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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36화 (3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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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하얗다.

생각보다 키가 작다.

생각보다 말이 많고 시끄럽다.

유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맞은 편에 앉은 성녀의 접시를 바라보았다.

원래 주방장의 몫이었던 고깃덩어리만 쏙 빼먹곤, 채소는 거의 다 남겨놓은 접시를.

"움움, 채소가 굉장히 신선하네요."

"……."

"고, 고기도 굉장히 맛있었고…."

식사를 마친 성녀는 입을 가리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런 미소 하나만큼은 성녀라는 단어에 퍽 어울리긴 하다만….

그런 사람이 도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유즈의 머리론 짚이는 곳이 없었다.

어쩌면 방금 일어난 탓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 꿈을 꾸는 중일지도.

채소 가득한 접시를 뒤적거리던 유즈는 이내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리스도 아닌, 루크도 아닌.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함께하는 1분 1초.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른 유즈에겐 너무나도 불편한 시간이었으니까.

"유즈 님은 채소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

대답도 뜸한데 질리지도 않고 말을 거는 성녀.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 란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 유즈는 결국 살풋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채소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로 나누면 좋아하는 쪽이긴 했다.

사실 그것보다는 그저 살기 위해 먹는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생판 남에게 시시콜콜 설명하고 있기는 귀찮았다.

그냥… 빨리 저택에서 나가주었으면 좋겠다.

"저, 저도 채소를 좋아하는데, 혹시 어떤 채소를 좋아하시나요?"

"……방울토마토."

생각해본 적 없다.

아삭한 것보단 그렇지 않은 잎채소 쪽을 좋아하나 그렇다고 해서 아삭아삭한 식감을 아예 즐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충 생각나는 아무 채소나 말해주자, 눈앞의 소녀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생각하고 있는 게 곧장 표정으로 드러나는 타입인 듯하다.

어렴풋이 이리스의 '가면'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리스의 것에 비하면 성녀의 가면은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방울토마토 좋죠! 생긴 것도 귀엽고, 다이어트에도 좋고, 감칠맛도 꽤나…."

"……."

유즈는 중간부터 성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식탁을 톡, 톡, 두드리던 유즈는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성녀… 님."

"아, 네!"

그래도 존대하는 편이 맞겠지.

아무리 모시는 신이 다르다 해도, 존중받기 위해선 먼저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주어야 할 테니까.

"식사 끝나셨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네?!"

반응이 좋다.

아니, 시끄럽다.

멀찍이서 보았을 땐 차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여인인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뭐, 그래도 갑작스레 남의 저택을 찾아와 아침 식사를 얻어먹고 있는 저 모습은 여전히 신비롭긴 했다.

나쁜 쪽으로.

성녀의 목소리에 무심코 귀를 막으려던 유즈는 식탁 위에서 주먹을 꼭 쥔 뒤 드르륵 의자를 뒤로 물렸다.

"이제 슬슬 연구동으로 가고 싶어서요. 제가 내일까지 끝마쳐야 할 일이 많아서."

"가, 같이 가죠!"

"…? 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즈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의외의 대답이 들려온 까닭이다.

물론 일면식도 없던 성녀가 저택까지 찾아온 일도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으나, 이번엔 더욱더.

분명 성녀도 마력을 몸에 두르는 것보단 내보내는 편의 인간이라고 들었었다.

예컨대, 검사라기보다는 마녀 쪽이라는 뜻이다.

허나 따로 들은 것이 있다 보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이리스가 도서관에서 뭐라고 했더라.

그러니까… 마력을 개화한 걸 핑계 삼아 잠시 숨을 돌리러 아카데미로 산책 나온 사람…. 이라고 설명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성녀는 마법에 별 관심이 없다고 봐야 옳았다.

마법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은, 굳이 연구동에 올 이유가 없었다.

"제 연구동에?"

"…안 되나요…?"

