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32화 (32/66)

32

두명의 발자국이 나란히 뻗은 진흙길.

차곡차곡 빗방울이 담겨가는 발자국 끝에서 우산 2개가 서로 어깨를 맞추고 걸었다.

하나는 비를 피하고자 위를 가리고,

하나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간신히 발 앞부분만 보일 정도로 기울인 채.

남이 본다면 저게 도대체 뭔지 꽤나 의심스러운 모양새로 말이다.

─사박, 사박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마다 빗물에 젖은 모래를 밟는 소리가 우산 밑에서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과거에 있었다던 스파이들은 매일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살았을까?

머리로는 하루에 서너명 정도 마주치는게 고작인 드넓은 아카데미란 걸 알고 있지만, 자꾸만 시선이 이리저리 불안하게 움직였다.

만약 다른 학생 중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마침 이곳을 지나던 교수와 마주친다면.

그런 불길한 상상이 몇 번이고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다.

대응은?

마주친 사람이 왜 우산을 그렇게 들고 있느냐고 물으면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허술한 거짓말로 얼룩진 변명보단, 차라리 곧장 턱을 때려서 기절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사박, 사박

은밀하지만, 어떻게든 빠르게.

다행히도 우리가 카엔의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마주친 것은, 비를 피해 도망치는 참새 몇 마리가 전부였다.

""후우….""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내뱉어진 한숨 소리.

드디어 긴장감이 좀 사라진 나는 진작에 물어봤어야 할 질문 하나를 겨우 꺼냈다.

"카엔 님. 그러고 보니 메이드는…."

"아, 뭐, 키아라도 대충은 눈치채고 있을걸."

"네?"

"빨래는 전부 키아라가 하니까. 게다가 어젠 자기 전에 한 번 시트를 갈아주기도 했었고."

너 떄문에 온통 축축하게 되어버렸었잖아.

조용히 덧붙이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며 애꿎은 뺨만 긁적이는 카엔.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따위의 실없는 대답을 꺼내려던 나는 저택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타이밍 좋게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메이드다.

카엔이 말하길, 분명 키아라라는 이름이랬지.

그녀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좋으려나.

왜 또 여기 오셨어요? 같은 표정은 아닌데.

당신 옆에 우산을 이상하게 내밀고 있는 사람은 누구죠? 같은 표정도 아니다.

담담했다.

으이구 내 저럴 줄 알았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란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루크 씨. 그리고… 카엔 님."

멀찍이서 보일만한 것은 우산 밑으로 내밀어진 바지와 신발뿐.

그럼에도 메이드는 내 옆에 선 사람이 카엔이라 단박에 짚어냈다.

유추해내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그녀의 눈썰미가 최소 평균은 된다는 증거다.

메이드가 온갖 끈적한 체엑으로 엉망진창이 된 침대를 목격하고도 우리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을 린 없다는 이야기다.

그럼 아침에 들었던 '힘내세요'는 그런 쪽으로 힘을 쓰란 이야기였을까?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보다 그럴싸한 추론.

직후 탁, 탁, 대문까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드는 내게 고생했다는 듯 격려하는 느낌의 눈길을 남긴 뒤 카엔을 챙겼다.

정작 고생은 카엔이 했는데 말이다.

"우산은 왜 그렇게 쥐고 계세요? 설마 이번엔 옷이라도 하나 해먹으신거에요?"

카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엇다.

메이드의 지적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트집 잡을 수 있는 곳조차 없을 정도로.

카엔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메이드는 이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모시는 귀족 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여도 되나 싶었지만, 막상 당사자인 카엔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우산 뒤에 숨어 뺨을 붉게 물들이고 부끄러움을 참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평소부터 주욱 저런 관계를 유지해온 모양이다.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 어째 언니와 동생에 가까운 느낌.

물론 언니는 메이드 쪽이다.

"얼마나 더러워졌길래 그래요? 어차피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한 번 봐요."

"자, 잠깐만 일단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에잇… 빈틈……? 히에엑…?!!"

"꺅…."

메이드는 보드라운 이슬비따위 신경쓰지 않고 막무가내로 몸을 들이밀어 카엔의 우산 속으로 쏙 들어갔다.

