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이후의 이야기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엔이 심각한 수준의 악필이라는 것.
기숙사에 도착해 뜨거운 물을 머리에 끼얹을 때까지,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 하나만이 떠돌았다.
"시발."
이럴때가 아닌가?
늦은 시간이고 뭐고, 당장 카엔의 저택을 찾아가 땅에 납작 엎드려야 하지 않을까?
엎드리는 것 가지고 충분하려나?
귀족을 강간했는데 고작 그 정도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대가를 내놓아야지.
카엔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든 대가.
어쩌면.
어쩌면….
"……."
내 목숨.
그리고 어쩌면,
주변인의 목숨.
"미치겠네…."
휘청휘청 샤워실에서 빠져나온 나는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책상 앞 의자에 몸을 맡겼다.
약물.
그 약물만 아니었다면, 흥분해서 카엔을 강간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내 행동 하나에 여러 목숨이 가볍게 사라질 수도 있다 생각하니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야설도 야설이지만, 이렇게 된 원인을 따지고 올라가면 결국 유즈가 준 그 정체불명의 약물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던가?
말로는 '그런 결과가 나와선 안 돼.' 라고 했지만, 정황상 발정제 계통의 약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즈가 왜 내게 그런 것을 먹였는가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말이다.
"…도대체 왜."
물론 유즈가 작가라 가정하면 일련의 상황이 꽤 깔끔하게 맞아떨어지긴 한다.
단단히 착각한 내게 강간당한 피해자 카엔.
이상한 약물을 먹이고 강간당하고 싶어한 야설 작가 유즈.
애무조차 모르는 바보 백야.
그냥 날 도와주고 싶었던 성녀.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황녀 둘.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카엔의 악필에 버금가는 커다란 오류가 하나 남아있다.
북쪽 구역 방구석 엘프인 유즈가 굳이 남쪽의 도서관 열람실까지 뽀르르 걸어가서 야설을 썼다?
그럴 리가 없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듯이, 잔뜩 쌓인 책무더기에 야설을 숨겨두려고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이 또한 억지로 끼워 맞추기 위한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그냥 자기 연구동 어딘가에 숨겨두면 아무도 찾을 수 없다.
굳이 고생스럽게 그런 일을 저지를 필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카엔도, 유즈도, 둘 다 범인에서 멀어지게 되는데….
그럼에도 카엔이 나를 침실로 끌어들여 꽉 껴안아달라고 한 이유.
그럼에도 유즈가 내게 꾸준히 발정제를 먹여오다 결국 존댓말을 해온 이유.
마지막으로, 다른 곳이 아니라 하필이면 '책이 산더미처럼 쌓인 도서관 열람실'에서 야설이 발견된 이유.
도대체 뭘까.
"……."
머리가 아팠다.
확실한 것은 카엔은 몰라도 유즈는 무언가 꼭꼭 숨기고 있다는 것 정도다.
지금 아무리 고민해봐야 정답을 찾아내긴 힘들 것 같다.
일단 내일 당장 카엔의 저택을 찾아가 사죄할 수 있는지나 확인해보자.
나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리며 남는 손으로 캘린더를 붙잡아 눈앞까지 당겼다.
「도장 청소」
적혀있는 것은 이거 하나가 전부였다.
남쪽 구역 숲 속에 지어진 검술 도장.
구조도 복잡하지 않은 데다가, 쓰는 사람도 거의 없어 넓이에 비해 청소하기는 엄청나게 편한 곳이다.
기본 중의 기본을 중시하는 교수 몇몇이 즐겨쓸 뿐이니 마당에 쌓인 나뭇잎만 좀 빗자루로 쓸어내면 순식간에 끝낼 수 있다.
좋아.
일정은 간단하다.
일어나자마자 카엔을 찾아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자.
통할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캘린더를 다시 책상 구석에 밀어 넣은 나는 쓰레기 같은 침대에 몸을 맡겼다.
****
차가운 이슬비가 땅을 적셨다.
소나기까진 아니다만, 머리 위로 우중충하게 들어찬 먹구름을 보고 있자니 어째 불안한 느낌이 잔뜩이었다.
고작 날씨일 뿐인데 신경쓰지 말자.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선 특색 없는 새카만 우산을 쓰고선 서쪽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질척거리는 중앙 구역의 골목길, 40도에 가까운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지나자 곧 익숙한 청금색이 시선에 들어왔다.
처마 밑에 들어간 나는 우산을 접고선 두어번 대문을 힘껏 두드렸다.
"계십니까?"
생각해보니 내 의지로 직접 귀족의 집을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
그 탓에 이렇게 대문을 쾅쾅 두드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다행히 걱정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저번에 본 메이드가 금세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었기 때문이다.
