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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61화 (61/66)

61

"……."

"……."

불안한 침묵.

어색한 발걸음.

고요한 어둠.

포근한 불빛.

""하….""

귀족들의 거주지인 서쪽 구역 초입.

유즈의 옆에서 걷던 내가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유즈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못 듣고 넘겼을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주변이 무척 조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까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별다른 노력 없이도 유즈 특유의 쌀쌀하고 낮은 한숨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

잠시 유즈와 시선이 마주쳤다가 이내 불편함을 가득 담아 멀어졌다.

역시. 어색하다.

"……."

마법을 쓰지 않는 유즈의 눈동자는 진회색이었구나… 따위의 감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는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지 알 것 같아서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잡생각이리라.

방금 질내사정 해버린 유즈와 함께 뜻 모를 밤 산책을 거닐고 있다는… 의문투성이 현실 말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답답함에 올려다본 하늘은 우중충한 내 마음과 달리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밤공기를 타고 둥지를 찾던 새 한 마리가 가로수 위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꺄아아악, 이었던가?

조금 전 연구동을 뒤흔들었던 유즈의 비명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멀뚱멀뚱 시계랑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비명부터 질렀었지.

처음 들어봤다. 그런 진심을 가득 담아 내지르는 비명.

문자 그대로 등골이 섬칫하더라.

실제로 그럴만한 짓을 저지르긴 했으니 말이다.

호다다 벽에 붙어 어떻게든 가슴과 음부를 가리려는 유즈.

그런 유즈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는 나.

만약 그때 누군가가 옆에서 우리 모습을 봤다면, 강간범과 피해자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더욱이 절망적인 것은 그것이 착각 하나 없는 진실이라는 점이다.

목이 아팠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콜록콜록 기침을 뱉어대긴 했지만, 이미 그 찰나 동안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유즈를 강간했는데도 멀쩡히 살아있는 이유라든가.

도대체 왜 내 손가락을 가지고 퍽, 퍽, 엉덩이를 움직여 자위했느냐 라든가.

의문을 파고들 생각은 싹 사라지고 없었다.

그딴걸 물어보기 이전에, 성녀 때문에 그랬다. 나는 억울하다. 부디 선처를 부탁드린다….

그런 말부터 해야 했는데.

변명보다는 무조건 죄송하다고 뱉는 게 좋았을까.

…이제 와선 아무 의미 없는 고민이다.

어쨌든 유즈에게 제대로 된 사과는 조금도 하지 못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눈물까지 글썽이는 유즈의 앞에 꿇어앉아 머릿속에서 뒤엉켜버린 낱말들을 풀어보려다가,

결국 식은땀만 뻘뻘 흘릴 뿐.

그런 바보 같은 나대신, 고개를 푹 숙인 채 헐떡이던 유즈쪽에서 먼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고.

"……."

착잡했다.

이번이 처음이면 모를까, 이미 전과가 있는 나였다.

심지어 두 번이나 있다.

어쩌면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유즈가 우리 사이에 무언가 단단한 오해가 있다, 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아직까진 분위기상 후자에 가까운 듯하긴 하지만….

이미 질내사정까지 해놓고 고작 이야기로 해결할 수 있으려나.

지금도 아마 자궁 안에 있던 게 허벅지를 타고 천천히 새어나오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로브 속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강심장이 아니라 대놓고 바라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루크."

방금 전 겹쳐 들렸던 한숨보다 2배 정도 더 큰 목소리가 내 이름을 담았다.

여전히 낮고, 싸늘하며, 조용하다.

"네. 유즈 님."

"…혹시 지금…. 피곤해?"

지금은 방금 전 한숨보다 1.5배 정도 더 크다.

아마 '내가 너랑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겠으니 피곤해도 시간을 내라' 라는 뜻을 품고 있을 것이다.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요새 늦게 자는 편이라서요."

"…으음…. 늦게 자는 거… 좋아해?"

"네? 어,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냥…."

