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카엔에게 얻어맞은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때리는 시늉만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때린 것만 같은 고통.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속담 하나만 믿고 저지른 일인데, 과연 이게 정말로 나은 처치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긴, 방금까지 욕조 속에서 숨결을 나누던 남자가 거의 '나 다른 여자랑도 섹스하고 싶어' 에 가까운 말을 뱉는데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
말로는 순수한 척 당사자에게 사과만 받을 거라 하긴 했지만, 만약 정말 작가를 알아낸다면 분명 고작 그런 사과 따위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말이 아니라, 몸.
몸으로 사과를 받겠지.
예를 들자면 이렇게 되고 싶어서 음침하게 이런 글을 끄적였냐고, 소설 속에 써넣은 시츄에이션을 하나하나 모두 현실에서 해볼 게 뻔했다.
당연히 카엔도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가장 먼저 그런 이유로 강간당했던 여인이 카엔이니까.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노릇.
그러나 카엔은 내 거짓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
"……."
나는 그런 카엔의 보폭을 맞춰주며 조심스레 걸었다.
어디 하나 부러지는 것 정돈 익숙하니까 기꺼이 샌드백이 되어줄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고통에서 해방되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정말 사과만 받을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남한테 일부러 뺏기는 취향… 은 없을 텐데.
평범한 여인에게 그런 취향이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정말 그런 취향이 있었더라면 저것보다 조금 더 의심스러운 반응이 나왔을 테고.
반대로 내게 아예 마음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때리질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언제나 쉬지 않고 재잘거리던 입술이 조용하다.
대신 이따금식 내 옆구리에 매콤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숲속을 걸으며 카엔의 속내가 뭘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동쪽 구역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파란 하늘이 시원하게 찢어진 동쪽 구역의 지평선.
그 너머에서 부드러운 서풍이 불어왔다.
"오늘도 같이… 아. 음음."
바람은 늘 그렇듯 무감정한 백야의 목소리를 싣고 내 뺨에 닿았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려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평소엔 어떻게 했더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백야 님."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다.
너무 어색하다.
애초에 백야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저번에 도서관에서 그렇고 그런 일까지 있었던지라, 자연스레 대하기 너무나도 불편했다.
평소의 내가 백야를 어떻게 대했는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손을 흔들었나?
아니면 인사말을 내뱉었나?
…그래.
생각났다.
대련 시간마다 카엔이 조잘조잘 떠드는 탓에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구나.
단 한 번도.
"받아요."
무안함에 뺨을 긁는 내 앞으로 목검이 스윽, 하고 내밀어 졌다.
백야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어지러운 나와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며칠 새 생긴 잘못된 감상일 수도 있는데, 어째 사람이 참 순수한 것 같다.
애무가 뭐냐고 묻기에 사랑이 담긴 손짓이라고,
그렇게 어깨 마사지를 애무라 가르쳐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던가.
물론 백야가 소설 속에 쓰여있던 '성교육' 이란 상황을 꽤나 그럴싸하게 재현한 건 사실이다만….
순수한 척 연기하는 중이라기보단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게 맞지 싶다.
치렁치렁하게 기르기만 한 채 정돈되지 않은 새하얀 머릿결도.
하녀가 제발 이거라도 써서 좀 가리라고 건네준 듯한 조그마한 꽃무늬의 머리 장식도.
천을 이리저리 대충 두르기만 한듯한 동방의 전통 의상 같은 복장도.
벨트 하나에 의지한 채 맞부딪혀 절그럭거리는 두 자루의 기다란 검집도.
이제 와서 보니 어쩐지 백야가 그냥 '검' 말고 다른 것엔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오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에서 어색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빨리 카엔이 평소처럼 시끌벅적하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내 옆에 선 카엔은 그저 팔짱을 낀 채 뺨을 부풀렸다 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만보니 백야를 물끄러미 노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혹시 백야를 작가라 의심하고 있는 걸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카엔이 손에 쥔 목검으로 땅을 톡, 톡, 두드렸기 때문이다.
…다른건 몰라도 잠깐이나마 의심했던 것은 사실인가 보다.
"어떻게…? 당연히 평소처럼 할거에요."
옆에 선 카엔을 흘겨보던 와중, 백야가 몸에 밴듯한 느낌으로 우아하게 답했다.
내 말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풋 갸웃이는 걸 보아하니, 3일 전에 있었던 화풀이는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다.
백야의 허리춤에 걸린 두 자루 진검 대신 투박하고 뭉툭한 목검이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다.
"루크. 먼저 오늘은 오른쪽을 주로 노릴 테니까 참고해요."
"예."
"모든 게 엉성하지만 찌르는 걸 방어하는 게 가장 미숙하니, 그쪽을 중심으로 해볼거고… 그리고…."
"…자, 잠깐만."
막고 피하려다가 실수하면 또 목 부여잡고 쓰러지겠구나.
차라리 빨리 끝나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속으로 한숨을 씹어 삼키고 있자 툭, 비집고 들어오는 목소리.
"우리, 오늘부터 대련 방식을 조금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
목검을 든 카엔은 나와 백야 사이에 살그머니 끼어들었다.