메이드는 저놈이 왜 저기 서 있지, 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서 말했다.
"이런 시간부터 어쩐 일로 오셨나요?"
"다름이 아니라, 카엔 님을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카엔 님이요? 어…. 지금쯤이면 이미 도장에 도착하셨을 텐데요."
조금 늦었나.
카엔이 오전부터 점심시간 즈음까지 수련에 힘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나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항상 나만 보면 사람 좋아하는 길고양이처럼 들러붙어 게으름피우기에 몰랐는데….
꽤나 부지런한 편이었구나.
메이드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나는 다시 우산을 펼쳤다.
뒤에서 '힘내세요!' 따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아 고개를 돌리니 이미 메이드는 집 안으로 쏙 들어간 뒤였다.
의미를 모르겠다.
내가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약하니 응원해주는 거겠지.
─툭
잘 포장된 도로가 끝나자 발끝에 돌멩이가 치이기 시작했다.
주로 모래와 흙으로 이루어진 서쪽 구역의 길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하필이면 비가 내리고 있는 탓에 돌멩이를 찰 때마다 바짓단에 빗물이 튀었다.
숲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모든 일의 시작점이 된 도서관을 지나 조금 더 깊숙한 곳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가문비나무가 일렬로 주르륵 이어진 길을 마주치곤 사브작, 사브작, 축축한 모래알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곧 저 멀리서 백야의 저택과 닮은 동양풍의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걸 기와라고 하던가. 여러 나무기둥에 받혀져 올라간 짙은 군청색의 지붕은 언제봐도 차분한 느낌이 가득했다.
나는 그 끝을 따라 조르르 흘러내리는 빗물에 시선을 두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 그런 취향 되게 이상하지 않아요?
─세상은 넓으니까요. 이건 비밀인데, 제 친구 중에서도 한 명….
예상했던 살벌한 검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여자들끼리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는 소리가 빗방울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들려왔다.
하나는 카엔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나머지 하나는 자세와 기본을 고집하기로 유명한 레프니아 교수의 목소리 같긴 하나, 확실친 않다.
저번에 어떻게든 간신히 시간을 비워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을 땐, 말 그대로 하루종일 검만 휘둘렀었는데.
귀족이랑 어울릴 땐 쉬는 시간도 주는 교수님이셨구나.
불만이란 뜻은 아니다.
나로썬 수련에 쓰는 시간 하나하나가 소중하니 그편이 더 좋았다.
조금 더 가까이 걸어가니 갑작스레 말소리가 멎는다.
마침 쉬는 시간이 끝난 모양이다.
지금 내가 들어갔다간 수련에 방해되겠지.
밖에서 기다리자.
우산을 접은 나는 뾰족한 나뭇잎이 몇 장 떨어진 툇마루에 대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흐음…."
어떻게 사과해야 가장 효과가 좋을까?
마침 비도 내리고 있겠다, 카엔만 따로 살짝 불러서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납작 엎드릴까?
창의력이 부족한 탓인지 그것 말곤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은 만나자마자 베이는 것만 피했으면 좋겠다.
후, 한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우연히 뒤쪽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
"…평민."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주먹크기만큼 열린 미닫이문 틈새로 연보랏빛 눈동자가 내 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잡담이 끝났으니 수련으로 이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카엔 님."
"……왜 왔어?"
투둑, 바닥을 두드리는 빗소리 너머 삐죽삐죽 날이 선 목소리가 귓가에 박힌다.
당장 꺼지라는 말을 예쁘게 포장하면 저런 느낌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카엔에게 단칼에 베이는 일은 피했다.
아직까진 사과할 기회가 있다.
말을 잘 고르자.
"꼭 드려야 할 말이 있어서요. 지금은 바쁘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빠른 사과가 훌륭한 사과라곤 하나, 때와 장소를 고려해야 하는 법이다.
장소는 그렇다 치더라도 안에 교수가 있는데 '실신할 때까지 짐승처럼 박아대서 죄송합니다' 따위의 말을 할 순 없는 것이다.
일단은 단둘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카엔도 그걸 모르진 않는지, 미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친새낀가, 라는 시선으로.
"…계속 기다릴 거야?"
"네."
"하, 할 일 없어?"
"오늘은 비교적 한가해서요."
오늘은 수련에 시간을 쏟기 위해 가장 간단한 일정만 잡아둔 날이었지만.
자고 일어나서야 뒤늦게 떠오르기도 했고.
굳이 카엔에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언제까지 할건……. 아, 아니. 언제까지 시간 비는데?"
"일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거의 하루 종일…?"
