아니에요?

이 간단한 반박 하나면 순식간에 파훼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뒤늦게 빠져나갈 구멍을 덧붙였다.

그다지, 라고.

"……?"

하지만 성녀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내 눈동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깨끗이 빛나던 빙하색의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전, 꼬물꼬물 움직이던 성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시, 싫어했어요? 야한거?"

"……."

이번에는 반대로 내 입술이 꾹 다물렸다.

말을 더 다듬을 수 있는 기회니 붙잡아야 하는데.

그보다는 건너편에 앉은 성녀의 발그스레하게 물든 뺨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게 어떤 스타일의 보지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을 때도 아무 변화 없던 뺨이.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어서 털이 없는 편을 좋아한다고 대충 대답했을 때도, 보조개만 쏙 들어간 채 아무 변화 없던 뺨이.

붉다.

무척이나.

"…말씀드렸다시피 그다지 안 좋아하는 겁니다.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고요."

"……."

"애시당초 지금 성녀님과 함께 야설 작가를 찾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성욕이 아예 없었으면 왜 굳이 이런 짓을 하겠어요."

내가 왜 이런 말까지 하고 있는 거지.

성녀 쪽에서 내밀어야 할 반박이 내 입에서 대신 흘러나왔다.

다행히 성녀의 침묵은 잠시였다.

크흠, 헛기침 소리를 내뱉더니 아까와 같은 시선으로 내 눈을 바라보는 성녀.

뺨과 함께 눈시울마저 살짝 붉어진 것 같긴 한데.

워낙 뺨이 붉은지라 확실하진 않았다.

"…아무튼, 전 그래도 아직 백야 님이 가장 의심스러워요."

"다른 이유가 더 있으십니까?"

어색하게 전환된 주제.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 억지로 질문했다.

"일단 루크를 가장 괴롭힌 사람이란 건 사실이잖아요."

"육체적 고통만 두고 보자면, 아무래도 그렇죠."

황녀들이 아카데미에 있을 때 당했던 '정신 교육'이 잠시 떠올랐지만, 굳이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게다가 백야 님은 글씨를 엄청 잘 쓰신다고요. 아마 두 황녀님들과 비슷한 수준일걸요?"

고개를 살풋 끄덕였다.

애무가 뭔지도 모르면서 성교육을 하러 온 백야가 잠깐이나마 노트에 끄적이는 걸 봤으니까.

각잡고 쓴 글이 아니라 그런지 야설에 비하면 조금 뒤떨어지는 글씨였지만,

그럼에도 잘 쓴다는 것쯤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도 한 땀 한 땀 노력을 기울여서 쓰면 그 정도까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제가 썼다는 말은 아니고요."

"……."

"아무튼 증거 중 하나인 '필체'만 놓고 보자면 유력한 후보는 그 세 사람이에요."

내 앞으로 손을 뻗어 손가락 3개를 펼친 성녀.

그녀는 하나씩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했다.

"백야. 세른 폰 우르간. 이리스 반 유크라시아. 이 세 사람 중 한 명이 틀림없어요."

"음…."

"이 중 한 사람은 루크에게 그…. 뒤, 뒷구멍까지 전부 바치고 싶어하는 거에요. 여기에 '얼마나 괴롭혔는가?' 까지 합치면 백야 님이 유력해지고요."

제 추측이 틀림없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읊조린 그녀는, '어때요?' 라고 말하는 듯한 포즈로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의 어색함을 지워내기 위해 억지로 짓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노력은 알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확인할 것이 몇 가지 남았다.

"성녀 님.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조금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마음껏 하세요."

그녀의 추측대로라면 커다란 오류가 하나 생기게 된다.

잘못했다간 내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오류.

"일단 백야 님은 그렇다 치고, 혹시 유즈 님 글씨도 보신 적 있나요?"

"아뇨. 연구동에서 나오질 않으셔서 입학 이후론 마주친 적도 몇 번 없어요. 그래도 아마 잘 쓰시는 편이지 않을까요? 쌍익(雙翼) 이라고 하셨던가? 인간에게 익숙한 단어로 바꾸면 공작급 귀족이라 하셨으니까요."

엘프가 인구수의 100%를 차지하는 폐쇄적인 국가인 세계수의 귀족 체계는 인간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굵직한 대사건을 제외하곤 타국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 보니 몇백년간 독립적으로 발전한 탓이다.

사회 구조 자체는 이래저래 닮은 게 많으나 명칭이 동떨어지게 된 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물론 인종차별 같은 게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냥 엘프라는 종족 자체가 타 종족에게 낯을 많이 가려서 그렇다.

간혹 마력을 개화한 사람이 나올 때나 어쩔 수 없이 아카데미로 유학을 보내는 정도니 말 다했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유즈의 필체 보다 조금 더 중요한 게 하나 남아있었다.

"그럼…. 카엔 님의 글씨도 역시…."

북부대공녀.

레나스 제국의 북부 전선을 홀로 도맡은 단델리온 가문의 출신이니까, 분명 글씨도 엄청나게 잘 쓰겠지.

놀랄만큼.

잘 써야 하는데.

어쩐지 불안하다.

"아. 카엔 님의 글씨는 바로 옆에서 본 적 있어요. 예전에 기절한 당신을 여기까지 업어온 뒤, 뺨에다가 '허접' 이라고 낙서한 적 있으시거든요."

"뺨에다가요?"

"네. 물론 제가 지우긴 했지만, 아무튼 그때 글씨가 어땠냐면…."

방긋, 내 의도를 모르니 그저 해맑게 웃는 성녀.

"엄청나게 악필이세요. 뭔가 어울려서 되게 귀여우시더라고요. 펜을 쥐는 방법도 이상하고…."

"……."

"그러니까 카엔 님은 아마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거에요."

"……."

"지금 아카데미에 있는 사람들 중 가능성 있는 건 유즈 님, 그리고 백야 님. 제 생각은 아무래도 백야 님이 좀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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