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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너 때문에 피곤하니까.』
『며칠 새 익숙해진 반말이 위에서 들려왔다.
예의니, 예절이니,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마치 손아랫사람에게 이야기하는 목소리.
천하디 천한 평민 주제에 그 낮고 짙은 목소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려서.
귀를 쫑긋 기울였다.』
『…내가 왜? 싫어.』
『분명 피곤하다고 말했을 텐데.』
『나는 분명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물어봤을 텐데?』
『…하. 또 지랄….』
『며칠 전까지 들려오던 깍듯한 존댓말은 더 이상 없었다.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한 저 짐승 같은 목소리는, 넋을 잃고 빠질 정도로 취향에 딱 맞았다.
가능하다면 24시간, 365일, 저 목소리 밑에 얌전히 꿇어앉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위하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다고. 너 때문에 잔뜩 밀린 일을 밤새 몰아서 하느라.』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억울해. 난 강간 피해자일 뿐인데.』
『연기력이 부족해서인지, 어딘가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단어 선정도 조금 문제인 것 같지만 으음. 목소리에 제대로 된 높낮이가 없어서일까?
역시 이런 건 조금 더 연습을 하는 게 좋을 듯하다.
요새 섹스, 잠, 섹스만 반복하고 있는 기분인데.
자기 전 잠깐이라도 연기 연습을 좀 해놓아야겠어.
루크의 밑에서 엉망진창 범해지는 여배우가 될 수 있도록.
마음 속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자, 조금 전보다 더욱 험악해진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억울해? 피해자? 네가 계속 내 옆에서 짜증 나는 짓만 하지 않았어도…!』
『동시에 네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주인님이기도 하지.』
『…….』
『일단 멍멍 열심히 짖어볼래? 그러면 내가 입을 꾹 다물어줄지도 몰라.』
『루크의 미간이 혐오감으로 주름졌다.
반대로 내 입술은 예쁜 호선을 그렸다.
당장 나올 수 있는 것 중 두 번째로 좋은 징조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당연히 루크에게 곧장 덮쳐지는 것이고.』
『닥쳐. 그래 봤자 살려줄 마음은 조금도 없잖아.』
『혹시 모르지? 일단 짖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됐어. 그딴 짓 안 해.』
『흐음…. 기회를 줘도 잡질 못하네.』
『그래서, 왜 멀쩡한 베개 놔두고 계속 내 허벅지에 누워 있는 건데?』
『내 맘.』
『…미친년.』
『계속 그럴 거야? 말조심해. 기분 상하면 다음은 없어.』
『미친년 맞지. 강간한 남자 허벅지를 애인마냥 베고 누워있으니까.』
『애인 아니야. 애완동물. 난 그냥 애완동물이랑 놀고 있는 거라구.』
『애완동물한테 물리기 싫으면, 당장 내 방에서 꺼져.』
『정말? 나는 네 이빨에 잔뜩 물리고 싶은데.
하지만 그런 진심을 솔직하게 토로할 순 없는 법.
루크의 허벅지에 드러누운 채 조심스레 눈을 깜빡이고 있던 나는.』
『아, 씨...』
『순종적으로 꺼져주는 것 대신, 콱, 루크의 허벅지를 깨물었다.
최대한 기분 나쁘도록.
침을 잔뜩 묻혀서.
내 향이 가득 남도록.
마킹하듯이.』
『놔. 침 묻잖아.』
『으븝. 읍.』
『안 놔?』
『븝.』
『나는 어디까지나 흥분한 너에게 순결을 잃어버린 귀족.
너는 어디까지나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평민.
내가 들고 있는 카드는 귀족이라는 직위와 네 목숨.
네가 들고 있는 카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태도.
내가 목소리만 내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관계.
이런 상황 속에서,
더 욕해주세요.
뺨 때려주세요.
괴롭혀주세요.
이런 위험하고도 솔직한 말을 꺼냈다간 지금 같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것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냐고.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 뒤에.
다시는 내 몸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이 위태로운 살얼음을 깨뜨리지 않아야, 턱밑으로 달콤하고 끈적한 과즙을 뚝, 뚝, 떨어뜨릴 수 있다.
지금 루크의 허벅지를 깨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침처럼.
끈적하고, 끈적하고, 끈적한 쾌락을.
떨어뜨릴 수 있다.』
『놓으라고.』
『으으읍.』
『…미친년이 진짜.』
『콱. 루크의 손아귀가 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이제 이대로 덮쳐주기만 하면 좋을 텐데.
날 저 조그마한 침대 위에 깔아뭉개고.
그런 음탕한 이유 때문에 기른 게 아닌 머리카락을 고삐처럼 휘어잡고.
머리카락 잡지 말라고 반항할수록, 반항할 수 없도록 더더욱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마지막엔 켁, 켁, 거리는 소리조차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을 쥐고.
사랑이 담긴 달콤한 키스 대신, 성욕만이 남은 끈적한 타액을 입속에 강제로 흘려 넣어주고.
