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백야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서쪽 구역의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
희고 긴 다리에 차가운 밤바람이 갈라졌다.
한 걸음.
조금 전 루크에게 서슴없이 만져진 엉덩이 부분을 탁, 탁, 털어내고.
한 걸음.
그가 마음대로 꼬집어댄 탓에 망가진 가슴 부분의 옷감도 평소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되돌렸다.
"……루크."
도대체 왜 그랬나요?
지금 전할 수 없는 의문을 꾹 삼킨 백야.
그 대신 루크의 이름이 허공을 맴돈다.
평소 그의 행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대강 '착실한 삶을 사는 평민'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갑작스레 귀족의 몸에 허튼짓을 저지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루크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다.
분명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터.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
글쎄. 높은 확률로 이런 이유는 아니지 싶다.
물론 평민이니 다른 귀족들에게 협박을 받는 일 자체는 충분히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내용이 '백야의 몸을 만져라!' 일리는 없다.
유즈처럼 실험체 1이 되어달라든가, 그런 부탁이라는 탈을 뒤집어 쓴 협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역시 오해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어째서?
백야는 조금 전 루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바쁘다면서 책 읽을 시간도 있냐… 라고 말했었다는 이야기와, 책에 적혀있던 내용물에 관한 이야기가 차례대로 뇌리를 훑으며 지나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땐 분명 애무가 뭔지 알아보던 와중 시간이 다되어 헤어진 것밖에 없었으니까.
어쩌다 그런 오해가 생겼을까.
설마 예시를 들기 위해 허벅지에 잠시 누운 것만으로 그렇게 된 건 아닐 테고.
계단을 오르며 고민하는 백야.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럴싸한 추측이 아닌, 어릴 적 동생의 목소리였다.
─누나는 가끔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어
아마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동생의 손에 박힌 가시를 해결해 주려 아버지의 검을 빌려 온 날이었지 싶다.
그땐 그냥 어린 마음에 잘 몰라서 그랬을 뿐인데.
'…내가 놓친 게 있을 거야.'
하지만, 역시 아직 잘 모르겠다.
잠시 뒤를 돌아본 백야는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내일 해가 뜰 때 즈음이면 루크도 조금 진정되었을 테니 그때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될 것이다.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책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그리고.
****
대충 아무 곳이나 펼쳐 놓은 야설 노트.
그리고, 방금 백야가 그림을 그렸던 노트가 놓인 식탁 옆.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구석에 곰팡이가 핀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
천천히.
여러 감정을 실은 한숨이 허공을 헤집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훨씬 간단하고 강렬한 감정 하나만 남아 있었는데 말이다.
좆됐다, 라고.
예쁜 미사여구를 모두 집어치운 그런 감정뿐이었는데.
지금은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감정이 혀끝에서 나뒹굴었다.
유즈의 발정제는 갑작스럽게 내 이성을 망가뜨려 꼭꼭 숨기고 있던 본성을 끄집어낼 뿐, 기억을 지우거나 하는 효능은 따로 없다.
허리춤을 따라 쓸어내린 손으로 백야의 엉덩이를 주무른 것도,
그대로 손을 끌어올려 젖가슴을 주무른 것도,
마지막엔 그녀의 눈앞에 자지를 들이민 것도,
자지를 마주하게 된 백야의 당황스러워하는 반응도.
모조리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착잡했다.
잠깐동안이지만, 백야가 소설 속 상황처럼 강간당하고 싶어서 순수함을 연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하지만 만약 그랬더라면 자지를 꺼냈을 때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어쩔 수 없는 분위기를 잡아서 마구 박혔을 테고.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들러붙기 시작했겠지.
결론은 하나였다.
좆됐다.
욕실 벽에 머리를 박고,
냉수 밑에서 내가 왜 그랬을까 자책하며,
카엔을 덮쳤을 때와 '비슷한 상황'을 보내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오직 그것뿐.
…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마음 속 한 구석에 의문 하나가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까지도 백야를 야설 작가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필체 대조까지도 끝마친 상황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노트 두 개를 펼쳐놓고 글자를 비교하는 것 정돈 어린애도 할 수 있으니까.
지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그런 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하나.
백야는 야설 작가가 아니었는가?
그렇다.
유즈처럼 의심스러운 구석은 많았다만, 결과물을 보니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럼, 여기서 둘.
백야는 순수한 척 연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한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대련 시간마다 나를 열심히 두드려 팼던 것도, 그렇게 하면 정말 도움이 될 줄 알아서.
카엔의 일을 목격한 뒤 내게 귀여운 성교육을 들이밀었던 것도, 자신의 성지식이 내게 도움이 될 줄 알아서.
백야딴엔 나름 '루크를 위해서' 같은 마음으로 저지른 일일 것이다.
셋.
백야의 '순수함' 에 뒤이어, 천천히 고개를 내미는 궁금증 한 가지가 있다.
도서관에서도 그렇고,
조금 전 상황에서도 그렇고.
제대로 된 애무를 한 것도 아닌,
고작 손을 가져다 댄 것 정도의 움직임이 전부였는데.
백야는.
그 순수한 백야는, 왜.
"……."
힐끔, 천장을 바라보던 눈이 침대로 향했다.
정확히는 침대 끄트머리로.
