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저택의 문턱은 생각보다 낮았다.
카엔에게 사과하러 왔을 때 한 번.
카엔을 무사히 돌려보내 주려 했을 때 한 번.
그 때마다 감히 나 따위 평민이 넘어도 되나 그런 생각을 했던 문턱이었건만.
앞장선 카엔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문턱을 넘고 있다 보니, 새삼 이런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이 조금 와닿았다.
발목이 잘리는 것도 아니고, 평민은 꺼지란 말을 듣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문턱일 뿐이다.
한 발자국.
나는 카엔의 추억 속으로 발을 들였다.
"키아라!"
"…안녕하세요."
타닥, 탁, 카엔의 허리에 매달린 검집이 바닥을 긁는 소리.
산책 끝난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흙을 묻힌 채 포르르 뛰어들어간 카엔은 다급하게 메이드를 불렀다.
메이드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옆에서 문을 열어주고 있는데 쓸데없이 목청이 크다.
대신 소리를 한껏 낮춘 내가 멋쩍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자 메이드는 꾸벅, 고개를 숙여 받아주었다.
"……."
대문을 꼭 붙잡고 있는 그녀는 저번처럼 표정으로 제 심경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 이놈들 딱 보니까 그 짓거리 하려고 왔구나.
라는 표정.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옷. 옷 좀 가져와 줘."
"…열쇠 주시죠."
메이드는 왜 옷을 가져와야 하는지, 어떤 옷이 필요한지, 누구의 옷인지 따위 묻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내 앞으로 두 손을 내밀 뿐.
여기저기 갈라지고 부르튼, 메이드답게 투박한 손이었다.
"그게, 방이 워낙 허름해서 그냥 문고리를 잡아당기시면 바로 열릴 겁니다. 기숙사 101호."
"알겠습니다. 양말이랑 속옷까지 전부 준비하면 될까요?"
"네? 아, 어… 네. 그럼 잘 부탁드립──"
다시 한 번 고개 숙인 메이드가 밖으로 걸어나가기도 전.
앞장서 있던 카엔의 손이 내 팔을 휙, 끌어당겼다.
"자, 잠깐만, 카엔, 님?"
휘청거리며 내려앉은 시선 앞으로 예리하게 깎인 계단이 위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급히 다른 손으로 땅을 짚지 못했더라면, 분명 크게 다쳤으리라.
왈칵 배어 나오는 식은땀과 함께 허우적허우적 계단 몇 개를 오르자 곧장 현관이었다.
카엔의 손에 이끌려 쏙 현관까지 들어온 나는 발이 꼬인 탓에 꼴사납게 제자리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카엔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넘어지든 말든, 우당탕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 던진 카엔은 그대로 저택 깊숙한 곳까지 날 끌고 갔다.
허접한 도둑이라도 든 것마냥, 반짝반짝 빛이 나던 바닥에 더러운 발자국이 아무렇게나 찍힌다.
─쿠당탕!
직진. 오른쪽. 왼쪽.
잠시 후, 뒤에서 우리 대신 현관문을 닫아주는 소리가 들리고.
직진. 직진. 오른쪽.
미끄러워서 정신을 못 차리겠지만, 일단은 익숙한 경로다.
아마 예상대로라면 이대로 계단을 오른 뒤, 바로 왼쪽.
하지만 카엔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세네 걸음을 더 나아갔다.
『들어오지 마!』
끌려가던 와중, 문에 달린 명패에 시선이 머물렀다.
분명 저번에 카엔의 몸을 즐겼을 땐, 저 명패가 달린 문으로 들어갔었는데.
이번에 카엔이 멈춘 곳은 아무런 명패도 붙어있지 않은 짙은 나무색의 문 앞이었다.
"……."
중요한 것은 여기가 카엔의 침실 바로 옆이라는 것이다.
카엔이 멈춘 위치.
진흙으로 잔뜩 더러워진 몸.
이제서야 흥분이 좀 가라앉은 듯 내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기 시작한 연보랏빛 눈동자.
결과는 금방 튀어나왔다.
****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굉장히 싱숭생숭한 상태였다.
카엔이 눈앞에서 건방지게 굴 때마다 마구 따먹어보고 싶다고 상상한 적 있는가?
