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44화 (44/66)

44

들릴 듯 말 듯한 탄식 이후.

성녀는 드디어 자신이 이겼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난스레 끌어올려 진 입꼬리가 무척이나 얄밉다.

딱히 나쁜 뜻은 없는 것 같은데.

평소 성녀에게 시달릴 때마다 보아왔던 미소와 똑같이 생겨서 그런 걸까?

"……."

백야가 범인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던 나는 결국 소리 없는 숨결을 내쉬었다.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선, 백야와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부터 꺼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곤혹스럽다.

애무조차 모르는 사람이 그런 책을 썼을 리 없다, 라고 말한다면.

루크는 어쩌다 그런 걸 알게 되셨나요? 라는 말이 되돌아올 것이다.

백야 님이 성교육을 해주신다길래 따라갔다가 알게 되었다, 라고 곧이곧대로 답변한다면.

거봐요. 단둘이 성교육이라니, 역시 백야 님이 수상하다니까요! 따위의 답변이 되돌아올 게 뻔했다.

단 둘.

성교육.

확실히 단어만 바라본다면 이보다 의심스러운 여인이 없긴 했다.

그 어색하고 순수한 공기를 마주하지 못했더라면, 분명 나도 백야를 용의자선에 집어넣었을 테니까.

하지만 저번에 본 백야의 모습으로 예상하건대, 그녀는 분명 아무것도 모른다.

가르쳐주겠다던 성 지식 또한 기껏해야 조숙한 어린아이 수준.

결국 성녀의 오해를 차근차근 풀어주어야 하는데.

자연스레 생각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부터 차근차근 꺼내놓기.

그리고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성녀를 진정시키기.

백야가 오직 검밖에 모르는 순수한 여인임을 증명하기.

솔직히 말해 귀찮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성녀를 설득시켜서 얻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역시나 귀찮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검지 손가락 끝으로 톡, 톡, 침대 시트를 두드리던 나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9시 30분.

몇 시부터 돌아다니지 말라는 규칙은 없다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아카데미를 돌아다니기엔 늦은 시각이다.

내가 교회에 도착해 성녀와 이야기를 나눈 건 대략 2시간 전.

성녀가 백야를 본 것은 분명 교회에 도착하기 전일 테니까, 백야가 중앙 구역으로 내려간 건 최소 2시간 전.

시계를 바라보던 눈이 바로 옆의 창문을 훑었다.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

그 별빛은 오직 하늘에서만 고요히 흘렀다.

"……."

창문 끝에 걸친 나뭇잎들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성녀님."

"네?"

무심코 성녀를 불렀다.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을 콕콕 찌른 탓이다.

죄책감, 혹은 미안함과 많이 닮은 듯한데, 그렇다기엔 그동안 백야에게 당한 게 있으니까 아마 아닐 것이다.

분명 꼴좋다, 잘됐다, 속 시원하다 같은 생각이 들어야 할 텐데.

가능한 한 빨리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백야를 향한 공포일까?

…모르겠다.

"성녀님이 왜 그런 추측을 하셨는진 알겠는데, 착각하고 계신 게 있습니다."

"착각이요?"

입꼬리는 그대로.

대신 배시시 휘어져 있던 눈꼬리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백야 님은 평소에도 가끔 중앙 구역을 들리십니다. 남쪽 구역만 쓰는 게 아니라."

"네?"

그런 적 없다.

방금 지어낸 거짓말일 뿐이다.

지금껏 백야는 단 한 번도 중앙 구역을 들린 적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한 번 있었지.

며칠 전 홧김에 내 어깨를 부숴버렸을 때.

편지에 사과를 담기 위해서.

"평소 교회에 계시니 헷갈릴 수도 있죠. 중앙 구역을 쓰면 길이 짧아지니 가끔 이용하시는 것 같아요."

거짓말은 쌓이고 쌓이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눈덩이라고들 하지만,

뭐, 그렇게 심각한 거짓말도 아니니까.

괜찮을 것이다.

귀족들을 상대하며 얻게 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성녀의 앞을 지나쳤다.