더 정확히는 백야의 엉덩이가 닿아있던 곳으로.
침대에 자그마한 물자국이 남은 곳으로.
****
감각, 그리고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으나 흔적만큼은 지워낼 수 있다.
루크가 엉덩이를 만지며 느껴졌던 '신기한' 감각도.
루크가 엉덩이를 때릴 때 느껴졌던 '무척이나 신기한' 감각도.
루크가 젖꼭지를 쥐어짤 때 느껴졌던 '엄청, 엄청, 엄청나게 신기한' 감각도.
얼굴 앞에 가까이 모습을 드러낸 팔뚝 같은 자지… 를 본 기억도.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백야의 몸을 은은히 맴돌고 있었지만.
흔적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지워낼 수 있으니까.
─또각또각
백야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중앙 구역을 벗어난 그녀의 눈 앞에 익숙하고도 흐릿한 빛이 가득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폭 빠져들어 있던 새카만 어둠과는 달랐다.
온통 암흑투성이인 중앙 구역과 달리, 귀족들의 주거지인 서쪽 구역엔 길을 비추는 마력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랄까.
땀방울이 밤바람에 식어가는 것과 합쳐져서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방금 루크에게 당했던 의미 모를 행동들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그런 순수하고 낙관적인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곧 백야는 입술을 살풋 깨물었다.
굉장히 무례하며,
배운대로라면 성희롱이 분명한,
동시에, 떠올릴 때마다 왠지 모르게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잔불처럼 남은 감각이….
방금 전 일이 현실이라고 일깨워 주었기 때문에.
"아으……."
아직까지 옷 속에서 빳빳하게 솟은 젖꼭지가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든가.
옷을 정리하던 와중, 루크에게 손찌검당했던 엉덩이 위에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대어 보았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든가.
그러면서 '남자의 손은 생각보다 더 크구나' 따위의 생각이 지나갔다든가.
계단을 오른 탓인지, 한 번 달아올랐던 숨결이 아직까지도 입술 새로 거칠게 새어나온다든가.
게다가 지금도 자꾸 그… 코앞에 툭, 내밀어 졌던 커다란 자지가 머릿속에 생생히 떠오른다든가.
마지막으로 가랑이 사이가 이상하고 끈적한 액체로 흠뻑 젖어있는 것까지.
이 모든 불쾌한 잔불들 때문에, 조금 전 일은 절대 꿈이 아닐 것이다.
갑작스레 예의범절을 잊고 날뛰기 시작한 루크도, 분명 현실의 것.
주변을 살짝 둘러본 백야는 재빨리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액체를 닦아냈다.
이 끈적한 액체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 싶다.
이전에 한 번 본적은 있다만, 아직 정체를 모르겠다.
아마 도서관에서 애무 당했을 때 생겨났던 것과 똑같은 액체이긴 할 텐데…
이름. 모른다.
역할. 모른다.
끈적하고,
미끈거리면서,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그런 액체.
물론, 오줌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왜 나왔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저번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신기한' 감각을 느낀 뒤 이런 액체가 흘러나왔으니 아마도 루크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루크가 말했던 '애무' 와 커다란 관련이 있겠지.
"……."
백야는 희미한 불빛을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걷는데 크게 방해가 되는 것까진 아니다만, 이상한 액체로 축축하게 젖은 팬티가 무척이나 불쾌했다.
당장 뽀송뽀송한 새 팬티로 갈아입고 싶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결과물은 무척이나 기분 나빴지만.
과정은….
그렇게 불쾌했던 것 같진 않은데.
오히려….
그게….
"아가씨."
백야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의 무뚝뚝하고 곧은 붉은 시선 끝에 놓여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언제나처럼의 다소곳한 자세로 자신을 맞아주는 하녀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내가 문을 열긴 열었던가?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지?
그 모든 의문을 들숨과 함께 삼켜낸 백야는 우선 조용히 신을 벗었다.
하녀는 말이 없었다.
다행히 현관에서 그리 오랫동안 시간을 보낸 건 아닌 듯하다.
마루 위로 올라가자 신을 정리하러 내려가는 하녀.
재빠르게 침실로 도망치려던 백야는, 천천히 몸을 돌려 하녀를 바라보았다.
분명 오늘은 따로 일정이 있어 조금 늦을 테니 저녁 식사는 굳이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일러두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목욕물 또한 받아두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덧붙였고.
애시당초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꼬물꼬물 입술을 달싹이던 백야는 기어코 한 마디를 조심스레 내뱉었다.
"…목욕은 나중에 잠들기 직전에 할거에요."
자연스럽게 내뱉어도 괜찮을 말을.
무척이나 의심스럽게.
"알겠습니다."
"세탁물은 제가 직접 가져다 놓을 테니 신경 쓰지 말아요."
"어차피 깨어 있는 시간이니 제가…."
"아뇨. 제가…. 제가 가져다 놓을 테니까."
"…? 네… 알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던 사람도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만큼.
무척이나 의심스럽게.
"저녁도 괜찮아요. 준비하지 마세요."
"그럼 간식거리도…."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말을 마친 백야는 최대한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사뿐사뿐 침실로 향했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미끈한 촉감이 느껴졌을 땐 화들짝 뒤를 돌아보기도 하며.
거기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간 백야는.
─달칵
─툭, 툭, 툭.
─풀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