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고요한 밤.
오후 9시 20분.
어느새 방안에 콕 틀어박힌 지 어언 2시간가량이 지났다.
평소 기숙사로 일찍 돌아오면, 이 시간을 내일 일정에다 투자하기 위해 일찍 잠에 들곤 했는데 말이지.
억지로 찾아온 갑작스러운 여유로움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기숙사로 돌아온 지 5분쯤 지났을 무렵.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그동안 바빠서 못했던 검술 이론 공부를 하며 노트를 끄적였다.
몇년째 보아온 익숙한 악필이 노트 위를 뒤덮었다.
이후엔 검사에게 남는 것은 체력뿐이란 생각이 들어 방바닥에 땀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몸을 혹사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일련의 행동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맞다. 성녀."
잠들기 직전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꿈속에 파묻히듯,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조용히 떠오른 까닭이다.
오늘 밤 같이 놀자며 날 유혹하려던 성녀.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유혹에 끌려갈 뻔한 나.
"뭐였지?"
새로운 의문 하나가 어느 정도 선명해졌던 사건의 윤곽을 흩트려놓았다.
지금까지의 사건 흐름은 대강 이렇다.
하나.
누군가가 나를 주인공으로 강간당하는 야설을 썼다.
범인은 아직 모른다.
용의자는 6명의 여인.
둘.
유즈는 내게 수상한 약물을 먹이고 있다.
처음엔 연구용이라더니 하나하나 따져보니 발정제 같은 약물로 의심되는 상황.
여기까지가 작금의 진행상황.
그리고, 셋.
낮에 성녀를 찾아가니 방 안에 가득 이상한 향기를 채워넣은 채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
게다가 그 향은 무척이나 익숙한, 내가 성녀를 찾아갈 때마다 마시던 차의 향기였다.
확실한 정체는 알 수 없다만, 효과로 미루어보아 성욕과 관련된 무언가가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냄새만 잠시 맡았다고 그리 이상한 행동을 보일 순 없으니 말이다.
그간 그녀들에게 이런저런 짓을 당해오며 나쁜 욕망을 쌓아온 것은 사실이다.
야설 노트의 주인을 찾으려는 원동력도 바로 이것이고.
하지만 어제처럼 아무렇게나 쏟아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자꾸 머리가 멍해지고, 욕망대로 몸이 움직이던 이유가 혹시….
"성녀…?"
자연스레 추리의 노선이 꼬인다.
필체든, 존댓말이든, 의심되는 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유즈를 의심하던 가장 커다란 이유가 바로 '발정제' 아니었던가.
필체는 천방지축 카엔을 제외한 모두가 훌륭한 편이니 일단 제외하고.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루크 '님'이라 부른 것이었다면?
사실 약물은 별거 아니고, 발정제의 정체는 성녀가 항상 건네주던 차였다면?
흥분하면 이성을 잃는 것 같다고 하자 갑작스러운 관심을 보였던 것도.
자신이 제조한 약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열심히 수정 작업을 거친 것도.
그냥 변수를 체크해보고 제대로 된 연구를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면.
이 한 문장이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게다가 저번에 유즈에게 대놓고 발정제냐고 물었더니, 그런 거 아니라고 답하지 않았던가.
왜냐하면,
진짜 발정제가,
아니었으니까.
"……."
등골을 따라 싸늘한 소름이 스치고 지나간다.
물론 아직까진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야설 작가가 백야인 경우… 는 지금 와서 생각하기엔 확률이 너무 낮고.
야설 작가가 유즈인 경우.
야설 작가가 성녀인 경우.
야설 작가가 두 황녀 중 하나인 경우.
경우의 수는 네 가지 중 성녀랑 황녀 둘한텐 아직 아무 짓도 안 저질렀지만.
유즈한테는….
"…이미 저질렀는데……."
슬쩍 돌아간 시선이 벽시계를 향했다.
오후 9시 30분.
북쪽 구역의 연구동까지는 뛰어서 30분가량이 걸린다.
