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26화 (26/66)

26

불쑥 튀어 나가려는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죄송하다는 단색적인 사과라든가.

사실 유즈가 먹인 약물 탓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는 변명이라든가.

카엔 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랬습니다, 라는 칭찬의 낱말 뒤에 모습을 숨긴 책임전가까지도.

하지만 혀끝에서 한 번 정제된 단어는 모두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밋밋하고도 볼품없는 사과가 추적추적한 빗소리 사이에 섞여들어 간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

죽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죽을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입은, 내가 생각해도 무척이나 뻔뻔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내뱉은 나는 조심스레 시선을 옮겨 카엔을 바라보았다.

내 사과를 듣고 있는 카엔도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터였다.

선심을 써서 야설에 적혀있던 것 하나를 직접 해주기 위해 방을 찾아온 카엔.

흥분해버린 탓에 억지로 펠라치오를 시키려 든 나.

그런 나를 혼내는 대신, 그간 궁금했던 로맨스 소설의 장면을 재현시키는 것으로 봐주려고 했던 카엔.

그런 카엔에게 다시 한 번 흥분해 실신할 때까지 강간해버린 나.

병신새끼도 이런 병신새끼가 다 있을까?

그 증거로 그녀의 입술은 뻐끔뻐끔 열렸다가 닫히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렇게 난폭하게 굴어놓고 오늘은 왜 순한 양처럼 사과하고 있냐고 물어보는 듯, 의문 가득한 표정은 덤이다.

"죄, 죄송하다고?"

"…네."

흐트러져있던 제복은 어느새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어차피 기껏해야 위에서부터 단추 몇 개가 부자연스럽게 풀려 있던 것이 전부긴 했지만 말이다.

"제가 그….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감히 함부로 카엔 님의 몸에 손을 대다니."

나는 흙바닥에 부딪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답했다.

이유야 어쨌든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유즈가 먹인 약이 원인 같긴 하나, 아직 확실하진 않으니 말을 아꼈다.

"카엔 님이 무슨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밭겠습니다."

감히 선처해달라는 이야기는 끝끝내 뱉을 수 없었다.

사실 이렇게 카엔과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만약 대상자가 백야나 황녀들같이 장난스럽기보다 무뚝뚝한 여인이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은 그녀들의 살결에 손가락이 닿는 시점 이후로 나아갈 수 없었다.

혹시라도 설마 꿈인가 싶어 몰래 허벅지를 꼬집어 봤지만 아릿한 통증만이 남았다.

바람에 실려 코끝을 간질이는 나무 향도.

처마에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의 냄새도.

봄날에 어울리지 않게 생각보다 으슬으슬한 날씨도.

아직까지도 내 어깨에 꾹 달라붙은 카엔의 체향도.

생각보다도 더 따스한 그녀의 온기도.

그 모두가, 현실의 것이었다.

"…변태."

나를 향해서가 아니라, 눈앞의 숲을 향해 뱉어진 목소리.

하염없이 흙바닥만 바라보던 고개가 자연스레 카엔을 향했다.

그녀또한 나처럼 차곡차곡 빗방울을 담아내는 흙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엉덩이 뒤로 길쭉하게 솟아나온 꼬리가 내 근처에서 살랑거리고 있긴 한데, 콱 내 허리를 붙잡아 앞으로 메다꽂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꼬리에 그 정도의 힘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 대비는 하고 있자.

괜히 시선을 느낀 카엔과 눈이 마주치기 전, 나는 다시금 카엔이 보는 것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네. 카엔 님."

잠깐의 침묵.

"……나 추워."

그리 말한 카엔은 조금 더 내 옆 가까이 몸을 붙여왔다.

체온이 높은 편이라 추위도 잘 느끼는 걸까.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의문을 해결한 나는, 카엔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쏴아아아───….

우리는 한동안 그 모습 그대로 이슬비 내리는 숲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따금 툇마루에 닿은 엉덩이가 아픈지 카엔이 끙끙 앓는 소리만 덧씌워진 게 전부였다.

"끄응…."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태풍이 찾아오기 전처럼.

"……."

한편으론 불안했다.

나는 나대로 죄송하단 말만 반복해봤자 그 의미가 옅어질 것 같아 닥치고 있던 건데.

카엔이 왜 조용한지에 대해선 온갖 추측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내 처분을 고민하고 있는 걸까?

화가 풀릴 때까지 목검으로 우다다 두드려 팰지,

주먹으로 마구마구 때려줄지,

그것도 아니라면 법의 심판에 맡길지.