예.
실제로 결국 카엔을 실신할 때까지 강간하고 말았는가?
예.
우연찮게 카엔이 강간당하며 흥분하는 성벽을 가지고 있었는가?
놀랍게도, 예.
그렇기에 나는 카엔의 몸으로 성욕을 해결하고,
카엔은 나를 통해 성욕을 해결하는.
마치 개미와 진딧물같은 공생 관계가 된 것까진 어떻게든 이해했다.
하지만.
설마 다음날부터 이렇게 저택까지 끌려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나 스스로 카엔의 손목을 붙잡고 으슥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어째 카엔이 날 따먹으려는 듯이 억지로 끌고 올 줄은….
"으음…."
정말 몰랐는데.
뭔가뭔가다.
싱숭생숭으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뭔가뭔가.
'게다가 상황이 좀 꼬였다 보니까….'
도대체 누가 야설을 썼는지 찾아보려는 나.
유즈의 약, 그리고 내 멍청한 실수 때문에 제 취향을 깨달아버린 카엔.
여기서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유즈의 약이 문제다.
최근 그것 때문에 이성을 잃고 저질러버린 일이 많다 보니 카엔과 이런 관계가 될 수 되었지만,
어쨌든 결국 유즈의 약을 끊게 되면 저번 침실에서처럼 폭주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가학적인 취향이 있는 건 사실인데 아예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카엔을 도구처럼 다룰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머릿 속에 콕 틀어박힌 '신분 제도'를 지우개로 말끔히 지우지 않는 이상 또 그런 짓을 하긴 힘들지 않을까 싶다.
맨정신으로 카엔의 자궁을 부숴버릴 듯 짓누르고, 새하얀 엉덩이에 손자국을 가득 남기고, 꼬리를 있는 힘껏 잡아당긴다라….
'…힘들겠지. 이젠 모르겠다.'
유즈에게 갑자기 약 좀 달라고 하면 날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과연 유즈의 정체를 밝힌 뒤에도 나와 카엔의 관계는 지금과 똑같을까?
지금은 그냥 나중 신경 쓰지 말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되는 걸까?
"…루크. 난 다 했어."
의문 투성이 잡념 속에 푹 빠져 헤엄치던 와중, 문 너머에서 들리는 카엔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저, 저도 거의 다 끝났습니다."
"…남자는 보통 빨리 벗지 않나…?"
"아, 그게 잠깐 딴생각을 하다 보니…."
"으응…."
그래. 여기까지 와서 굳이 나중의 이야기를 신경 쓰고 있을 필요는 없지.
먼저 유즈의 정체를 확실히 한 뒤에 고민해도 될 문제다.
발정제도 뭐, 어차피 최근 유즈를 몰아세우던 와중에 약 한 알을 시약과 함께 꿀꺽 삼켰었으니까.
안 먹으면 어쩌지, 먹으면 어쩌지, 고민해봐야 지금 당장은 의미 없는 논쟁일 뿐이다.
나는 카엔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꺼풀씩 조용히 옷을 벗어나갔다.
땀과 진흙에 절여진 허름한 셔츠부터, 저택 여기저기에 발자국을 남긴 더러운 양말까지.
다 벗고서야 뒤늦게 든 생각인데, 욕실 밖 복도다 보니 마땅히 옷을 둘만 한 곳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대충 구석진 곳에다가 옷을 쓰레기처럼 처박아둔 나는 아랫도리만 간신히 가린 채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목소리를 가다듬은 듯, 잠깐의 시차를 두고 카엔의 흐릿한 목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어쩐지 나도 자연스레 침을 삼키게 된다.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자, 문 틈새로 조금씩 카엔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색.
살색.
살색.
검은색.
살색.
그리고, 하얀색.
"……."
"……."
이윽고 나는, 어디서 본 건 있는지 타올로 몸을 칭칭 감은 카엔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엉성하게 몸을 가린 탓에 타올 끝도 맞지 않고 어딘가 조잡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조차 카엔다워서 퍽 잘 어울렸다.
분명 평소엔 저런 쓸데없는 짓 안 한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메이드가 도와준다든가.
가만 보니 꼬리가 있는 부분부터 타올이 들어 올려진 탓에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 있을 것 같았다.