아, 그, 그랬었구나, 따위의 혼잣말이 가까이서 들려왔다.

저번부터 백야가 범인이라 몰아가기에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나 했더니 꼭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냥 성녀 입장에선 백야가 가장 의심스러웠나 보지.

정보가 부족한 건 나나 성녀나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성욕이란 원동력으로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나보다 교회에 틀어박힌 성녀의 정보가 더 적을 수밖에 없다.

이 정도 잘못된 추측쯤이야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야설 작가'면서 아닌 척 나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일부러 잘못된 선택을 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받던 와중 진위를 깨달은 내게 밤새 강간당하길 바라는 게 아닌 이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치료 감사합니다. 날도 늦었으니 슬슬 내려가 보겠습니다."

평소와 같은 작별 인사를 남긴 나는 서둘러 교회 밖으로 빠져나왔다.

평소와 같은 밤하늘.

평소와 같은 밤바람.

평소와 다른 발걸음.

어두운 땅 위로 선명한 은하수가 흘러가고 있었다.

****

쌀쌀한 밤.

밤의 중앙구역은 특히나 더 어둡다.

중앙 구역, 그리고 동쪽 구역을 제외한 다른 구역들은 마력등을 켜서 어슴프레하게 길을 밝히고 있으나, 여기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달빛과 북쪽 구역에서 흘러들어온 잔빛 뿐이기 때문이다.

옷깃을 여민 나는 자세를 최대한 낮춘 채 계단을 밟아 밑으로 내려갔다.

밤 그림자에 숨어있던 새 몇 마리가 내 발걸음 소리에 놀라 어디론가로 잽싸게 도망쳤다.

응달인 탓에 아직 마르지 않은 작은 물웅덩이가 달빛을 받아 조용하게 반짝였다.

물웅덩이를 피해 빠르게 걷던 발에 쓰레기봉투가 치였다.

북쪽 구역에서 흘러들어온 각종 폐자재로 가득한 쓰레기봉투였다.

치워야지, 치워야지, 생각은 하는데 야설 노트 사건 때문에 한동안 내버려뒀더니 계속 수가 늘어난다.

유즈만 확인하고 나면 유력한 용의자는 지금 아카데미에 없는 이리스와 세른 두명으로 좁혀진다.

그때까지만 내버려두자.

툭, 툭, 발로 쓰레기봉투를 골목길 구석에다 밀어 넣은 나는 기숙사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

한 걸음. 두 걸음.

아직 해석해내지 못한 감정이 발걸음에 실렸다.

죄책감일까?

모르겠다.

미안함일까?

모르겠다.

그렇다면, 공포감일까?

모르겠다.

평소 미워하던 여인이 홀로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감정.

통쾌함이란 단어가 스치듯 떠올랐으나, 분명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나는 생각 끝에 마침표 대신 물음표를 찍었다.

공포감? 이라고.

그래서 공포에 질린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공포에 질린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는 거라고.

나는 바스락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기숙사 앞 코너를 돌았다.

기숙사 입구 계단엔 새카맣게 물든 여인 하나가 무릎을 감싸고 앉아있었다.

고작 머리카락이 하얗다고 해서, 입고 있는 옷이 하얗다고 해서 어둠 속에서마저 환하게 빛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멀찍이서부터 시선이 마주쳤다.

마력을 다룰 때 유즈의 눈동자가 새하얗게 불타오른다면, 백야의 눈동자는 보석을 빼닮은 적안이다.

그 적안도 어둠 속에선 아름다움을 잃었다.

앉아 있는 사람이 백야라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절대 붉은색이라 알아볼 수 없었을 정도로.

백야는 검게 물들어 있었다.

"…백야 님."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건넸다.

차를 마신 탓에 입안이 텁텁한데다가, 뛰듯이 걸어온 까닭에 입 냄새가 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찌 되든 별 상관없는 이유였지만, 한 번 후, 하고 고개를 돌려 숨을 뱉어냈다.

뱉어낸 숨결에선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루크.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터는 백야.

언제나 그렇듯, 고저 없는 평탄한 목소리였다.