굳이 아무 이유도 없는데 일부러 늦게 자는 사람이 있긴 하려나.

도대체 무슨 의도가 담긴 질문인가 싶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와중.

"그… 늦게 자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면…."

밤하늘과 닮은 군청색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세, 세 번이나… 했으니까…. 지금 엄청 피곤할 것 같아서."

자연스레 돌아본 시선 끝엔, 새하얀 피부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까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던 탓인지 아직도 귀 끝이 빨갛다.

피부가 하얀 탓에, 더더욱 티 난다.

평소 유즈는 연구동 안에 콕 틀어박혀 있으니까, 아마 두 번 다시 이런 모습은 볼 수 없겠지.

싸늘하진 않지만 무뚝뚝하게.

어느새 뺨까지 은은하게 달아오른 유즈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피곤하면 일단 돌려보내 주려고."

…아. 알았다.

늦게 자는 거 좋아하냐는 질문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라는 뜻이었구나.

일단 돌려보내 주겠다는 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뜻일 테고.

늦게 자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이미 늦었다.

대신 최대한 생존 점수를 따기 위해 언제나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조금 늦어져도 상관없어요. 당장은 유즈 님이랑 대화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 그럼."

나보다 먼저 시선을 살짝 피했다가, 이내 다시 내 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말을 잇는 유즈.

유즈가 만족할만한 대답이었을까.

지금이라도 구질구질하게 성녀 때문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오히려 질내사정 해놓고 웃는다고 점수를 잃진 않았을까.

"가자. 따라와."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멈췄던 유즈의 발걸음이 다시 남쪽을 향하고.

그 위에서 밤하늘이 기분 좋게 살랑인 까닭이다.

****

굳게 닫힌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안에 담긴 공기가 싸늘했다.

뭐,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애당초 석양이 무르익을 즈음, 청소고 뭐고 칼같이 퇴근해버리는 사서가 관리하는 도서관이다.

달리 말하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엔 꽤나 안성맞춤인 공간이기도 했다.

교수든, 학생이든, 굳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도서관을 들를 이유는 없으니까.

물론 엄밀히 따지고 보면 유즈의 연구동이 훨씬 더 비밀스러울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정액 냄새와 땀 냄새로 가득 들어차 있는 것도 그렇고,

유즈로선 잠시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읏…."

1층 구석.

먼저 의자에 앉은 유즈의 몸이 흠칫, 튀어 올랐다가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카엔처럼 손자국을 냈던 기억도 없고, 실제로 엉덩이는 내 아랫배가 닿을 부분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던 게 전부였다.

그러면 남는 이유는 하나였다.

가랑이 사이로 새어나온 정액.

1. 잘못했습니다.

2. 성녀님 때문에….

3. 서서 이야기할까요?

범인인 나는 도대체 무슨 말로 시작해야 괜찮을지 고민하며 유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루크."

다행히 이번에도 유즈가 먼저 대화의 물꼬를 틀어주었다.

시선을 내리깐 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네."

"혹시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나?"

올게 왔다.

"……."

…그런데, 어쩌지.

유즈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도록 곧장 대답할 생각이었던 나는, 책상 밑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꾹 쥐었다.

당연히,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즈가 로브 목 부분에 손가락을 걸치고.

거기서 1초도 채 지나지 않은듯한 감각 이후.

바닥에 엎드려 엉덩이를 치켜든 채 내 정액을 꿀럭꿀럭 쏟아내기까지.

결과는 당연히 질내사정이었다만,

지금 유즈가 물어보는 것은 그 이전의 이야기일 것이다.

기억을 잃은 1시간 동안 네가 내 몸에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느냐.

일단 아까 유즈의 말로는 세 번이나 질내사정을 했다던데.

정작 그렇게나 유즈를 강간한 내가 '죄송한데 하나도 기억 안 난다.' 라고 답하면.

…나는 도서관이랑 같이 불태워지지 않을까.

"무슨 짓을 했는지… 말씀이시죠."

"……."