어느 것이 가장 맛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냈을 때.

말없이 빗방울을 눈으로 좇고 있자니 톡, 무언가가 가볍게 어깨에 부딪혔다.

다름아닌 카엔의 머리였다.

그와 동시에 새근새근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 카엔의 가슴이 눈에 띄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 잠들었나.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내 눈은 이미 카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카엔 님?"

질끈 감긴 두 눈.

바람이 살랑일 때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속눈썹이 퍽 귀여웠다.

기숙사에서 6시쯤 나왔으니 아마 지금쯤 7시를 조금 지났을 것이다.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다만, 확실히 피곤한 시간이긴 했다.

카엔은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을 테니 더더욱 피곤할 테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노곤노곤해지다 보니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이걸 어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금껏 날 사지로 내몬 발정제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잠든 카엔에게 이런저런 나쁜 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단, 이런 곳에서 잠들었다간 감기 걸릴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쩌면 카엔과 함께 있는 이 상황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몸을 일으킨 나는, 지지대가 사라진 탓에 툇마루에 머리를 찧으려는 카엔의 몸을 붙잡고 힘껏 들어 올렸다.

공주님 안기.

어릴적 동화책에서나 보던 그 자세였다.

"……?"

일단 비바람이라도 피하고자 도장 안으로 움직이려던 나는 묘한 위화감에 걸음을 멈췄다.

몸이 왜 이렇게 딱딱하지.

당연히 유연하게 늘어져야 할 몸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딱딱했다.

운동은 뒷전으로 둔 채 손가락만 까딱까딱 움직이는 마녀도 아니고.

옷 때문에 그런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보통 잠이 든 사람은 축 늘어져 무거울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카엔은 내 품 안에서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으음…."

아무래도 공중에 떠 있어서 몸이 놀랐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카엔과 함께 도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

당연히 침구류 같은 게 마련되어 있진 않았다.

오직 검을 수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으니까.

덮어줄만한 이불도 없고, 몸을 뉘일만한 요도 없다.

그 때문에 일단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미닫이문을 꼭 닫은 뒤, 등을 기대고 앉을만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검술 도장 가장 안쪽의 벽과 벽이 맞닿는 곳이었다.

물론 카엔에겐 불편하겠지만 이보다 나은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까 엉덩이가 아리다고 했으니 아기를 다루듯 최대한 천천히 카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와중에도 잠깐 카엔의 몸에 힘이 들어갔으나, 고통 탓이겠지 하고 대충 넘긴 뒤 겉옷을 벗어 그녀의 허벅지를 가려주었다.

새까만 바지를 입고 있으니 시선을 두는 데엔 별문제 없긴 한데, 추위에 떠는 것보단 이편이 나을 것이다.

대신 조금 더 쌀쌀해진 나는 카엔이 쓰던 목검을 챙기기 위해 도장 밖을 잠시 다녀왔다.

말 그대로 잠시.

"……?"

내가 저렇게 카엔의 코까지 덮을 만큼 옷을 덮어줬었나.

목검을 쥐고 돌아온 나는 구석에서 꼼지락대는 카엔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 쌀쌀하긴 해도 저럴 정도는 아닌데.

아무래도 생각보다 많이 추위를 타는 모양이다.

"후우…."

그래도 입고 있는 셔츠마저 벗어서 덮어줄 순 없는 노릇이니 아까처럼 카엔에게 어깨를 내주었다.

직접 몸을 꾹 붙이기엔 조심스러웠으나, 어깨와 어깨가 닿자 곧바로 머리를 들이미는 카엔.

이걸로라도 카엔의 화가 좀 풀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카엔에게 용서받고 나면 유즈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사과해야하나?

아니면 왜 루크 님이라 불렀는지 캐물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야설 작가따위 관심 가지지 말고 졸업이나 신경써야 할까?

벽에 등을 기댄 나는 멍하니 도장 입구를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

이게 아닌가.

"……."

카엔은 모르는 척 루크의 어깨에다 볼을 비벼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스르륵, 턱밑으로 내려간 외투를 다시 끌어올려 줄 뿐.

그리고는 조용히 어깨를 내어준 채로 침묵을 지킨다.

"……."

이게 아닌데.

저번에 침실에선 어떻게 했었더라.

잠든 척 눈을 감은 카엔의 머릿속으로 일련의 기억이 휘리릭 지나간다.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루크의 말을 잘라내고,

사심을 채우기 위해 루크에게 꽉 껴안아 달라고 했었지.

루크와 처음 몸을 섞게 된 계기는 바로 그것이었다.