늦어서 화가 났는지,

늦었지만 딱히 아무 생각 없는지,

목소리만으로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자연스레 백야의 손가락부터 찾았다.

그녀의 감정이 가장 많이 실린 부위가 바로 손가락이었으니까.

먼지를 털기 위해 엉덩이 뒤에 있는 손가락이 다섯.

엉거주춤하게 펴진 무릎을 짚고 있는 손가락이 다섯.

안타깝게도 읽을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백야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하길 바라는 것뿐.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골목길.

백야가 엉덩이를 터는 소리만이 조심스레 떠돌았다.

이제는 이 어색한 침묵도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토할 것 같던 어색함이었지만, 지금은 식은땀만 조금 흘러나올 뿐이다.

한참 뒤.

백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평소에도 이런 시간에 돌아오나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책망이라기보단 걱정에 가까워 보이는 질문이었다.

"글… 쎄요. 일정에 따라 매일매일 달라져서."

"대련이 있는 날에는요?"

"워낙 편차가 심하긴 한데, 대체로 오늘보다 조금 더 늦는 편입니다."

오래 기다려서 화가 조금 났다.

하지만 너한테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시간을 알려달라.

내가 그 시간에 맞추겠다.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물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이러면 오늘로 성교육 끝이 아니라 또 찾아오겠다는 뜻이 아닌가? 라는 생각.

결국 나는 방금 했던 추측을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냈다.

굳이 백야가 또 성교육을 해주기 위해 날 찾아올 이유는 없다.

"오늘보다 조금 더 늦는다라."

"네. 빠르면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돌아오기도 하고, 반대로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날도…."

이 부분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성녀의 컨디션에 따라서, 그리고 내 몸 상태에 따라서 오락가락하는 부분이었으니까.

곧게 뻗은 팔뼈가 산산이 조각난 날일지라도 성녀의 컨디션이 좋으면 금세 치료가 끝나고.

다행히 적당한 타박상으로 버텨낸 날일지라도 성녀의 컨디션이 별로면 한참동안이나 성녀의 말동무가 되어주어야 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일단은 상태가 심각해 보이거나, 아예 기절해서 카엔에게 업혀온 상태면 빨리 치료해주는 것 같긴 하던데.

아마 내가 힘들어하니까 열심히 신성력을 운용해준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럼 오늘은 빨리 끝난 편이네요."

천천히 눈을 깜빡인 백야는 멍하니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심코 본능처럼 시선을 피하려던 나는 뒤이은 백야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카엔의 방식은, 도움이 되던가요?"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멍하니 백야의 말을 곱씹은 탓에, 붙잡지 못한 생각들이었다.

카엔의 방식은 도움이 되었냐.

당연히 그렇다.

애초에 내가 처음 생각했던 '대련 시간' 이란 단어가 그런 뜻이었으니까.

백야가 난폭하게 휘두르는 검을 살기 위해 피하는 것이 아니라.

카엔이 장난치듯 목검으로 날 쿡, 쿡, 찌르는 것을 얌전히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부족한지.

무엇을 모르는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깨닫게 해주는 교육 방식.

대련 시간이 늘 이렇게 흘러간다면 매일매일이라도 좋았다.

"네. 엄청나게."

"제 방식은요?"

끄덕인 고개가 제자리를 찾기도 전에 또 다른 질문이 따라붙었다.

백야의 방식.

생각할 것도 없이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뭐라 예쁘게 포장해볼까 하다가, 결국은 조용히 침묵했다.

어설픈 칭찬 따위를 해봤자 금세 들통 날 것 같아서.

"……."

백야의 눈동자가 살풋 옆을 향했다.

밑으로 천천히 미끄러지다가.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처음 보는 반응이기도 했고,

머릿속 백야의 행동 사전엔 대부분 손가락의 움직임만 쓰여 있는 탓이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차다.

차라리 빈말이라도 할 걸 그랬나.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

어색함에 잠시 시선을 피한 내 앞으로 백야의 목소리가 내밀어 졌다.

"저는, 당신에게 도움이 안 됐나요?"

조용하게.

순수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