네. 라는 단호한 대답을 꼭꼭 씹어 삼킨 유즈.

대신 그녀는 순수한 궁금증 하나를 성녀에게 내밀었다.

"왜 오고 싶으신 건데요?"

사르륵, 흘러내린 군청색의 앞머리가 시야를 가렸다.

귀에 걸리지 않는 애매한 길이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자, 지금껏 시끄럽다고 생각한 성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유, 유즈 님이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

어딘가 잔뜩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

추측은 잠시였다.

이리스, 그녀가 친구가 되고 싶다며 다가왔던 날도 분명 이렇게 갑작스러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똑같다고 보기엔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눈 앞의 성녀는 어딘가 '당장 당신과 친해져야 해!' 같은 이해되지 않는 억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그 때의 이리스는 '너랑 친해지고 싶어.' 라는 잘 만들어진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으니까.

"…저랑?"

유즈가 확인차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고개를 끄덕이는 성녀.

쭉 뻗어있던 손가락이 점차 굽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먹이 된 손은 식탁 밑으로 내려가 유즈의 허벅지 위에 놓인다.

어째서 나따위 음침하고 재미없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한 방울.

어째서 저런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한 방울 유즈의 마음에 떨어진다.

"꼭 친해져야 하나요?"

"꼭 친해지고 싶어요!"

말하면서도 이상한 질문이라 생각했건만, 오히려 성녀는 붕붕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전했다.

"저랑 친해져서 얻는 게 있나요?"

"유즈라는 소중한 친구를… 얻죠."

성녀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던진 질문.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스스로가 그리 가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으니까.

유즈는 예의상 덧붙인 말이라 생각하며 성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친구….

성녀와 친구 사이가 된다라….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미소를 걸친 이리스의 모습이었다.

"……."

이리스는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밀어내도, 밀어내도, 언제나 한 발자국 곁에서 자신이 마음을 열 때까지 지켜봐 주던 이리스.

그녀는 황궁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이렇게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잘 지내고 있을까.

생각을 마친 유즈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성녀의 마음을 받아준다면 손쉽게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가슴 속 어딘가가 툭, 떨어져 나간듯한 먹먹함을 그녀로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리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성녀와 더욱 많은 추억을 만들어나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지만.

친구.

새장 안에 갇힌 어릴 적부터 마음속으로 간직해온 부끄러운 울림.

그것은 이리스와 만나고, 루크와 한 달간의 시간을 보내게 된 지금에 이르러선 조금 의미가 바뀌어 있었다.

친구.

친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내 곁에 꼭 붙어있어야 하는 사람.

60초.

60분.

24시간.

7일.

4주.

12달.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을 사람.

"미안해요."

남의 마음속 '친구'라는 단어에까지 이런 오물을 묻히기엔.

유즈는 아직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너무나도 서툴렀다.

****

꿉꿉한 물 내음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어디서 나왔을지 모를 유리조각부터 시작해, 허구한 날 마주하는 나뭇잎과 진흙까지.

오래간만에 비가 내린 뒤의 배수로는 예상대로 이런저런 오물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오…. 씨…."

나는 뺨에 튄 흙탕물을 닦아내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노동의 강도는 둘째치고, 이른 새벽부터 몇 시간 째 시야에 이런 것들만 가득 보이니 자연스레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젠 몸에 흐르는 물이 땀인지, 아니면 고여있던 빗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팍! 팍!

짜증을 담아 진흙더미에 삽을 꽂아넣자 고여있던 흙탕물이 튀어 작업복 여기저기에 들러붙었다.

허름한 옷과 달리 장화만은 제대로 된 걸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바닥에서 구정물이 찰랑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카데미를 구석구석 돌아다녀 봤지만, 아예 꽉 막혀버린 배수로는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가 체크해둔 마지막 배수로니까 이 짓거리도 조금만 더하면 끝이다.