상대가 상대다보니 억지로 막아내진 못하는 카엔.

그리고는 두 여자의 상반된 비명소리가 하늘색의 우산 너머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착잡하다.

날 도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몰래 뒷걸음질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나는 우두커니 자리를 지켰다.

"아니 뭐 묻은 게 아니라 아예…."

"……."

"이 비싼 옷이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대, 대, 대련을… 하다가….'

대련이라니,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이었다.

하지만 메이드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그냥 못 들었다는 듯이 무시해 버리곤, 우물쭈물하는 카엔의 등을 밀어 저택 안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단추는 챙겨 오셨어요?"

"어? 으응…. 루크가 아마도 챙기는 편이 좋을 거라면서…."

"크게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아… 마도?"

"여기서 보니 어제처럼 꼬리 털이 이리저리 짓눌려 있는데요? 괜찮으신거 맞죠? 비가 오는 날이라 에센스도 꼼꼼히 바르고 나가셨잖아요."

"…괘, 괜찮아. 이건 그냥 손질만 하면 되니까."

점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어째 병풍이 되어버린 느낌.

뭐, 카엔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세세하게 추궁당하느라 시끄러워지는 것보단 차라리 이 편이 낫다.

카엔도 저택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으니, 이제 유즈와 담판을 지으러 갈 차례다.

저택 안으로 살랑거리는 새카만 꼬리가 쏙 들어가고,

지금껏 우두커니 이슬비 아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내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며칠새 퍽 익숙해진 목소리가 저택 쪽에서 짧다랗게 들려왔다.

"루크!"

"……?"

"내, 내일 보자…!"

작별인사.

고작 몇 음절도 채 되지 않는, 그런 가벼운 인사.

하지만 어쩐지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 저런 인사를 받아본 건 처음인 것만 같다.

그런 감상에 빠져있던 탓일까.

붕붕 손을 흔들어주는 카엔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기도 전에, 저택의 문이 무심하게 닫히고 말았다.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 왜 닫았냐고 메이드에게 심술부리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제 옆에서 꽁냥대는걸 보니 기분 나빠서요, 라는 대답이 뒤를 잇는다.

이유 모를 웃음을 지은 나는, 잠시 카엔이 했던 것을 따라 천천히 손을 흔들어주곤 조용히 저택을 떠났다.

****

르페아스 아카데미엔 굳이 외울 필요 없는 우스운 규칙 몇 가지가 있다.

말뿐인 평등을 연극하기 위해, 귀족의 사용인 수는 최소로 한정된다든가.

필요시 귀족과 평민이 동시에 같은 교수에게 교육요청을 할 수 있다든가.

굳이 필요 없는 배려인 탓에 오히려 기분 나빠지는 규칙들이었다.

막상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애매한 재능의 평민들은, 귀족과의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기 이전에 입학하는 것조차 큰 난관인데 말이다.

아무튼 '귀족의 사용인 수는 최소로 한정된다.' 라는 규칙 때문에, 아카데미를 거닐다 메이드를 마주치는 일은 의외로 흔치 않은 편이다.

게다가 평범한 인간보다 살짝 더 '기다란 귀'를 가진 메이드를 마주치는 건, 빗속에서 즐겁게 춤추는 고양이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희귀한 일이고.

그런 희귀한 일이 대략 입학 한 달 만에 눈앞에서 벌어졌다.

"……."

엘프 메이드라니.

교수 중에서도 엘프는 없는데.

유즈를 제외한 엘프가 아카데미에 있긴 했구나.

당연하게도 서로 인사는 하지 않았다.

일면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엘프는 심각하게 낯을 가리는 종족이기에 이러는 편이 오히려 예의바른 행동으로 통했다.

'유즈의 메이드….'

엘프 특유의 외모도 외모지만, 정장과 가까운 느낌의 말쑥한 메이드 복이 가장 눈에 띄었다.

세계수 출신 메이드들은 저런 복장을 하는 건가?

아니면 저 사람만?

유즈 특유의 답답한 복장을 떠올려보니, 어쩌면 엘프들은 살결을 밖에 내보이길 극도로 꺼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반대편에서 걸어와 마치 물웅덩이를 마주친 것마냥 나를 피해 간 메이드는 사뿐사뿐 서쪽 구역을 향해 걸어나갔다.

