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오해하지 마."
이미 입안에 들어차 있던 풀잎들을 느릿하게 삼켜낸 유즈.
그 지겨운 시간을 견뎌낸 후에야 듣게 된 대답은 고작 이것이 전부였다.
오해, 라고.
가장 듣기 싫었던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그녀의 입술에 담긴다.
"오해? 오해라고요?"
"응. 오해."
"요새는 그렇게 뻔뻔한 거짓말을 '오해'라고 합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차분하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흥분해서?
그렇지 않다.
유즈의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에 화가 나서?
어느 정도는 그런 이유도 있으나,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내게 이야기의 주도권이 있는 이 순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다.
사람대 사람으로 목소리를 섞었다간, 유즈를 몰아붙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음에도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내쫓길 게 뻔했으니까.
머리 아픈 건 질색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하나 얻어가는 게 있어야 했다.
설령 그것이 또 한 번 성녀에게 신세를 지게 되는 지름길이라 하더라도.
유즈의 머리를 내려다보는 눈이 두어번 깜빡일 무렵, 나와 달리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거짓말이 아니니까."
"거짓말. 차라리 부작용일 수 있다고 했으면 몰라, 유즈 님이 먼저 그런 부작용은 없다고 못 박으셨잖아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진정해 루크. 다 설명할 수 있어."
"어떻게요? 그동안 제게 발정제를 먹인 이유. 유즈 님이 가슴을 만져도 괜찮다고 허락한 이유. 저를 루크 님이라 불렀던 이유. 이것들 전부."
"……."
"지금 당장 설명하실 수 있어요?"
말을 마친 나는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지 않는 유즈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흥분해서?
…아마도, 조금은 그렇다.
한번씩 실험이랍시고 유즈에게 끔찍한 괴롭힘을 당한 뒤엔, 깊은 밤중에 유즈를 내 상상 속으로 끌고 가 훨씬 더 과격하게 괴롭혀 주었으니까.
그런 여인을 현실 속에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
어쩌면 두 번 다신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손 아래에 짓눌려있던 종이가 조금 구겨졌다.
"…루크. 아직까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발정제 같은 거 아니야. 대답해주지 않았나?"
"맞을 텐데요. 유즈 님이 제게 먹이던 새빨간 알약, 발정제가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되니까."
그게 발정제가 아니라면, 흥분했을 때 이성을 잃게 되는 이유도, 이성을 잃었을 때 곧장 눈앞의 여자를 욕망껏 거칠게 대하는 것도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정녕 유즈의 정체가 야설 작가이지 않더라도, 그녀가 내게 주기적으로 발정제를 먹여왔다는 것 하나만큼은 진실이란 뜻이다.
점차 뜨거워지던 대화의 흐름이 잠시 끊긴다.
내가 펼쳐두었던 종이, 그리고 채소로 가득한 도시락이 놓인 책상 위를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쉰 유즈는 그제서야 의자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리춤, 그리고 가슴 위에서 음란하게 흐트러지는 군청색의 머리칼.
그 밑에 박힌 타오르는 듯한 형상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덮듯이 위를 점한 내가 뚫어져라 유즈를 내려다보고, 의자에 앉은 유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모양새.
예쁘다. 신기하다. 무섭다.
그런 1차원적인 감상을 넘어 느껴지는 것은, 부끄럽게도 그것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려보고 싶다는 가학심이었다.
"먼저, 약의 정체를 말해주는 건 아직 곤란해."
"그러시겠죠."
짜증이 솟는 것과는 별개로,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유즈가 곧이곧대로 솔직하게 말해줄 리 없었으니까.
뭐, 어차피 무슨 대답이 나왔어도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한 거짓말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궁금해하던 거. 저 마기(魔記)에 쓰여 있던 '이성' 이란 단어."
유즈는 1초도 채 되지 않는 잠깐 새 내 얼굴 이곳저곳을 훑어보다 툭, 말을 이었다.
"네가 저번에 이성이 끊긴다고 했으니까, 그 부작용을 없애보기 위한 연구를 좀 했을 뿐이야."
"…없앤다고요?"
좋아. 이렇게 빠져나가겠다는 말이지.
나는 잠시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종이 위에 적혀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닌 다른 곳에 영향을 끼칠 소지가 다분하다' 라는 이야기뿐.
아예 없앤다거나, 오히려 증폭시킨다거나 하는 '조절'의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상황이 안 좋다.
이래선 기껏 가져왔던 주도권마저 뺏기게 된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심증은 가득하나, 제대로 된 물증이 없는 상황.
다시 한 번 종이에 적혀있던 것을 읽어내리던 도중, 시야 끄트머리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움직이기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엔 켕기는 건 일절 없다는 듯 가슴 밑에 팔짱을 끼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나를 올려다보는 유즈가 있었다.
"……."
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그녀가 아까보다 더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분명 저번엔 부작용이 있을 리 없다면서요?"