저번에 중앙 구역에 쌓인 쓰레기 더미들을 깔끔하게 정리해놓다가 다급히 뛰어가봐서 잘 알고 있다.
나는 황급히 겉옷을 챙겨입었다.
****
심야의 탈출은 성공적이었다.
카엔이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든가,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내 귀에다가 지금 뭐 하느냐고 속삭인다든가.
그런 불행한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산책하려고 나왔다는 핑계도 급하게 준비해두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최근 늑대라기보단 다람쥐를 닮은듯한 행동에 비해, 그녀는 소유욕이 굉장히 강했으니 말이다.
아마 애초에 무언가를 남에게 빼앗겨본 적 없는 대공녀라 그런 것이지 싶다.
오늘 굳이 나를 도와주었던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관계를 알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고.
이 남자는 내 거라고.
우리는 이런 관계라고.
한편으론 조금 걱정이다.
고작 섹스 파트너 관계니까 딱 이 정도 즈음에서 한 발 물러나는 거지.
만약 연인 관계였다면….
감금….
"끄응."
밤길을 달리던 나는 머리를 털어 나쁜 망상을 지워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게다가 연인 관계라니.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다.
기껏해야 아카데미에서의 즐거움이 전부일 터.
카엔도 그럴 생각인지, 내게 이보다 더 깊은 관계를 요구하진 않았다.
다만 다른 여자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도록 감시할 뿐이다.
아까 이야기했던 '소유욕' 때문에.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먼저 섹스했는데.
네 이상한 취향도 내가 전부 받아줄 수 있는데.
대충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있겠지.
섹스 파트너 이상.
연인 이하.
여러모로 복잡한 관계다.
"후…. 후우…."
뜨거운 감정은 뜨거운 만큼 또 금방 식는다.
그리고 세상은 감정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나는 내 주제를 잘 알고 있다.
마력을 다룰 줄 아는 평민 1.
신기하되 특별하진 않다.
카엔은, 특별한 사람이다.
언젠가 그녀처럼 특별한 남자와 가족의 연을 맺겠지.
오후 10시.
열심히 달리던 발 앞에 익숙한 건물이 놓였다.
"학…. 하……."
계단에서부터 여기까지 줄곧 달리기만 했더니 숨이 벅차다.
땀 냄새… 도 좀 나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
후우, 헐떡거리던 호흡을 대충 갈무리한 나는 어두컴컴한 연구동 안으로 들어섰다.
유즈의 정체만 확인하고 나면 남는 것은 황녀 둘.
그리고 오늘 낮 이상한 모습을 보여준 성녀뿐이다.
…솔직히 '진짜' 발정제를 보고 나니, 이젠 유즈보단 성녀 쪽이 훨씬, 훨씬, 훠얼씬 더 의심스럽다.
이미 머릿속엔 죄송하다고 머리를 박을 생각으로 가득했다.
"계십니까? 유즈 님?"
꼴깍, 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냈다.
어두운 통로 너머,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유즈가 기다리고 있을 곳은 2층.
멀다곤 하나, 목소리가 전혀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는 아니다.
애초에 유즈가 내 질문에 대답할만한 여인은 아니다만….
너무 늦어서 화났나?
설마 들어가자마자 불태워지는 건 아니겠지.
이런저런 걱정이 발걸음에 실렸다.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걷던 나는, 이내 계단을 찾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차가운 정적 속.
딱딱한 발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연구동이 무척이나 어둡다.
저번에 한 번 8시쯤 느지막이 찾아왔을 적엔 이렇게까지 어둡진 않았는데.
분명 유즈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새파란 화염이 연구동을 가득 비추고 있어야….
"……."
문득 뇌리를 스치는 위화감.
잠시 발을 멈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단 벽면.
천장.
방금 지나친 1층.
어둡다.
지나칠 정도로, 어둡다.
언제나 도깨비불처럼 달라붙어 있던 새파란 화염 덩어리가,
오늘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확실히 평소보다 많이 늦게 오긴 했다.
어느 정도까진 나를 기다리다 오늘은 안 오나 보다 싶어서 저택으로 돌아간걸 지도 모른다.