희미하게 스치는 향기는 아마도 라벤더.

그것과 비슷한 향이 비냄새, 그리고 흙냄새 사이에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예쁘다, 라는 감정보단 생각보다 꽤 잘 어울린다, 라는 감정을 담아 메이드의 뒷모습을 좇았다.

저택에 바쁜 일이 있었던 건지,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 메이드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잠시나마 그녀를 마주친 덕에 확실해진 것 한 가지.

마침 메이드는 북쪽 구역에서 이곳으로 걸어왔다.

북쪽 구역엔, 유즈의 연구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유력한 용의자인 유즈 베르나는… 아마도 평소처럼 자신의 연구동에 콱 틀어박혀 있을 것이다.

헛걸음할 걱정은 조금 덜었다.

우산을 고쳐쥔 나는 다시금 칙칙한 건물 덩어리들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유즈가 정말 야설을 쓴 당사자라면.

나는 도대체 그녀를 어찌 대해야 좋을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으음…."

유즈 베르나.

이리스 반 유크라시아.

세른 폰 우르간.

현재 내 마음 속에 남은 유력 용의자는 이렇게 3명이다.

일단은 성녀도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이 남아 있으나, 저 셋에 비하면 모자라고.

그런 성녀가 가장 의심스럽다고 지목한 백야는, 내가 직접 도서관에서 확인한 게 있으니까.

순수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게 아니라면, 저 셋에 굳이 성녀와 백야까지 신경쓰고 있을 필욘 없을 것이다.

당장 황녀를 만날 방법은 없으니, 어차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유즈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아내는 것밖에 없다.

그래. 여기까진 좋은데.

다만 딱 하나.

유즈의 연구동으로 향하며 살짝 고민되는 것은.

날 괴롭히던 카엔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으니, 이쯤에서 만족하고 야설은 못 본 척 묻는 게 가장 낫지 않느냐?

라는 고민이다.

이번엔 운 좋게도 카엔이 제 취향을 깨달은 덕에 좋게 끝낼 수 있었지만, 다음은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발정제로 추정되는 약물.

이성을 잃은 척하니, 머뭇머뭇 조심스럽게 튀어나온 존댓말.

게다가 직접 제 가슴을 만져보라 시키기까지.

어쩌면 이 모든 것도 오해가 아닐까?

심지어 확인차 꾸욱 유즈의 젖가슴을 한 손 가득 주무르며 몰아붙이자마자, 그녀의 화염 마법에 휩싸여버렸으니까.

오해.

정말 오해일 수도 있긴 한데….

'뭘 하려 했길래 이런 오해가 생긴거지?'

도대체 무엇때문에 죄없는 사람에게 주기적으로 발정제를 먹이고,

이성을 잃고 덮쳐도 모른다 경고해도 괜찮다며 제 가슴을 만져도 된다 허락하고,

내가 이성을 잃고 흥분한 것 같으니 조심스레 존댓말을 해오기도 하는 것인지,

내 아둔한 머리론 '소설 속에 나온 것마냥 개처럼 따먹히고 싶어서' 밖에 짚이는 곳이 없었다.

이렇게 보면 유즈가 야설 작가가 아니면 말이 안 되는 상황.

하지만, 어이없게도 유즈가 범인이 아니란 증거도 곳곳에 존재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연구동에 콕 박혀 나오질 않는 유즈가 굳이 도서관까지 찾아가 야설을 쓴다?

설마. 그럴리가.

자연스레 범인은 황녀 중 하나라는 쪽에 생각이 기운다.

현재 아카데미에 없으면서,

동시에 도서관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

딱 이리스와 세른이니까.

하지만, 그럼 유즈가 보인 이상한 행동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라는 지독한 악순환에 빠질 무렵.

"……아."

먹구름이 끼어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나아가던 나는 익숙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유즈가 황녀 이리스와 함께 연구동으로 쓰고 있는 3층짜리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언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우산을 접은 나는 빗물을 털어내며 연구동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언제나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대리석 바닥.

그 위에는 처음 보는 얼룩이 두 줄 반듯하게 찍혀있었다.

빗물에 젖은 발자국이었다.