물에 젖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나는 졸졸 흐르던 물줄기가 대강 거세진 것을 확인한 뒤 배수로에서 빠져나왔다.

하도 깊게 파여 있는 탓에 기어 올라오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으윽…."

그래도 마지막에 남쪽 구역으로 와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잡초가 수북이 자란 풀숲에 드러눕지도 못했을 테니까.

뒷머리에 차갑고 단단한 진흙이 닿았지만, 이미 온몸이 잔뜩 더러워져 있는 덕에 거부감은 없었다.

기분 좋은 봄바람.

기분 나쁜 흙냄새.

진흙투성이 삽과 함께 풀숲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조금 전 얼핏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성녀 쪽은 망한 것 같던데."

그러니까, 아침 8시 즈음이었나.

아카데미를 빙글빙글 돌며 마침 서쪽 구역의 배수로를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아카데미말고 세계수 밖으로 나가본 적 있냐는 둥, 혹시 요리나 다도엔 관심이 없냐는 둥.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에 몸을 숨기자, 잠시 뒤 내 근처로 성녀와 유즈가 지나갔다.

발걸음의 방향은 북쪽 구역.

정황상 아무래도 성녀 나름 어떻게든 유즈와 대화를 나누어보려 열심인 모양이던데….

아무렇게나 쏟아지는 성녀의 수많은 질문 속, 유즈의 목소리는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기사, 보통 사람도 아니고 방구석 엘프인 유즈와 하루 안에 친해져 달라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어려운 부탁이긴 했다.

성녀가 유즈와 친해지면 그녀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너무 얄팍한 수를 쓴 걸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의 부탁이었을 뿐이다.

성녀에게도 꼭 유즈와 친해져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건 좀 아니다 싶으면 그녀가 알아서 발을 뺄 것이다.

이젠 뭐, 어떻게든 내가 알아서 조금씩 진의를 밝혀가는 수밖에.

그래도 나름 착실하게 용의자가 줄어들어 가는 중이니까, 나중엔 진짜 야설을 쓴 사람을 찾아서 내 마음대로….

"왁!!"

새하얀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가고 있던 와중.

놀래키려고 한 듯 시끄러운 목소리가 정수리 부근에서 들려왔다.

무언가 재밌는 반응이라도 해줬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미묘한 텀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이 생각을 하면서 더욱 더 텀이 길어지고 있고.

"루크!"

"……."

최소 이틀에 한 번씩은 이런 짓을 당하다 보니 너무 익숙해진 게 문제였다.

누워있는 상태 그대로 시선을 살짝 올리자, 거꾸로 된 카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착각일진 몰라도, 어째 평소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카엔 님."

"여기서 뭐 해?"

"여긴 제대로 된 길도 없는데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응? 그야 네 냄새를 따라왔으니까."

카엔은 제 후각을 자랑스러워하듯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럼 매일 청소하는 곳을 찾아와 장난을 쳤던 것도 전부 내 냄새를 맡아서 뒤를 밟았다는 뜻이지 않은가?

누군가의 뒤를 따라간다는 게 스토킹이란 범죄 행위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다.

…그런데, 음.

킁킁대며 내 위치를 추적하는 카엔을 상상하니 어째 좀 귀엽다.

예전이었다면 청소하는데 방해되니 코를 콱 틀어막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루크. 여기서 뭐해?"

"보면 아시잖습니까."

"삽이랑 낮잠 자고 있는 거야? 그러다 감기 걸려."

"…배수로를 팠습니다. 아니, 이러면 헷갈리니까, 배수로를 점검했다고 하는게 맞겠네요."

"흐응…."

귀족 영애를 세워두고 나누는 대화 주제가 고작 배수로 점검이라니.

딱히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다.

카엔의 저런 미적지근한 반응도 새삼 이해가 되었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누워서 대화를 나누는 건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지 않나?

아무리 옆에 있는 사람이 카엔이라지만, 그래도 나름 격식이라는 게 있는데.