"너, 너도 필요해?"
툭 건너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눈 앞에 새하얀 타올 한 장이 내뻗어져 있었다.
보들보들한 모양새를 보니 일단 내가 알고 있는 타올 값 따윈 훌쩍 뛰어넘을 게 분명했다.
"…네."
카엔에게 타올을 건네받은 나는 일단 아무렇게나 허리에 둘러보았다.
손으로 가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곳을 찾아온 목적이 있다보니 곧 드러내긴 할테지만, 노출증이 있는 것도 아니며 24시간 발정 난 상태도 아니니 말이다.
결국 나도 이런 걸 해본 적은 없었기에 눈앞의 카엔처럼 엉성한 모양새로 마무리 지었다.
부끄러운 분위기 속 오물오물 움직이던 카엔의 입술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거라도 했으면 됐다.
"일단은 씻으실 거죠?"
"으, 으응. 당연하지. 씻으러 온 거니까."
카엔의 본심은 그게 아닐 테지만,
나는 일단 입 다물고 카엔의 뒤를 따라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음……?"
눈 앞에 펼쳐진 의외의 광경에 나도 모르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왜 그래?"
귀족이 몸을 씻는 공간이니 당연히 어느 정도 화려할 것이다.
뭐, 그래 봤자 그렇게 화려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사용인이 몇십 명씩이나 되는 대저택도 아니니까 그림 몇 점 걸려있으면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라고 대강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거라도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막상 마주한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소박했기 때문이다.
카엔 정도 사이즈라면 3명쯤 들어갈 수 있을만한 욕조.
평민 기숙사 욕실 바닥에 깔린 타일이나 별다를 거 없어 보이는 새하얀 타일.
구석에 쏙 들어가 정리되어 있는 하늘색의 귀여운 목욕 의자까지.
욕실치곤 꽤 넓다는 점 빼면 이렇다 할 화려함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검소하시네요."
"아. 뭐…. 굳이 욕실에 돈을 낭비할 필욘 없으니까."
불편한지 가슴을 꾹 짓누른 타올을 손끝으로 낑낑 올리며 답하는 카엔.
마땅히 더 나눌 대화가 없었던 우리는 머뭇머뭇 커다란 대야로 다가가 서로의 몸에 물을 끼얹어 주었다.
"……."
"……."
─쏴아아
한동안 욕실 안은 물 내려가는 소리만이 적적하게 울려 퍼졌다.
내가 타올이 물에 쓸려 내려갈까 봐 허리춤에 두른 타올을 만지작거리면, 이어서 카엔도 몸에 두른 타올을 손끝으로 꼬집꼬집 끌어올렸다.
저번처럼 질펀하게 박아대려고 왔다기보단, 어째 정말로 몸을 씻기 위해 찾아온듯한 모양새.
눈에 띄게 볼을 부풀린 카엔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으나, 나 또한 뭐라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은 저번처럼 흥분한 상태가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사이에 있었던 사건사고는, 전부 카엔이 주도한 탓에 생긴 일이었다.
기숙사에서 카엔의 머리를 잡아당겼던 것도 카엔이 먼저 내 자지를 핥아주겠다고 찾아온 탓이고.
침실에서 불알이 텅 빌 때까지 잔뜩 섹스했던 것도 그녀가 먼저 나를 저택 안으로 들였기 때문이며,
이슬비 내리는 도장 안에서 바닥이 애액으로 푹 젖을 때까지 카엔을 괴롭혀댄 것도, 카엔이 먼저 몇 번이고 키스하려고 달려들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단둘이 욕실에 들어가 있을 뿐.
솔직히 이미 키스든, 섹스든, 할 거 다 한 사이에 이 정도로 흥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
한 번, 두 번, 머리 위에 물을 부어줄 때마다 점점 불만 가득해지는 카엔의 뺨.
결국 빈 대야를 든 카엔이 내 머리를 장난스럽게 툭, 툭, 두드리며 말문을 텄다.
"욕조.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시죠."
"같이."
"……."
"무조건."
"……."
"네가 밑. 내가 위."
살짝 토라진 듯한 목소리가 욕실 벽에 튕겨 웅웅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