위험을 무릅쓰고 조금 더 일찍 와야 했을까.
아니야. 결과론일 뿐이다.
만약 카엔이 어딘가에 쏙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게다가 꼭 집으로 돌아갔다는 보장도 없다.
유즈도 사람이니까, 피곤해서 잠시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을지도 모르지.
잠시 멈춰서 고민하던 나는 다시 계단을 밟아 올랐다.
여기까지 왔으니 2층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뚜벅, 뚜벅, 무거운 소리가 퍼져 나가도 연구동에 푸른 화염이 떠다니는 일은 없었다.
"유즈… 님…?"
마침내 도착한 2층은 찾아올 때마다 보았던 알록달록한 모습 대신, 완연한 검은색을 품고 있었다.
유즈가 마법을 쓰며 보이는 하얗게 타오르는 눈동자. 없다.
보글보글 소리를 뿜으며 끓고 있는 여러 가지 빛깔의 시약. 없다.
항상 유즈가 앉아 있던 새카맣고 푹신한 의자. 없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새카만 어둠뿐이다.
툭, 툭, 손바닥으로 주변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무로된 물건 특유의 사각사각한 표면이 손에 닿는다.
시약을 끓이는 곳은 화재의 위험이 있어 금속제 책상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곳은 아마 각종 서적을 놓아둔 선반일 것이다.
여기서 살짝 꺾어 들어가 손을 뻗으면 평소 내가 쓰는 커다란 의자가 있을 터.
천천히 어둠 속으로 손을 뻗자 익숙한 의자 손잡이가 손끝에 닿았다.
생각해보자.
입구에서 우회전. 거기서 직각으로 좌회전.
이제 의자까지 다가왔으니 왼쪽 대각선으로 조심스레 다가가면 유즈가 쓰던 의자가 있다.
시각이 차단되면 오감이 예민해진다는 게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머릿속에서 대강의 지도가 그려진다.
나는 의자 손잡이를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한 발자국씩 옮겼다.
그러니까 여기서….
"흑…."
"……."
무슨 소리가 들렸다.
위치는 가깝다.
그러니까, 바로 앞. 거기서 조금 밑이다.
"우으…."
들려온 것은 무척이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마치 유즈의 목소리처럼.
낮고.
강한듯하면서.
연약하다.
"흑…. 흑…."
이 연구동에 들릴만한 사람은 나, 황녀 이리스, 유즈가 전부.
이리스가 아카데미에 돌아왔을 리는 없으니 남는 것은 한 사람이다.
"…유즈 님?"
나는 천천히 의자를 잡아당겼다.
원한다면 몸을 뉘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의자였지만, 바퀴가 달린 의자는 아니었기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자를 잡아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의자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이 허벅지에 닿았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가깝다.
이젠 바로 밑.
어느 정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것도 같다만.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아주 흐릿한 실루엣 뿐이었다.
"유즈 님."
"잘못…. 으…."
이제 확실하다.
유즈의 목소리였다.
다만, 물기를 함뿍 머금고 있을 뿐.
지독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뭐라도 해보려고 움직이던 손이 결국 의자 손잡이를 다시 꾹 쥐었다.
함부로 몸에 손을 대었다고 싫어하면 어쩌지.
그래도 계속 훌쩍거리는 것보다는 깨워 주는 편이.
그랬다가 저번처럼 불에 휩싸이면….
…모르겠다.
저번에 샐러드를 먹고 있을 때 도대체 뭘 연구했던 거냐며 대들었던 대가, 지금 받았다고 생각하지 뭐.
의자 끄트머리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내려간 손가락이 유즈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부드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옆으로 내려가 어깨를 붙잡았다.
연구동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는 탓인지, 어깨 근육이 꽤나 뭉쳐있었다.
"유즈 님."
"응, 응…."
…어깨 뒤로 집어넣은 손가락에 촉촉한 물자국이 닿는다.
"일어나세요. 거기 제자리에요."
"으으…."