혹시 조금이라도 기억이 날까 싶어 시간을 끌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끄덕, 여전히 시선을 살짝 내리깐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즈.

미치겠다.

책상 위가 엉망진창이었으니까, 그걸로 대충 때려 맞추면 괜찮으려나.

아랫입술을 꾹 짓씹은 나는 살아남기 위한 거짓을 입에 담았다.

"…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잘 때려맞춰보자.

그 직후.

줄곧 내리깔아져 있던 유즈의 얼굴이 휙, 내 얼굴을 향했다.

일단, 빨갛다.

엄청나게, 빨갛다.

싸늘함. 무뚝뚝함.

그 근처의 이런저런 유즈다운 모습은 모두 어디 가고.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아, 으, 하고 입술을 움직이고 있는 유즈가 눈 앞에 놓여있었다.

"…정말?"

유즈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 그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혹시 내가 대답을 잘못했나?

도서관에 들어온 처음부터 차근차근 대화의 흐름을 떠올려봤지만,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애초에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이상한 답을 고르는 게 더 어려웠다.

"기, 기억한다고…? 혹시, 전부다?"

하지만 내 대답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기엔, 유즈의 반응이 무척이나 격했다.

기억을 잃은 것보다 가지고 있는 게 문제인 듯, 게다가 전부다 기억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듯 말을 건넨다.

일단 잘못 대답한 건 맞는 듯한데….

왜 '기억하고 있다' 라는 대답이 잘못된 거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문제 아니야?

"처음부터? 아니면, 중간부터? 마지막만?"

"그……."

평소 필요한 말만 차분히 늘어놓던 모습은 어디가고, 흥분해서 우다다 말을 늘어놓는 유즈.

뭐지. 도대체.

머리가 아프다.

툭, 치면 깨질듯이.

피곤함이 겹쳐서 그런지, 그냥 생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다.

"…드문드문. 네. 전부 다는 아니고, 드문드문 기억납니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반응으로 보아 모두 기억난다는 거짓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저 사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라고 말하기엔 이미 선을 넘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것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잘 빠져나가는 데에 집중하는 것.

"그렇, 구나…."

넌 엘프가 아니니까.

자그마한 혼잣말이 뒤를 이었다.

다행이었다.

나름 나쁜 대답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대답을 골라낸 모양이다.

긴장감에 목이 탄다.

왜 '기억하고 있다'가 잘못된 대답인진 아직까지도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 넘겼으니 됐다.

꿀꺽, 마른 목구멍에 군침을 칠하자 유즈의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그러면, 그 드문드문 기억나는 부분이…. 어딘데?"

"……."

어쩌지.

이걸 말해도 되나.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거라 해봤자, 벽에 밀어붙여 섹스하기 전엔 아마 책상 위에다 유즈를 눕힌 채 몸을 섞지 않았을까… 정도다.

만약 이게 내가 기억하고 있으면 안 되는 기억이라면?

모르겠다.

진짜. 전혀 모르겠다.

어딘가에서 꼬인 게 분명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말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랬으면 지금쯤 성녀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열심히 해명하고 있었을 텐데.

눈을 질끈 감고, 제발 괜찮길 바라며 내뱉었다.

"책상 위에 누운 유즈 님이…."

"……."

"그, 음…. 제게 강간…을 당하는…."

차마 고개를 못 들겠다.

고개를 숙인 채 살짝 실눈을 뜨자 맞은편에 앉은 유즈의 검지 손가락이 서로 규칙적으로 부딪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괜찮은 건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인 유즈.

옆으로 뻗은 귀가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괜찮은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일단 책상 위에 누워 나랑 섹스한 건 사실인가 보다.

"…그거, 정확히 어디부터 어디까지 기억나…?"

산 넘어 산이었다.

이건 발뺌도 못한다.

자칫 내 상상을 곁들여 이야기했다간, 실제 있었던 일과 다를 확률이 높으니 말이다.