도장 청소 정도는 며칠 뒤로 미루어도 별 상관없으니 말이다.
"하, 하, 하루… 종일…."
카엔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미닫이문 뒤로 홱, 모습을 감췄다.
속닥속닥 누군가와 바삐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잠시 뒤, 점차 손가락 하나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닫히고 있던 미닫이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에서 머리를 질끈 땋아올린 여인 하나가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안녕하세요. 레프니아 교수님."
"그래요. 잘 지냈나요?"
안에 있던 교수의 정체는 예상하고 있던 대로 레프니아 교수였다.
우아한 손짓으로 우산을 펴더니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교수.
"저야 뭐…. 평소처럼 지내고 있죠."
"그렇다니 다행…. 음, 다행이 맞나? 요즘 통 교육 요청이 안 와서 많이 힘든가 했는데."
아카데미 학생은 고작 7명인데 교수진만 학생 수의 몇 배로 있다 보니 기억하기 쉬운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은 황녀 둘이 각자 사정으로 각자의 제국으로 돌아가 5명밖에 없으니 더더욱 그렇겠지.
대충 미소로 얼버무리자 입을 가리고 미묘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해주는 레프니아 교수.
그녀는 잠시 뒤를 살풋 돌아보았다가 이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
우산에 가려져 있으니 아무것도 안 보였을 텐데.
왜 뒤를 돌아봤던 걸까.
의문은 잠시였다.
뒤에서 머뭇머뭇 다가온 카엔이 하얀 양말을 신은 발로 내 등을 툭, 툭, 건드린 탓이다.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카엔의 발길질을 고스란히 맞아주었다.
"…변태."
"예. 카엔 님."
"변태 자식아."
"…네."
"…왕변태."
"……."
교수가 모습을 감추고 나자 다시 호칭이 평민에서 변태로, 그리고 왕변태로 바뀌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자기가 쓴 야설도 아닌데 나한테 작가라 의심받아 강간까지 당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진 호칭이 왕변태로 바뀐 것뿐이라 다행이었다.
마구마구 때린 것도 아니고, 검으로 즉결처형을 하지도 않았고, 고작해야 발끝으로 내 등을 툭, 툭, 건드린 것이 전부다.
언제나 내게 여왕 대접받길 바라는 것과는 별개로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것 같기도 하다.
"변태. 너 때문에 허리 아파.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 만큼."
"……."
"너한테 몇 번이고 맞았던 엉덩이도 따끔따끔하고."
"……."
"무뎌질 만큼 무뎌진 줄 알았던 꼬리도 엄청나게 욱신거려. 도대체 뭘 한 거야?"
"……."
물어뜯고, 마음껏 잡아당겼다.
이것도 같이 사과해야 할 성싶다.
"게다가 어깨부터 목덜미로 올라가는 부분에 이빨 자국이 나 있다더라? 키아라가 안 알려줬으면 다른 사람한테 다 들켰겠다. 그치?"
뭔가 딱딱한 것이 머리에 툭, 툭, 닿았다가 떨어진다.
아마도 정체는 목검.
사과할 기회를 줄 테니 당장이라도 머리를 박으란 뜻으로 이러는 모양이다.
그래, 마침 위치도 좋으니, 여기 카엔을 세워놓고 앞에서 비를 맞으며 엎드려도 괜찮을 것 같다.
계획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순간.
"끄응…. 나쁜 놈…."
달그락, 툇마루에 목검을 떨어뜨리는 소리와 함께 카엔이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도 어깨를 꼭 붙여서.
"아으… 내 엉덩이……. 어떤 변태가 잔뜩 떄려대지만 않았어도…."
그리 말한 카엔은 자세를 조금씩 바꾸며 내게 더욱 가까이 붙어왔다.
방금까지 검을 휘둘러댄 탓인지 짭조름한 체향이 섞여 있었으나, 기분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어제 있었던 일이 조금 더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다.
실신한 카엔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움찔움찔 경련하는 엉덩이에 내 욕망을 마음껏 내려찍었으니까.
그 일련의 기억이 카엔의 체향과 함께 뇌리 속에 녹아들어 버린 탓이다.
"……."
"……."
불편할 정도로 찰싹 달라붙은 채 이어지는 침묵.
이따금 쫑긋거리는 카엔의 늑대 귀.
점차 선명해지는 카엔의 숨소리와 부드러운 빗소리만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정경 속.
이래선, 안 된다.
"그…. 오, 오늘은 설마 여기서…."
"어제는…!"
"……?"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카엔 님."
나는 황급히 사과부터 꺼냈다.
이러다간 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 것 같아서.
"……아?"
옷을 살짝 흐트러뜨린 채,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운 카엔을 마주하는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