들어가면서, 그리고 나가면서 생긴 흐릿한 발자국.

아까 본 메이드의 발자국일까.

옷을 구경하느라 신발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달리 이곳을 방문할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평소 유즈의 연구동을 방문하는 날엔 항상 반짝반짝 빛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아마 어느 시간대를 정해서 메이드가 말끔하게 청소해놓고 가나보다.

그렇다면 그 위에 내 발자국이 찍히더라도 별 상관없겠지.

아직 물기가 남은 우산꽂이에 대충 우산을 집어넣은 나는 천천히 연구동 1층으로 발을 들였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일단 유즈와 부딪히고 볼 생각이었다.

언제나의 약품 냄새.

언제나의 보글보글 시약 끓는 소리.

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이뭉치는 비교적 어제보다 조금 더 많아진 것 같으나 하나하나 세본 적은 없으니 확실하진 않았다.

당연하게도, 유즈는 1층에 없었다.

2층에 있는 이런저런 도구들로는 부족한지 이렇게 1층의 도구도 이용하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곳은 이리스의 공간이니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는데 또 내게 발정제를 먹일 생각은 아니겠지.

나는 달콤한 핑크색이라기보다 매콤한 붉은색에 가깝게 변해 끓고 있는 시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계단을 올랐다.

반쯤 계단을 오르니, 귀여운 재채기 소리가 들려왔다.

벽면에서 빛나는 푸른 불꽃도 그렇고, 낮과 밤을 밥 먹듯이 바꾸는 마녀지만 일단 지금은 제대로 깨어있는 것 같다.

네가 썼냐?

아니면, 유즈 님이 쓰셨어요?

마지막까지 어떻게 유즈를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나는 계단 밖으로 데구르르 굴러나오는 종이뭉치를 받아들며 2층으로 올라섰다.

아. 그러고보니 이 종이로 유즈의 필체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펼치고 있는 와중이었다.

"플래티. 저번에 분명 말했었지. 어지간해선 내가 내려갈테니 2층엔 올라오지 말라고."

아삭, 아삭, 듣기만 해도 식욕 떨어지는 소리가 의자 등받이 너머에서 들려왔다.

엘프는 다른 종족보다 채식주의자가 많은 편이라더니 유즈도 그런 엘프 중 하나인 모양이다.

방금 주워들었던 종이에 적혀있던 주석을 읽게 된 이상, 그딴 사사로운 음식 취향 같은 건 딱히 중요치 않았지만 말이다.

"됐어. 오늘은 뭐, 루크가 여기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

"대신 잠깐만 여기로 와볼래? 저번보다 약의 효능을 아주 살짝 높여봤는데."

"……."

"제대로 먹히는지 네 몸으로 테스트… 를……?"

탁, 유즈의 옆에다가 종이 한 장을 거칠게 내려두니 밤하늘을 닮은 군청색의 머리카락이 살풋 흔들렸다.

그리고는 곧장 딱딱히 굳는다.

여자의 손이 아니라서.

그 손이 펼친 종이가 예사 종이가 아니라서.

포크에 콕, 찔려 입 앞에서 오물오물 짓이겨지고 있던 이파리 몇 개가 유즈의 가슴 위로 나풀나풀 떨어져 자국을 남겼다.

이론상 효과는 확실. 테스트 필요.

결과. 11, 24, 37번 회로와의 연결이 원활하지 않음. 이대로 강행했다간 이성이 아닌 다른 곳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 다분.

폐기.

야설 노트에 쓰여있던 것만큼이나 유려한 글씨체.

여기까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글씨를 잘 쓰는 귀족은 흔하니까.

하지만 그런 글씨체로 적힌 수상한 단어들.

특히, '이성'.

이것만은 여기 적혀있으면 안 됐다.

"저번에 분명 그러셨잖아요. 이성을 잃는 것 따위의 결과가 나오면 안 된다고. "

대답은 없다.

"상정해두지 않은 결과라고. 부작용일리도 없다고."

변명도 없다.

"그럼 이건 도대체 뭔지 설명 좀 해주시죠."

여전히.

대답은 없다.

"유즈,  님."

입술 사이에 포크를 문 유즈는, 마지막까지 내 얼굴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