하도 삽질을 한 탓에 허리 아파 죽겠지만, 일단은 일어서기 위해 팔꿈치로 땅을 짚었다.

그와 동시에 어제 시야에 한 아름 담았던 새카만 꼬리가 오른쪽으로 훅 스쳐 지나갔다.

카엔 특유의 체향.

철퍽, 진흙 위로 무언가가 드러눕는 소리.

직후 꺄아, 하는 새된 비명이 숲을 흔들었다.

"뭐, 뭐야? 여기 전부 진흙이었어?!"

"…예. 당연하죠. 어제 비가 왔으니까."

"난 루크 네가 멀쩡히 누워있길래…. 이게 뭐야아…."

"저도 멀쩡히 누워 있는 건 아니었을 텐데요…."

울상을 지은 채 꼬리를 열심히 흔드는 카엔.

저렇게 파닥파닥 움직일 수도 있는 거구나.

예쁜 묵색의 꼬리털 끝에 진흙이 대롱대롱 매달린 걸 본 나는,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카엔의 꼬리를 털어주었다.

…서로 진흙 위에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다.

"메이드한테 또 혼나시겠어요."

"흙 정도는 괜찮아. 자주 묻혀오니까."

"…자주? 도대체 어쩌다가요?"

"그, 그런 게 있어."

검술을 연마하다 보면 옷에 흙이 튀는 것 정돈 부지기수란 이야기일까.

어느 정도 공감되는 이야기다.

나는 더이상 묻지 않고 계속 카엔의 꼬리를 털어주었다.

얼추 꼬리는 괜찮아진 것 같고.

다음은 옷인데….

"역시 혼나실 것 같은데요."

"뭐 얼마나 묻었길래 그래?"

"따로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보단, 그냥 진흙투성이라 표현하는 게 더 편할 정도?"

"으아아…."

카엔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등 뒤에 들러붙은 진흙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얼룩은 이미 짙게 남아버렸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오늘은 평소 입던 제복이 아니라 내 방을 찾아왔을 때처럼 가벼운 후드티 차림이니 한결 낫지 싶다.

카엔의 몸에 걸쳐져 있는 만큼 저것도 그리 싼 옷은 아닐 테지만, 이런저런 장식이 박혀있던 제복보단 사정이 나을 테니까.

"너 따라 눕는 게 아니었는데…."

"……."

죄송하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내 책임은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씻으러 갈래…."

시간은 오전 11시.

대련 시간까진 대충 3시간 즈음 남았으니 잠깐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온다고 해서 늦진 않을 것이다.

사실 늦어서 아예 대련이 취소되면 최고로 좋겠다만, 백야와의 즐거운 1대1 강의 시간이 찾아올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저번에 도서관에서 있었던 낯 부끄러운 일도 있고.

어떻게든 그건 피하고 싶었다.

"그러는게 좋겠네요.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도 방에 돌아가서 씻어야겠다.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카엔. 그녀보다 훨씬 더 더러워진 몸을 일으킨 나는 주섬주섬 삽을 챙겼다.

아. 맞아. 이번엔 잊기 전에 미리 삽에 묻은 진흙을 털어 놓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리저리 허리를 꺾으며 등근육도 풀어줄 무렵, 무언가 콕 꼬집는 감각이 옆구리에서 느껴졌다.

"……?"

익숙한 손이었다.

애시당초 여기엔 나와 카엔밖에 없었으니까.

"…씻을 거야? 루크도?"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물어보는 카엔.

어째 알 것 같은 분위기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 나는, 잠시 후 이런저런 생각이 축약된 말 하나를 겨우 꺼냈다.

"갈아입을 옷이 전부 기숙사에 있어서요."

"…키아라보고 다녀오라고 하면 돼. 거기 제대로 된 잠금장치도 없잖아."

카엔의 손끝에선 조금도 힘이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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