결국 알고 있는 것들로만 이야기해야 하는데….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깨진 플라스크 병과 마녀들이 쓰는 종이는, 섹스하던 와중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책상에 남아있던 정액 자국으로 보아 그 위에서 한 번 질내사정한 것까지는 확실.

자연스러운 타임라인을 생각해보면 플라스크를 떨어뜨린 이후, 사정했을 것이다.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건 이것뿐.

더 이상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괜찮겠지.

제발.

"그게, 책상 위의 플라스크를 떨어뜨린 뒤부터, 한 번 사정하기까지… 기억납니다."

"……."

침묵.

한숨.

그리고.

"우으으…."

"……?"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즈가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하필 그 부분을…. 그럼, 다 기억하고 있다는 거 아냐…."

"……?"

"네가 깨물고 쥐어짜는 거, 사실 기분 좋다고…."

"……."

"…자지, 끝까지 박아 넣는 거, 솔직하게 좋다고 대답한 거랑…."

"……."

"순순히 혀 내밀고 키스하면서 네 목에다가 팔 감았던 거…."

"……."

"그리고 '친구'니까 네가 좋아하는 거, 나도 좋아해 보겠다고 한 것까지…."

"……."

.

.

.

.

.

내가 지금, 도대체 뭘 들은 거지.

간신히 눈만 깜빡이며 유즈의 말을 되뇌고 있자, 숙이고 있던 유즈의 고개가 천천히 제자리를 되찾았다.

"…됐어. 부끄럽지만, 어차피 전부 네 앞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네, 네?"

저걸 다?

내 앞에서 한다고?

이야기를 못 따라가겠다.

그러니까,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라는 뜻인가?

나는 그냥 기억을 못 할 뿐이고?

친구는 도대체 무슨 소리지?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이야기의 앞뒤가 전혀 이어지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리스가 여기서 나한테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랬었는데."

끼익, 맞은편에 앉아있던 유즈가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대로 의자를 질질 끌어 내 옆으로 다가온다.

아까 잔뜩 치솟았던 성욕 탓일까.

어느새 내 시선은 유즈의 젖가슴을 좇고 있었다.

펑퍼짐한 로브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가슴 끝부터 밑가슴 쪽이 팽팽히 당기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

시발.

이럴때가 아닌데.

나는 일단 안 본 척 손바닥으로 꾹꾹 눈을 짓누른 뒤, 조심스레 유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

유즈는, 웃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처음 보았다.

유즈의 웃는 얼굴.

"루크."

"…그, 유즈 님. 제가 가슴을 본 건 그게…."

"봐. 마음껏. 난 상관없어."

"……."

성녀때문이라는 변명은 유즈의 말에 가로막혀 목구멍 뒤로 사라졌다.

마음껏 보라니.

무엇을.

…저 가슴을?

의자를 끌고 온 유즈는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앉은 뒤, 눈동자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가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반응이 없자 또 한 번 반복했다.

마치 밑을 보라는 듯이.

하지만 유즈의 눈동자 밑에 있는 것은, 그러니까….

"……."

방금까지 책상 위에서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던 유즈의 손이 내 손을 낚아챘다.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주무르든, 짓이기든, 빨든, 뭐, 자지를 끼워 넣어 침을 뱉고 퍽퍽 박아대든."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공용어가 맞긴한가.

내가 좋아하니까 귀족의 몸을 마음대로 써도 괜찮다니.

도대체 왜 그러면서 내 손을 자기 가슴에다가 살풋 가져다 대는 것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즈의 얼굴을 바라보자, 유즈는 새빨갛게 물든 뺨 위에 또다시 자그마한 미소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해줄 테니까…. 그 대신."

"……?"

"나… 아니, 그…."

예전에 이리스가 어떻게 했더라.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온 직후.

"저랑… 친구가… 되어주세요."

그 목소리에는,

이해하지 못할 단어가 하나,

이해하지 못할 존댓말이 하나 끼어있어서.

도저히 이 대화를 따라갈 방법이 없어서.

나는.

"네?"

바보같이 되묻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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