****
"그런 방식은 성장에 전혀 도움 안 될 텐데요."
"지금까지 한 방식도 딱히 도움되지는 않았잖아. 바꿔봐야지."
이것으로 5번째.
카엔은 바닥을 구르는 목검을 주워 다시 내 손에 쥐여주었다.
손바닥이 얼얼하다.
후, 손바닥에다가 숨을 불어넣은 나는 목검을 꽉 쥐고 카엔을 겨눴다.
"실전 경험이 가장 중요해요. 카엔. 그것이 쌓이고 쌓여야 결국 빛을 발하는 거고요. 지금 하는 건 실전이라기보단…."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실전에 던져봤자 개죽음당할 뿐이야."
이것으로 10번째.
카엔은 뒷짐을 진 채 한 손만을 써서 내 목에다가 검 끝을 겨누고 있다가, 내 검이 흔들림과 동시에 검 끝을 움직였다.
까마득한 하수인 내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간결한 동작이었다.
동시에 머리를 스치는 것은, 과연 내 턱밑에 진검이 들어온다면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라는 고민.
커다란 힘을 사용하면 역으로 목이 꿰뚫린다.
작은 힘을 사용하면 상대방이 먼저 움직인다.
뒤로?
아니면 옆으로?
카엔처럼 검으로 검을 쳐내는 것은 이 정도 수준 차이에선 불가능할까?
땅바닥에 10번 구른 목검이 또 한 번 먼지를 뒤집어썼다.
나는 검을 주워주기 위해 걸어가는 카엔을 만류하고, 직접 목검을 든 뒤 카엔을 마주했다.
"카엔. 저랑 당신이야 물론 일찍이 마력을 개화하기도 했고, 가문의 지원도 있었겠지만 루크는 다르잖아요."
"다르니까. 다르게 가르쳐야지."
이것으로 20번째.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검을 든 카엔은 이번에도 내 턱 밑에다가 검을 겨눴다.
짙은 나무색의 검 끝은 카엔이 호흡하는 와중에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내 미력한 수준으론 도저히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정공법으로는 막힌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뚫어내기 위해서는 변칙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잡기술' 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신묘한 보법?
안타깝지만 나는 교수가 일하고 있는 도중 최대한 소리내지 않고 살금살금 청소하는 보법 정도만 익히고 있다.
제대로 된 유파의 검술?
…내가 그런 걸 익힐 시간이 어딨어.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정공법뿐.
나는 하도 검을 놓친 탓에 찌잉, 울리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이번에는 카엔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보았다.
그것이 최악의 선택이라는 걸 깨닫는 데엔 한 발자국조차 걸리지 않았다.
"콜록! 케흑, 콜록…!"
"…루크. 상대방과 실력 차가 많이 날 때 이런 상태가 된다면, 절대 가까이 다가와선 안 돼."
"콜록! 콜록!"
"이제 하나 배웠지?"
"네…. 콜록…!"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계속해보자."
목이 따갑다.
따가운 걸 넘어서, 재채기에 피가 섞여 튀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바닥에 뱉어진 침 자국은 잿빛.
숨 막히는 고통은 엄살에 불과했다.
더 할 수 있다.
팔뚝으로 대충 입을 닦아낸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카엔은 다시 내 목을 향해 검 끝을 들이밀었다.
고통스럽지만.
까마득한 수준 차이에 좌절감이 느껴지지만.
비로소 제대로 된 '대련 시간' 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검을 배우고 있다.
무엇이 옳은 검인지.
무엇이 잘못된 검인지.
몸으로 배워가고 있다.
─탁!
21번째의 도전이 무위로 돌아갔다.
21번 구른 검을 주워 카엔을 겨눴다.
22번째의 도전에선 무언가를 깨닫길 바라며, 발을 움직였다.
점차 단내가 풍기던 입속에 혈향이 뒤섞인다.
고개를 돌려 뱉어낸 침에 붉은 색채가 고였다.
이 정도는 익숙하다.
정자세를 잡자마자 검 끝이 떨렸다.
집중력을 너무 소모했는지 점차 눈이 감긴다.
그럼에도 다시 검을 주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검을 떨어뜨렸다.
대련 시간을 빙자한 구타 시간이 아닌, 진짜 대련 시간.
목의 고통따윈 아무렇지 않았다.
드디어 아카데미 청소부 취급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학생이 된 것 같아 눈물이 날 정도로 즐겁다.
퉷, 한 번 더 피가 섞인 침을 뱉은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씨익, 웃으면서.
올곧게 뻗은 카엔의 검 끝을 바라보면서.
지금 이 시간동안 어떻게든 더 실력을 갈고닦기 위해, 카엔과 목검을 맞댔다.
"……."
내가 카엔과 단 둘이서 검을 나누는 동안, 백야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조용히.
노을에 젖은 하얀 머리카락이 서서히 그림자에 휩싸일때까지.
처음 느껴보는 제대로 된 대련 시간이 끝나갈 무렵.
백야는 어느새 어디론가로 사라져있었다.
