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살짝 혀를 깨물어보았다.
앞니 사이에 짓눌린 혀끝이 아릿한 통증을 호소했다.
불행하게도, 꿈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 한밤중의 도서관 1층 책상 어딘가에 앉아 유즈를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즈가 내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다니.
화자가 그 '유즈 베르나'인건 잠시 제쳐놓더라도, 말의 앞뒤 관계가 너무나도 엉성했다.
내가 유즈를 강간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부디 친구가 되어달라?
이 정도면 성녀의 차에 성욕 증진 효과뿐만 아니라 환각, 환청 효과까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앞니에 짓눌려있던 혀를 그대로 닦아내듯 송곳니까지 끌어올린 뒤, 마찬가지로 꾸욱 그것을 깨물어보았다.
조금 전보다 날카롭고, 뾰족하다.
긁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유즈의 젖가슴을 조심스레 쥐고 있었다.
불행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 몰라?"
"그…. 친구가 뭔진 저도 잘 알지만…."
조욯히 있던 내가 답답했는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유즈.
혀 끝에서 시작된 고통은 오래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졌다.
애당초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문 것은 아니지 않던가.
손바닥을 꽉 채우는 커다란 물체가 워낙에 자기주장을 해오니, 굳이 혀를 깨무는데에 열심히 힘을 들일 필요까진 없었다.
대충 부드럽다든가, 말캉하다든가, 유즈의 가슴을 몰래 훔쳐볼 때마다 이런저런 상상을 해왔다만,
그런 것보단 위험한 감촉이라는 표현이 제일 잘 어울릴 것 같다.
"알면서 왜 그래?"
"왜 그러냐고 물으신들…."
너랑 내가 어떻게 친구 사이가 돼.
그것보단 주종관계가 훨씬 더 가까울 텐데.
친구의 뜻을 모르는 건 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이어진 유즈의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이거, 좋아하잖아."
"……."
유즈의 젖가슴.
좋아는 한다.
특이취향이 아니고서야 이걸 싫어하는 남자가 있기나 할까.
단지 입 밖으로 함부로 내뱉을 수 없을 뿐이다.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다.
"연구동에 찾아올 때마다 만져보고 싶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고, 결국 이 안에다 침을 뱉고 박아댈 만큼 좋아하잖아."
"…그, 그…랬었죠. 네."
내가 단단히 미쳤었구나.
아까 잘못 들었나 했더니, 강제로 질내사정만 한 게 아니라 그 와중에 파이즈리까지 받아낸 모양이다.
전자와 달리 임신할 위험은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까짓게 함부로 귀족의 가슴을 가지고 놀아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판결문 최상단에 쓰일 죄목이 하나 더 늘었다.
"루크. 마, 만약 또 하고 싶으면…."
그리 말하며 로브에 가려진 가슴골을 손으로 꾹꾹 짓누르는 유즈.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그것을 따라갔다가,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유즈의 눈으로 되돌아갔다.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사하게 웃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내 무례한 반응이 기쁘다는 듯 조그마한 미소를 띠었다.
나쁜 짓만 저지르던 사람이 한 번 착한 일을 하면 다르게 보인다고 하던가.
피곤한 표정.
벌레 씹은 표정.
숨쉬기도 귀찮은 표정.
나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실험체 1 따위로 보는 차가운 표정.
그런 평소의 표정 대신 보여주는 저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쓸데없이 귀여웠다.
"친구. 우리가 친구 사이만 된다면…. 언제든지 하게 해줄게. 가슴에 끼우는 거…."
"……."
또 나왔다.
친구.
친구, 친구, 친구.
아무리 혀 위에서 굴려보아도 내가 아는 뜻 말고 다른 뜻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친한 사람'이지 않은가?
이외의 뜻은 생각나지 않았다.
유즈와 내가 친한가?
아니.
친해질 여지라도 있는가?
전혀.
그런데 유즈는 내게 자신의 젖가슴을 만지게 허락해줄 테니 친구가 되어달라 부탁하는가?
…네.
어쩌다 이런 일이 되어버린 걸까.
도대체 뭘 어쩌면, 항상 딱딱하고 싸늘한 말을 뱉던 유즈가 제 가슴을 만져도 괜찮다 허락해주며 친구가 되어달라 부탁하는 걸까.
상상력을 총동원해봤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기억에 없는 강간.
무책임한 질내사정.
친구가 되어주세요.
도저히 묶을 수 없는 세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추리하란 말인가.
미칠 노릇이었다.
유즈가 아니라, 유즈와 외형만 쏙 빼닮은 누군가가 눈앞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그, 유즈 님?"
"응."
"친구…라고 하셨죠."
"……응."
유즈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세 번씩이나.
친구.
그 짜리몽땅한 두 글자 단어에 가슴을 내어줄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사실 '네. 저희 지금부터 친구 하죠. 바로 말 놓을까요?' 라고 대답하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사은품으로 젖가슴까지 만지게 해주겠다는데, 내가 마다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좋을까.
싸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있었던 의문을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저 젖가슴에 폭 파묻혀 매달리기엔,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 편이라 문제였다.
"그게… 저보다는 유즈님과 어울리는 신분을 가진 다른 분들이 더 좋지 않을까요?"
"…안 돼."
"아카데미에 각국의 황녀님도 두 분씩이나 계시고, 성녀님이나 다른 분들도 계신데…. 전 유즈 님과 어울리기엔 너무 하찮은…."
"그래서 너랑 친해져야, 아니, 친해지고 싶어."
유즈는 내 손을 조금 더 강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하찮다는 걸 부정해주진 않는구나.
뭐, 사실이긴 해서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즈의 말에,
정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는…. 친구가 없을 테니까."
