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이른 아침.
알람 소리에 맞춰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는, 구석에 곰팡이가 핀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알람 소리를 음미했다.
우여곡절 끝에 유즈와 친구가 되었다.
아니, 음, 친구.
친구라고 해도 되나.
이게 평범한 친구냐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원한다면 언제든지 가슴을 만질 수 있는 사이」 정도가 되겠다.
내가 알던 친구와는 거리가 좀 멀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유즈가 먼저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는데.
"후…."
나는 손바닥으로 알람 시계를 끈 뒤, 대충 이불을 걷으며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잃어버린 1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보니, 허리가 좀 찌뿌등하다.
잠깐 가벼운 스트레칭을 해 몸을 풀어주고는 수건 하나를 챙겨 들었다.
─쏴아아아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자 어젯밤의 기억이 수증기처럼 차올랐다.
그러니까, 어젯밤 도서관에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의 기억이다.
Q. 혹시 지금까지 제가 먹었던 약이 기억을 잃는 약이었나요?
A. 맞아. 사실… 그 틈에 네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내려고 그랬어. 다 들켜버렸지만. …미안해.
기억이 있는 척해서 알게 된 진실 하나.
Q. 그러면 저번에 저한테 루크 '님'이라고 했던 건, 혹시….
A. …나, 남자들은 그런 걸 좋아한다고 책에 쓰여 있길래….
지금까지 의미불명이었던 존댓말의 정체 하나.
Q. 성욕을 증진시키는… 그런 효과는 없는 거죠?
A. …? 전혀…?
유즈는 발정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정보 하나.
Q. 저…. 제가 깨뜨린 플라스크는….
A. 괜찮아. 나 돈 많아. 아, 그래. 우리 친구니까, 네 학비 내가 내줄까?
A. 그건 너무 거금이라…. 조금 부담스럽네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운 전액 장학금 하나.
Q. 질내사정…. 했던건 어쩌죠.
A. ……매일매일 한 번씩 해도, 가능성이 생기기까지 최소한 5년쯤은 걸린대.
Q. 네?
A. …임신. 안 한다고.
Q. …….
Q. ……또 해보고 싶어?
─쏴아아
힘차게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 옆.
조용히 크기를 키우고 있던 자지에 비누칠을 한 나는, 입속에 칫솔을 집어넣었다.
유즈와 오해를 푼 건 좋다.
유즈는 예상대로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렀을 뿐이고,
나는 어찌 되었건 유즈와 그렇고 그런, 남들에게 밝히기 부끄러운 관계를 맺게 되었으니까.
다만, 한가지 후회되는 것은.
돈.
자고 일어나니 그제서야 유즈가 제안했던 전액 장학금이 눈에 아른거렸다.
솔직히 좀 아쉽긴 하다.
괜한 자존심이었던 걸까.
좋다고 넙죽 받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전 시간을 꽉 채운 일정들을 떠올리던 내 입에서 내뱉어진 결론은.
"하…."
한숨.
그리고 새하얀 양치 거품이었다.
치카치카치카.
입속 가득 차오른 거품을 뱉어낸 후, 입을 헹궜다.
귀족에게 괜한 빚을 만들어두는 것보단 차라리 이편이 맘편하고 좋다.
나중에 그 빚이 어떻게 되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가능하다면 깨뜨렸던 플라스크도 다 갚아나갈 생각이다.
물론 가격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싸지만 않다면 말이다.
요령 피우지 말고 건실하게 살자.
"오늘은…."
샤워를 마친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으며 캘린더를 바라보았다.
딱히 어려운 일정은 없었다.
가장 빈번히 찾아오는 의뢰인 개인실 청소, 그리고 연구동 청소가 전부였다.
여기에 어제 갑작스레 추가된 '유즈의 연구동 뒷정리'까지 더하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일정이 다 끝나면 성녀를 찾아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캐물어 봐야겠다.
야설을 읽으며 나보고 작가님이라 장난치던 성녀가, 내게 발정제를 먹일만한 이유.
내 머리론 '그녀가 범인이라서' 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
하지만 한편으론 성녀가 왜 그런 소설을 썼는지 의뭉스럽기도 했다.
야설 속에서 주로 다루던 내용은, 여주인공이 일부러 나를 업신여기고 참다 참다 폭발한 내가 그녀를 강간하며 벌어지는 일이지 않았던가.
성녀와 나 사이의 관계는 그것과 사뭇 달랐다.