가벼운 농담을 섞어봤지만 유즈는 여전히 짧은 신음을 뱉곤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더 실었다.
어디까지나 마사지를 해준다는 느낌으로.
고통스럽되, 한편으론 기분 좋을 테니까.
"읏…? 으…?"
꼼지락, 꼼지락, 내 손길을 피하려 드는 유즈.
다행히 반응이 있다.
잠시 뒤.
헙, 하는 숨소리와 함께 어깨가 흠칫거렸다.
그나마 축 늘어져 있던 어깨가 긴장으로 더욱 딱딱해졌다.
이제 계속 손대고 있어봐야 화만 부를 뿐.
손을 뗀 나는 조심스레 유즈를 불렀다.
"유즈 님. 저 왔습니다."
"어, 으, 어?"
"저. 왔습니다. 루크."
부스럭, 부스럭, 기다란 머리카락이 의자에 쓸리며 조그마한 소리가 퍼진다.
하긴, 자다 깨면 정신이 없긴 하지.
가벼운 바람이 뺨을 스친다.
어둠 속인데도 당황해서 이리저리 고개를 흔드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는 들려오는 한 마디.
"…발화."
아직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새어나오자, 언제나의 새하얗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1초도 지나지 않아 연구동 전체에 화사한 푸른 빛이 피어난다.
"윽…."
갑작스런 빛에 눈을 찌푸린 것도 잠시.
대강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열심히 손목으로 눈을 비비는 유즈가 보였다.
눈물로 엉망이 되었을 꼴을 평민에게 보여주긴 무척 싫나 보다.
의자에 남은 자그마한 눈물 자국을 보고 있던 찰나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따라 일이 바빴습니다."
대충 꾸며낸 말을 꺼내놓았다.
진실을 말해봐야 딱히 도움 될 건 없고, 날짜가 정해진 일정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유즈가 알 턱이 없었다.
"바빠, 바빴구나. 응… 그래. 바빴으니까 늦었겠지…. 맞아."
"죄송합니다. 이렇게 늦은 적은 없었는데. 10시에 딱 맞춰서 와버렸네요."
"버림당한…. 아니, 음… 됐어. 약속했던 시간은 10시니까…."
잠에서 깬 직후는 좀 시끄럽더니, 어느새 평소의 짧고 딱딱한 목소리로 돌아가는 유즈.
그래도 아직 코맹맹이 소리는 조금 남아있었다.
"아무튼, 늦었으니까 빨리 시작하자."
"……."
"알약이랑, 그리고 시약이랑…."
"유즈 님. 저기…."
제 의자로 돌아가고 있던 유즈의 몸이 잠시 굳는다.
한 번 더 검지 손가락으로 눈을 닦아낸 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유즈.
"왜?"
눈물 자국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눈물 자국 밑에, 본 적 없는 옅은 미소가 스친다.
미소.
처음 보았다.
"…아닙니다."
발정제 관련해서 이야기를 꺼내려던 나는, 다시 목구멍 밑으로 이야기를 쑥 집어넣었다.
굳이 이 좋은 분위기를 깨뜨릴 필요 없었던 까닭이다.
대신 유즈가 직접 들고온 시약과 알약을 받아들었다.
"……."
…그런데.
왜지?
저번에 마지막으로 헤어질 땐 예의 없이 툭, 툭, 말을 뱉어내다 헤어졌고,
이번엔 그냥 악몽을 꾸고 있는 걸 깨워줬을 뿐인데.
왜 이렇게 친절한걸까.
지금껏 봐온 유즈는 이런 사람이 절대 아닌데.
처음 받는 호의와 미소에 어안이 벙벙했다.
"먹어. 빨리."
"……."
시간이 늦어서인지 빨리 먹으라며 약을 들이밀고 재촉하는 유즈.
말… 이라도 잘 들어야겠지.
괜히 토달지 말자.
합, 혀 위로 던져넣은 알약 위로 끔찍한 맛의 시약이 겹쳐지고.
"루크."
"…?"
무언가가 시야에 스친 뒤.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