****
"요즘 들어 신기한 걸 자주 보는 것 같아요."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신성력 특유의 환한 빛이 사그라진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목부터 가슴께까지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카엔에게 덤벼들며 부러질듯 욱신거리던 목도 이젠 멀쩡했다.
"저번엔 거의 시체가 되어서 실려오더니, 이번에는 제 발로 걸어서 찾아오시고."
"카엔 님이 적당히 봐주신 덕분에요. 저번엔 백야 님이 곤죽을 내버린 바람에…. 그리고 유즈 님땐… 음…."
"백야 님때 이유가 뭐였죠? 야설 때문에?"
"…정확히는 새벽 내내 청소하다가 잠을 못 자서, 였죠."
따지고보면 그게 그거다만, 어쨌든 똑바로 말을 고쳐준 나는 성녀가 마련해 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진짜 너무 맛없다.
그냥 냉수나 달라기엔 매번 공들여서 끓여오는데 뭐라 할 수도 없고.
예의상 마시는 것도 힘겨울 수준이다.
입 안에 모은 군침으로 대충 입을 헹군 나는, 물끄러미 찻잔을 바라보는 성녀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튼, 유즈 님이랑 친해지는 건 실패하신 거죠?"
"아, 아. 네. 예상은 했는데 엄청나게 낯을 가리시더라고요…. 저도 보기보다 낯을 가리는 편이기도 하고요."
"괜찮아요. 그럴 것 같았으니… 잠깐만요. 성녀 님이요? 낯을?"
"그럼요. 친한 사람이 아니면 말도 잘 못하는걸요."
그럼 저랑은 얼마나 친하길래 자지 같은 말도 서슴없이 입에 담으십니까?
…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다가 목젖에 가로막혔다.
처음 만났을 당시엔 확실히 조용한 편이긴 했으니까.
간신히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치료를 하고 내보내는 동안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맛없는 차도 내오지 않았고.
표정도 조금은 딱딱했던 것 같다.
이렇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 피로에 가득 파묻힌 지루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
만들어낸 미소가 아닌.
만들어진 미소를.
"모처럼 도와주신다니 성녀님을 통해서 한 번 유즈 님의 뒤를 캐보려 했는데… 아쉽네요."
"미안하게 됐네요. 기껏 비밀 친구가 되었는데도 별 도움을 못드려서."
그리 말하며 후릅, 의자 옆 테이블에 놓인 코코아를 마시는 성녀.
나도 저거나 줄 것이지, 왠 이상한 차에 꽂혀선….
"저도 코코아 마실 줄 아는데."
"…그게 몸에 좋은 차라서 그래요."
뭐, 잘은 모르겠지만 상처의 회복을 돕는다든가 그런 종류의 차일 것이다.
아니면 성녀도 자주 같은 차를 마시는 걸로 미루어보아, 그냥 말 그대로 '건강에 좋은 차' 일지도 모르고.
나는 억지로 남아있던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의식해서 먹어봤건만 딱히 뭐가 좋아지는진 잘 모르겠다.
어느새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검은 빛으로 덕지덕지 칠해져 있었다.
슬슬 돌아가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으려니 들려오는 의미심장한 소리.
"루크."
"네."
"이렇게 된 김에 하나 말하고 싶은게 있는데요."
성녀는 한 번 목을 가다듬은 뒤 이어서 말했다.
"유즈 님일리가 없어요."
"왜죠?"
"그야, 백야 님이 범인일테니까요."
"…아닐 텐데요."
"흐으음…. 엄청 수상한데."
"……."
"수상해…. 수상해요…."
끼익, 끼익, 일부러 의자를 앞뒤로 요란하게 흔들며 침음을 뱉는 성녀.
아무래도 이유를 물어봐 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귀찮지만 입을 열었다.
"괴롭힘. 그리고 필체. 이 두 개가 증거였잖아요."
"물론 그땐 그랬었죠. 하지만!"
"……?"
"오늘 제가 본 게 하나 있거든요."
"본 거라뇨?"
성녀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대체 뭘 봤길래 저렇게까지 자신 있어 하는걸까.
이불에서 벗어난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야 님, 분명 제가 알기로 평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쪽 구역이랑 동쪽 구역만 왔다갔다하시거든요?"
"네."
수련, 그리고 저택만 왔다갔다 한다는 뜻이다.
대충 짐작하고 있던 이야기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땐 항상 '남쪽 구역' 을 지나서 움직이시고요."
"음, 네."
교회가 남쪽 구역에 있다 보니, 우연히 백야를 보는 일이 잦았나 보다.
그러려니 하고 대답한 나는 성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 저는 유즈 님때문에 온종일 북쪽 구역에 있다가 여기로 왔죠?"
"그랬죠."
의자 팔걸이 위에 올려진 팔에다가 턱을 괴고 씨익 웃는 성녀.
"제가 교회로 돌아오며 봤는데…."
일부러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듯 말 끝이 조용해졌다.
자연스레 귀를 기울였다.
"백야 님, 중앙 구역으로 내려가고 계시던데요?"
"……?"
백야가 중앙 구역엔 왜.
"…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를 눈치챈 나는 조심스런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었구나.
백야가 다음 '성교육'을 해주기로 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