"그땐 그때고. 이젠 인정해야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지적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식의 대답이었다.
평등한 논쟁이었으면 모를까, 신분 차이가 있는 대화는 이래서 어렵다.
불리할 때마다 대충 무마시키면 되는 그녀들과 달리, 나는 트집잡힐 구석이 없도록 생각해서 말을 꺼내야 하니 말이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유즈를 내려다보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미간만 찌푸렸다.
어차피 약의 정체가 발정제라는 게 밝혀지면 지금까지의 묘하게 어색한 이야기는 모두 유즈가 급하게 준비한 거짓말이 된다.
그렇게 되면 다시 대화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
지금이라도 그게 발정제라는 걸 증명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팔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플라스크, 그리고 약통을 바라보고 있자 유즈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가 너를 루크 님이라 불렀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내 가슴을 마음껏 주물러댈 줄은…."
"당신이 시켜서 주무른 거잖아요. 제 말이 틀려요?"
"중간까지는 그랬었지. 네가 이상한 모습을 보인 뒤론, 허락하지 않았고."
살짝 압박해보려 했으나, 한 마디도 지려 하지 않는다.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 유즈는 따박따박 말대꾸를 내뱉곤 어디 한 번 계속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내 가슴을 만지라 한 이유는 너도 알고 있잖아?"
"……."
"부작용을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으니까. 널 관리 감독하는 나로선 정말 그런 결과물이 나오는지 확인해봐야 했기 때문이고."
유즈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가 반쯤 의자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눈동자 하나가 그림자 뒤로 자취를 감췄다.
"내가 널 존댓말로 불렀다는 것도. 그냥 네 착각이 아닐까."
"……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숨.
그러나 유즈는 굳이 문제 삼지 않고 읊조리듯 말을 덧붙였다.
"괜찮아. 수컷들이 평소 여자들을 보며 그런 음흉한 생각을 품고 사는 것쯤이야,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여러모로 사람 짜증 나게 하는 말투로.
유즈는 처음처럼 몸을 돌려버린 뒤 아삭, 아삭, 다시 채소를 씹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이렇게 나오겠단 거지.
간신히 최소한의 예절을 유지한 나는 고개를 숙인 뒤 성큼성큼 유즈의 연구동을 빠져나왔다.
다음 실험은 이틀 뒤란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대답은 남기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2일…. 아니, 하루인가.'
나는 두 번 덧씌워진 발자국 위에 세 번째 발자국을 덧씌우곤 우산을 펼쳤다.
****
"하아……."
오늘 목표로 했던 테스트용 시약을 몇 개 더 완성시킨 후,
암막 커튼을 손등으로 걷자 노을 특유의 샛노란 빛이 어둑어둑한 연구동을 밝혔다.
새벽부터 비 냄새가 물씬 풍기더니 이제서야 그친 모양이다.
"아으…."
태생부터 집순이인 유즈에게 이런 필요 이상의 환한 빛은 너무나도 버거웠다.
직접 만든 인조광은 괜찮다만 이런 자연광을 마주칠 때면 아무리 희미하더라도 자연스레 눈이 찌푸려지곤 했다.
이딴게 건강에 좋다니.
365일 24시간 비가 내리면 얼마나 좋으려나.
다시 암막커튼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유즈는 뻐근한 어깨를 풀며 책상에서 벗어났다.
글을 쓰느라 쓰고 있던 안경을 손에 쥐어 늘어뜨리고선 한켠에 마련해둔 루크용 의자에 몸을 뉘인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끔은 너무 과하게 커다란걸 들여다 놓지 않았나 싶기도 했지만, 한편 또 가끔은 이렇게 침대 대용으로도 쓸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후, 유즈는 숨을 뱉어 몸을 이완시키고 뻑뻑해진 눈을 감아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물론 잠은 저택에 돌아가 잘 것이다.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아무리 귀찮더라도 최소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지금은, 다만.
생각을 좀 하고 싶었다.
"……."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이야기 했을까.
조금 더 가볍고 부드럽게 이야기 할 순 없었던걸까.
나는 왜 이따위로 말할 수 밖에 없는걸까.
연습이라도 열심히 했으면, 이번엔 훨씬 더 잘 이야기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리스에게 '가면' 쓰는 법이라도 확실히 배워두었으면 좀 나았으려나.
지나간 것을 붙잡고 후회해봐야 되돌릴 방법은 없다.
후, 답답한 한숨을 뱉은 유즈는 커다란 의자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책에서 배운 대로라면, 친구를 만드는 데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친절한 성격.
하나는,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것.
하나는, 그냥 압도적인 미모였다.
압도적인 미모?
그나마 가슴은 좀 괜찮은 것 같다만, 아마 다른 부분은 엘프 평균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미모의 기본은 아름다운 미소부터라고 배웠다.