입에서 망가진 숨소리만 새어나올 때까지.
수컷의 진한 정액으로 빵빵하게 채워진 자궁이, 더는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고, 그만하라는 애달픈 간청을 보낼 때까지.
입구 밖으로 꿀럭, 꿀럭, 다 못 들어간 정액이 새어나와 침대 시트를 적셔댈 때까지.
하루종일.
강간당한다면.
나는.
나는….』
****
뒷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충 어찌저찌해서 작가의 욕망을 가득 담은 음습한 강간이 시작되었던 것 같긴 한데,
읽은지 며칠이나 지나지 않았던가.
「여주인공이 만족할 때까지 강간당했다」
한 문장으로 뭉그러뜨린 요약본만 머릿속에 떠오를 뿐.
세세한 것까진 기억나지 않았다.
뭐, 어차피 중요한 건 앞부분이다.
'내 방'을 찾아온 '여주인공'이 '내 허벅지' 위에 '머리를 뉘였다'라는 저 장면.
"카엔이랑 이렇게 있어본 적 있나요?"
"……."
지금 상황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나.
어쩐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우연이 자주 덧씌워지는 상황.
혹자는 그것을 필연이라 부른다.
소설 속에서 '연기 연습을 좀 해야겠네' 라고 서술되어 있는 여 주인공.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함' 그 자체인 백야.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사람.
도서관에서의 성교육.
그리고 내 허벅지 위에 살포시 머리를 뉘이기까지.
어느 정도 소설 속 상황과 빼닮은 현실 속 이벤트.
우연.
음.
우연….
"……"
정말 고작 우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도면 필연,
아니.
아예 백야가 내게 힌트를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루크?"
"…아, 네?"
"카엔이랑 이렇게 있어 본 적 있냐구요."
"아뇨. 아직은…."
백야는 야설 속에서 보았던 행위 그대로 머리를 뉘인 채 말했다.
허벅지가 사람 머리에 짓눌리면 무겁다기보다는 간질간질하구나.
몰랐던 사실을 머릿 속 한켠에 놓아두며, 백야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부스스한 머릿결.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 탓에 드러난 앙증맞은 귀.
그 위에 달린 조그맣고 새하얀 꽃장식에서 시선이 멎는다.
아쉽게도 소설 속 여주인공의 외모 묘사는 단 한 줄도 없었기에, 꽃장식은 아무런 힌트도 되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의심은 꼭 제대로 된 논리적인 원인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깨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단단한 흙 위에 조그마한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는 투둑, 툭, 아등바등 흙을 밀어낸 의심이 마음속에 자그마한 싹을 틔웠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와 카엔의 정사 장면을 보게 된 백야가.
카엔에게 나를 완전히 빼앗기기 전에 적극적으로 나온 걸지도 모르겠다는.
나조차도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라고 생각할 만큼 아주아주 자그마한 의심이.
검은색의 못생긴 싹을 틔웠다.
물론 아직까진 조그마한 의심일 뿐이다.
백야보다는 나를 '루크 님'이라 불렀던 유즈가 훨씬 더 작가 같은 행동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
백야가 더욱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느냐, 안 하느냐.
경우에 따라서는 유즈를 의심할 게 아니라, 지금 내 허벅지 위에 누워있는 백야를 건드려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린애 수준의 성 지식만 빼면, 유즈처럼 필체든, 그간의 행적이든, 야설 작가일 수 있는 최소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여인이다.
만약 지금껏 보여줬던 모습이 모조리 연기였다면.
'굳이 북쪽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도서관에 야설을 남겼을 리 없다.' 라는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유즈와 달리.
백야는 아무런 모순도 남지 않는다.
"네? 이런 것도 안 해봤다고요?"
"네."
"이상하네요. 어머니가 분명 연인이 생기면 이 정도는 금세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요새 애들은 조숙하니 하루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
"루크. 카엔과 사귄 지 오래 된 거 아니었나요?"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사귀는 거 아닙니다, 라는 말은 꾹 삼켜두었다.
그랬다간 이야기가 잔뜩 길어질 게 분명했으니까.
대답을 마친 나는 톡, 톡, 손끝으로 침대 시트를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도서관에서 고작 '어깨 마사지'를 해주었을 뿐인데 금세 헐떡거렸던 백야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평소엔 그렇게나 딱딱한 무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고작 옷감 너머로 손이 조금 닿았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엉덩이를 앞으로 미끄러뜨렸었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다.
1. 그냥 몸이 많이 민감한 편이라든가.
2. 그때 내게 무언가 힌트를 주고 싶었다든가.
1번은 솔직히 말이 안 되고.
남는 건 2번 뿐인데.
순수함이란 단어 뒤에 억눌러놓았던 의심 들이 하나둘 고개를 치켜들고 싹을 키워나갔다.
만약 그 순수한 성교육이 연기였다면.
만약 이 순수한 스킨쉽조차 연기라면.
그렇다면, 역시 범인은.
"……."
톡.
톡.
침대 시트를 두드리던 손끝이 멎는다.