"……."
욕인가?
아냐.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욕처럼 들리긴 하지만, 그런 의미로 내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아냐. 유즈니까 진짜 말 그대로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갈팡질팡 튀는 생각 속 '저 그래도 카엔 님이랑 친합니다.' 따위의 볼품없는 반박을 내뱉을 찰나,
유즈가 말을 이었다.
"네 첫 친구. 내가 되어줄게."
우리 둘 만의 목소리가 떠듬떠듬 퍼져 나가던 도서관 속.
첫 친구.
조금은 기다래진 세 글자 단어가, 마지막으로 퍼져 나갔다.
"힘들 때 의지가 되어주고, 같이 놀기도 하고, 맛있는 걸 나눠 먹기도 하고, 절대 갑자기 멀리 떠나지 않는데다가, 네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해주는…."
"……."
무언가 많다.
그냥 내 착각일 수도 있는데.
'절대 갑자기 멀리 떠나지 않는데다가'에 힘을 꾹 줘서 말한 듯한 느낌이었다.
"…너랑 '취미'가 비슷한 친구. 되어줄게."
어딘가 고백처럼 들리는 목소리 이후,
정작 말을 뱉은 당사자인 유즈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고개를 살짝 숙여 달 그림자에 얼굴을 숨겼다.
애초에 친구가 되는 데에 이런 노력을 쏟아부을 필요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귀족뿐인 아카데미에서 홀로 평민인 내가 불쌍해서 이렇게라도 친구가 되어주려 하는걸까.
아니면, 그냥 친구를 만드는 게 서툴러서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던 걸까.
여전히 제 가슴에다가 내 손을 끌어당기는 유즈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유즈는 사실 나랑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서툴러서 잘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라고 대충 넘겨 짚을 수 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조금 복잡해진다.
내가 기억을 잃은 채 유즈에게 여러 번 질내사정 했음에도, 그 부분에 대해선 딱히 지적이 없었던 이유라든가.
애시당초 왜 연구동에서의 1시간이 모조리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는가, 라든가.
어째서 유즈는 내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하자 오히려 당황했는가, 라든가.
끊어진 기억 그다음, 유즈는 왜 내 손가락으로 열심히 자위하고 있었던 걸까, 라든가.
이제서야 조심스레 의문을 종합해보면, '유즈는 내게 기억을 잃는 약을 먹이고 1시간 동안 나를 꼬드겨 질내사정 섹스를 했다.' 정도의 결론이 튀어나온다.
여기에 유즈가 말했던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라는 말을 곁들이면,
'유즈는 나 몰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싶어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 라는 결론이 튀어나온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나랑 친구가 되기 위해서.
다들 어느 정도의 신분이 있지만, 나는 고작 평민일 뿐이니까.
가장 다가가기 쉬워서.
이 추리가 맞았는지,
아예 처음부터 틀렸는지,
일부만 맞았는지,
그런 건 모른다.
하지만 몇 가지만은 확실했다.
유즈는 이성인 내게 제 젖가슴을 만져도 좋다고 허락할 정도로,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
그렇기때문에.
지금까지 보여줬던 이상한 행동 모두가, 전부 나와 친구가 되기 위해 저지른 일일 확률이 높다는 것.
마지막으로.
…오히려 내가 방구석 엘프인 유즈의 첫 친구인 것 같다는 점까지.
"유즈 님."
이리스와는 친구였을까? 아니면 연구 파트너?
저 성격에 친구는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이름을 부르자 유즈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달 그림자가 천천히 벗겨졌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눈동자도 어울렸지만, 내 눈엔 이쪽의 진회색 눈동자가 조금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게, 친구… 말인데요."
말 끝에 망설임이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했던 생각이 모조리 틀렸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중간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결론 자체는 '유즈가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니까.
그냥….
지금까지 보아온 유즈의 차가운 모습이, 사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렀기 때문이라면.
지금까지 속으로 욕하며 당해왔던 유즈의 연구가, 어떻게든 나와 친해지기 위한 '기억상실제'를 만드는 연구였다면.
"절대, 절대 유즈 님의 가슴을 만지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
그 동안의 오해, 그리고 유즈의 노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조금, 미안해져서.
"친구…."
"……."
그리고 나까짓 평민이 유즈에게 허락, 혹은 거절의 단어를 내뱉어도 괜찮을까 싶어서.
"…해도 될까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건넸다.
"…응."
유즈의 대답은 생각보다 건조했다.
막 과격한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저기, 가슴… 마음대로 만져도 괜찮아. 친구잖아."
"다, 다음에 만질게요. 그보다 오늘은 늦었으니 빨리 씻으시는게…."
입꼬리만큼은, 본 것 중 가장 예쁘게 휘어있었던 것 같다.
****
"…어떻게 되었으려나……."
친구는 나 하나.
유즈가 스스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확률은 0.
스스로 '친구 사귀는 법' 같은 느낌의 책을 꺼내오는 것까진 봤고….
갑작스럽게 지상으로 내려올 줄은 몰랐지만, 뭐.
이건 이것대로 애태우는 맛이 있으니까.
항상 내 취향대로 조교하기만 하면 몇 번 못쓰고 금방 질릴지도 모르지.
가끔은 집착 당하는 것도 뭐… 괜찮을지도.
"돌아갈 때쯤엔…."
처음 보여주던 그 싸늘한 모습 대신 보고 싶었다고 잔뜩 달라붙지 않을까.
살짝 거리를 둬서 더 애태울까? 뭘 잘못했냐고 물어볼 때까지?
아니면 그 동안 쌓인 집착을 이용해 당장 내 취향대로 조교를 시작할까?
"흐흥…."
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