자신이 미소 지을 수 없는 사람이라 깨달은 것은, 아마 10살 무렵부터.
더는 생각할 필요 없었다.
다음은 친절함이다.
이번엔 루크가 건방지게 굴어도 마법을 쓰지 않고 전부 넘어가 주었으니, 예전보다 더 친절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딱 거기까지만 말이다.
사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 라고 솔직히 밝힌 뒤에 친구가 되어달라 부탁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혹은, 그냥 유즈 자신의 잘못이 맞다고 인정한 뒤, 다음엔 더욱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작전을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둘 다 하지 못했다.
어린애처럼 자존심만 내세워 말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했을 뿐.
마지막으로 본 루크의 표정은, 절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마이너스 1점.
유즈가 정한 만점은 10점이니, 아직 11점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같은 취미를 공유하기'였다.
이건 아직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루크의 취미.
도대체 뭘까?
청소… 는 절대 아닐 테고.
저번에 보니 야한 걸 좋아하는 것 같긴 하던데.
억지로라도 야한 걸 좋아해 보려 해야 하나.
총점 마이너스 11점.
그래도 루크에게 마법을 쓰는 것으로 끝나 마이너스 20점을 기록했던 어제보단 상황이 나았다.
"이런 지방 덩어리를 도대체 왜 좋아하는지……."
말랑말랑한 감촉 말곤, 딱히 대단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제 가슴을 조물조물 가볍게 건드려본 유즈는 이내 손을 놓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저번에 가슴을 쥐어짜였을 땐 99%가 고통이었다.
물론 1%가 남았다고 해서 그게 쾌락이라는 뜻은 아니다.
쾌락이라기보단, '이게 뭐지?' 싶은 아리송한 감각.
아마 성적 쾌락이 이것을 일컫는 단어겠지만, 아직 그게 무엇인지 까진 잘 모르겠다.
그걸 좋아하게 되면 루크와 같은 취미가 생기는 걸까.
친구 1명을 늘리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유즈.
"으으음…."
아무튼 첫 작전은 보기 좋게 실패해 버렸으니, 이번엔 조금 더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게 좋을 듯하다.
1. 루크의 이성을 잃게 한다.
2. 이성을 잃으면, 자연스럽게 기억을 잃는 효과가 따라올 것이다.
3. 그 틈을 타서 루크에게 남자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연습해본다.
4. 나중에 친구가 되기 위해, 연습했던 것들을 제정신인 루크에게 써먹는다.
5. 친구 하나 추가.
이 일련의 과정 중 2번, 혹은 아예 1번에서부터 삐끗하고 말았으니까.
남자란 생물은 누군가를 밑에 두는 걸 선호하는 경우가 잦다고 했었나?
그렇기에 한 번 눈 딱 감고 존댓말을 써줬더니, 고작 그것 가지고 곧장 반말을 해대고, 발정제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어째 위험한 짓 같으니까, 아무래도 루크를 존댓말로 부르는 건 포기….
"……."
…아. 맞아.
발정제.
깜빡, 깜빡, 천장을 보며 계획을 수정하던 유즈는 동글동글한 안경을 앞머리 위에 덧씌우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
한편 그 시각.
행정실을 들러 며칠간 해야 할 일을 적어온 루크는 성녀와 함께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엔 일정이 꽤나 널널한 편이었다.
육체적 휴식과 함께 찾아온 돈 문제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제 생각엔, 아무래도 유즈 님이 쓴 소설인 것 같아요."
"백야 님이 아니고요?"
"백야 님은… 음… 글을 쓰시기엔 검을 수련하느라 바쁘시니까요."
"유즈 님도 하루종일 연구동에 틀어박혀 계시잖아요?"
"하지만, 뭔가 소설 속에 나와 있는 몇몇 상황들이 유즈 님과 있었던 일을 각색한 것 같아서요."
오히려 그런 것은 백야와의 도서관 성교육이 훨씬 더 가까웠으나, 굳이 성녀에게 사실대로 밝히진 않았다.
설마 애무도 모르는 여인이 그렇게까지 순수한 척 연기를 했을 린 없다고 생각하면서, 루크는 성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 건 뭔가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하고 찾아오셨잖아요."
흔들의자에 앉아 노을빛을 만끽하던 성녀는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성녀(聖女)였다.
성녀(性女)기도 했고.
루크가 원한 것은, 후자였다.
"성녀 님이 유즈 님과 친해지셨으면 합니다."
"제가요? 가능하려나? 아, 뭐, 일단은 해볼게요. 딱히 바쁜 일도 없고. 유즈 님, 예쁘니까."
"하루 안에."
"……."
잠깐의 침묵.
"……네? 하루 안에?"
방 안에 퍼진 자극적인 찻잎의 냄새를 맡으며,
루크는 성녀가 내온 맛없는 차를 억지로 홀짝였다.
영 익숙해지기 힘든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