살짝 초점이 엇나간 눈동자.
고개를 들어 그 끝에 마력등이 희미하게 빛나는 천장을 담은 뒤, 다시금 백야의 위로 떨어뜨렸다.
아마 유즈의 발정제가 원인일 것이다.
백야로 가득 찼던 머릿 속에 짙은 안개가 낀다.
한숨으로 안개를 좀 뱉어내려 해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숨 소리를 들은 백야의 붉은 시선만 물끄러미 내 얼굴을 향할 뿐.
그리고,
의식하지 않고 있던 달큰한 향기가 조심스레 코끝을 스친다.
도서관의 꿉꿉한 고서 향에 섞여서 흘러들어오던 은은한 체향.
백야의 체향.
백야의 살 냄새.
"그럼,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짓을 한 거에요? 입안에 막…."
내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길게 가져가려는 백야.
그녀의 말을 끊고, 작은 도박수를 던졌다.
"백야 님."
"네?"
"궁금한 게, 있는데."
"……아?"
부드러운 침대 시트를 두드리던 왼손끝에, 그것보다 훨씬 딱딱한 무언가가 닿아왔다.
천이다.
얇고 새하얀 천.
백야의 어깨부터,
가슴,
허리,
엉덩이까지 가린 뒤에,
허벅지는 살포시 노출하는.
얇고 새하얀 천.
그 중간 즈음에 가볍게 손을 올려두었다.
움푹 들어간 허리엔 천이 몇 겹이나 덧대어진 탓인지, 생각보다 딱딱했다.
"…가르쳐준다고 하셨죠? 제가 카엔 님과 예쁜 사랑을 나누는 법."
"네. 그랬죠."
"아직 가르쳐줄 게 많이 남았다고도 하셨고."
"…힉……?"
한 번 마주치면 쉽사리 시선을 뗄 수 없는 곡선.
백야에게 호되게 당한 날, 그녀를 범하는 상상을 하며 몇 번이고 꽈악 끌어안았던 곡선.
그 곡선을 따라 천천히 왼손을 움직였다.
딱딱하다.
부드럽다.
딱딱하다.
무척이나, 부드럽다.
감상이 크게 바뀐 것은, 움직이던 손이 백야의 골반을 스칠 무렵이었다.
"자, 잠깐만요. 루크. 이럴 때가…."
"왜요?"
골반을 스치고.
옆으로 누운 백야의 엉덩이에 손이 전부 닿기 직전.
휙, 내뻗어진 얇은 팔에 손목을 붙잡혔다.
대련 시간마다 늘 보아왔던 백야의 움직임 만큼이나 민첩한 손놀림이었지만.
"하… 으으…."
그것과 비교하기 미안할 수준의 유약한 손놀림이었다.
막으려는 건지, 계속해 달라는 건지.
연기인지, 진심인지.
작가인지, 작가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이거, 애무… 아니에요…? 그 때랑 손놀림이…."
언제나 고저 없이 평탄하던 목소리가 도서관에서처럼 작아진다.
아무래도 좋은 반응이다.
계속 움직이는 손을 따라 손목에 감긴 백야의 손이 끌려왔다.
이러면 안 돼요.
따위의 저항감은 없다.
이래도 되는 건가요?
따위의 의문은 조금 있는 것 같다.
천천히.
혀로 제 몸을 가꾸는 데 열중인 길고양이에게 다가가듯이.
새끼 손가락만 닿아있던 곡선에 무명지와 중지가 차례대로 올라간다.
다음은 검지.
그다음은, 엄지.
결국 봉긋 솟은 언덕 끄트머리까지 손길이 닿은 순간.
흠칫흠칫 떨리는 진동이 손 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본 적 있는 반응이었다.
섹스하고 있을 때, 카엔의 엉덩이를 꽉 쥐면 보이던 반응과 비슷했다.
뭐라 해야 좋을까.
그 다음 있을 일을 기대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카엔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지를 뿌리까지 밀어 넣은 채 꾸욱, 꾹, 자궁을 압박하며 꼬리를 잘근잘근 씹어 흔적을 남겨주는 일이었고.
백야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게 아닐까?
"읏……?!"
가볍게 스치던 손 끝이 백야의 엉덩이를 짓눌렀다.
어디까지나 옷감 위에서.
이미 끝을 보았던 카엔처럼 형태가 망가질 정도로 짓누른 것은 아니다.
그저 부드러운 엉덩이가 꾸욱, 짓눌려 손가락 위에 옅은 음영이 질정도다.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마사지'를 해주었던 것처럼.
얕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백야는 고작 그것만으로도 신기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힉… 힉……."
"뭐해요. 가르쳐주신다면서요."
물끄러미 내 얼굴을 곁눈질하던 눈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내 허벅지에다 코를 꾹 짓누르며 얼굴을 숨긴 탓이다.
백야 님은,
백야 너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다음은 뭔가요? 백야 님."
물어봐놓고서도 정답을 알고 있었다.
「여주인공이 만족할 때까지 강간당했다」
범인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