예컨대 루크의 사과를 철저히 무시한 뒤, 계속 그의 몸과 맞닿아 있으면 또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제 슬슬 네가 작가였니, 뭐니,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하면서 손을 뻗어와야 하는데….

하지만 이번엔 너무나도 상냥했다.

지금껏 봐왔던 평소의 루크처럼.

괜히 시선을 끌기 위해 귀찮게 달라붙어 댔던 예전 루크의 모습처럼.

최근 이틀간 보았던 변태 루크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으으…. 어쩌지….'

카엔이 원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조금 더 난폭한,

조금 더 버릇없는,

조금 더 강압적인 루크.

그를 만나고 싶었다.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이상한 핑계를 대며 교수를 내쫓지 않았던가.

레프니아 교수와 약속한 시간은 정오까지.

즉, 지금부터 한동안 이곳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

하고 싶다.

엄청나게 하고싶다.

섹스.

어쩌면,

강간.

지금 당한다면.

수면간.

"……."

루크가 돌아간 뒤, 밤에 뽀송뽀송하게 바뀐 침대에 엎드려 혼자서 미친 듯이 손가락을 집어넣어 보았으나 그따위 짧고 얇은 물건으론 한참이나 부족했다.

결국 낮엔 애액으로 물웅덩이가 되었던 침대 시트 위를, 이번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조그맣게 더럽힐 뿐.

어제 새벽의 카엔은 몸만 뜨겁게 달아오른 채, 절정 근처조차 도달하지 못하고 자위를 그만두었다.

어제 느꼈던 그 미지의 쾌락을, 또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성욕과는 조금 다르다.

루크의 위가 아니라, 침대에서만큼은 루크의 아래라 각인되어버리는 감각.

일국의 대공녀씩이나 되어서 고작 평민에게 제압당해 실신할때까지 따먹히고 말았다는 감각.

상상만해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감각에, 팬티가 또다시 축축하게 물들어갔다.

지금 강제로 루크에게 쿵, 쿵, 자궁을 짓눌린다면, 엄청나게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또 자연스럽게 루크와 몸을 섞을 수 있을까.

"……."

슬쩍슬쩍 애완동물처럼 루크의 어깨에 뺨을 비벼봤으나,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방법…. 방법….

내 권위는 지키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느낌으로 루크에게 망가질 방법….

'…도대체 어떻게 해야…….'

카엔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처음 루크의 기숙사에서 나쁜 짓을 당할 뻔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날 밤, 루크가 야설에 적어놓았던 행위를 '포상' 형식으로 제공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것과 비슷하게 흘러간다면 어떻게든 범해지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적당한 명분이 없었다.

루크가 뭔가 잘한 것이 있어야 포상을 내릴 텐데, 최근엔 사과만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자는 척 빈틈을 보여주는 것 말고 더 괜찮은 방법은 없을까.

눈을 꼭 감은 채 거듭 고민하는 카엔.

"……!"

그녀는 이내 한 가지 묘수를 떠올리곤 질끈 감고 있던 눈에서 힘을 뺐다.

"…루크."

"아, 카엔 님. 이제 몸은 좀 괜찮으세요?"

굳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저번에도 그러지 않았던가?

네가 먼저 내 몸을 만졌으니, 나도 네 몸을 마음대로 만져야겠다고.

이번에도 똑같이 가면 된다.

"용서할게."

"…네?"

"용서한다고. 어제 네가 했던 일. 그저께 네가 했던 일. 전부."

"어…. 감사합니…."

"그 대신."

"……?"

"…그 대신……."

곧 만족할때까지 섹스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뚝 멎는다.

생각해보니 이런 방법을 써선 안 됐다.

저번과 똑같은 말을 하면 루크에게 의도가 전부 들킬 게 분명했으니까.

사실 나는 너랑 또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다… 라는.

그런 부끄러운 속마음이 까발려지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

결국, 새어나오는 것은 처음 의도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

"……궁금해."

"네? 궁금하다니 무슨…."

"키스."

"……."

"해 봐도 돼?"

카엔은 루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했다.

코 끝에는 여전히 루크의 재킷을 걸친 채.

킁, 킁, 자기도 모르게 끊임없이 루크의 체향을 들이키며.

폐 한가득 루크의 체향을 소중히 담아두곤.

연보랏빛 눈동자만 빼꼼 내밀어서.

"너랑 키스하고 싶어……."

카엔은 당황하는 루크의 표정도 눈치채지 못한 채 군침을 삼켜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