자꾸 성녀가 야한 주제로 말을 걸어오다 보니 곤란했을 뿐, 업신여김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카엔, 유즈, 백야, 이리스, 세른.
이 다섯 명은 각자 괴롭힘의 강도는 다르더라도 최소한 '불쾌함' 이란 게 있었으나,
성녀는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나랑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던데.'
이미 3번의 오해를 경험한 나였다.
지금 성녀를 범인이라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오해일 수 있다.
생각이 조금 깊어졌다.
발정제의 이유도 사실 그리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정력에 좋은 음식이라 하면 일단 '몸에 좋다.' 라고들 하니까.
아마 그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꾸준히 차를 우려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물론 방 안에서 의미모를 이상한 소리를 뱉은 것과, 침대 위에 자그마한 물자국이 있던 것은…. 음….
…진실은 오직 성녀만 알겠지만.
그래도 어째 성녀는 범인이 아니라는 생각에 무게추가 쏠렸다.
차라리 지금 아카데미에 없는 황녀 중 누군가가 썼다는 게 더 그럴싸했다.
이리스라든가,
세른이라든가.
'낮에 가서 물어보자.'
어젯밤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유즈의 연구동을 청소해야 하긴 하지만,
뭐, 오늘 일정이 그리 바쁘진 않으니 말이다.
점심시간에 잠깐 들리는 것 정돈 충분히 가능하다.
개인실 104호, 307호, 섬광 마법 학회 연구동….
오늘 청소해야 할 곳을 하나하나 외워가던 와중.
"…?"
익숙한 이름이 조그맣게 캘린더에 끄적여져 있었다.
악필인지라 알아보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글씨의 주인공은 '야크툰 폴리네어' 교수였다.
각자의 마력 속성, 그 이전의 원소 마법 자체의 구조를 연구하는 교수… 라는 건 딱히 중요치 않고,
내게 자주 청소 의뢰를 맡기는 고마운 분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긴 며칠 전에 찾아갔었던 것 같은데."
시끄럽게 실실 웃지 말라며 뒤통수에 종이 뭉치를 날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새 또 청소할 게 생긴 걸까?
뭐, 나중에 찾아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청소도구 몇 개를 챙겨 곧장 북쪽 구역으로 향했다.
****
오늘따라 아침 햇살이 유독 따스했다.
좋게 말하면, 쌀쌀하지 않아 딱 산책하기 좋은 날씨고.
나쁘게 말하면, 햇살이 너무 눈부셨다.
그런데 내 주제에 무슨 산책을 논하겠는가?
눈부시니까 불편할 뿐이었다.
이마 앞에 손을 두어 차양막을 만든 나는 이런저런 청소 도구들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잠시 뒤 유즈의 연구동 앞에 도착한 후엔 제대로 마스크를 코 위에 얹으며 연구동에 발을 들였다.
"아."
그리고는 다시 마스크를 내리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연구동 벽을 수놓은 푸른 불꽃 때문이었다.
유즈가 지금 연구동에 있다는 뜻이니까.
지난밤 나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더니, 집이 아닌 연구동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그러면 잠은 도대체 언제 자는 거야.
어제 악몽을 꾸며 훌쩍이고 있던 게, 사실 자는 시간이라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던 걸까?
이런저런 궁금증과 함께 걸음을 옮기자 1층 책상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시약 몇 병이 눈에 들어왔다.
색은 분홍색.
향은 꽤나 달콤하다.
어디선가 맡아본 꽃향기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 꽃 이름은 어머니나 잘 알지, 내가 아는 건 아버지께 배운 약초 몇 가지의 이름이 전부라 무슨 꽃 향기인진 잘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내가 마셨던 시약도 분홍색이 아니었나.
하지만 굳이 또 내 기억을 지울 필욘 없을 텐데.
향이 다른 걸로 보아 아예 다른 약인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 쓸 약이 아닌가 보다.
가볍게 결론을 내린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달큰한 향기를 음미하며 계단을 오른 나를 맞이하는 것은.
"……왔어?"
평소와 같은 목소리.
평소와 다른 어투.
평소와 조금 다른 어수선한 배경.
그 한복판에 앉아 무언가를 차곡차곡 기록하고 있는 유즈였다.
마법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유즈의 오른손 옆에 놓인 두툼한 종이 뭉치를 보니 내 손이 다 저려왔다.
"네. 안 계실 줄 알았는데, 계셨네요."
"습관이라서. 오랫동안 깨어있는 거."
그렇게 말한 유즈는 펜을 놓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볼 수 있었던 어색하고 옅은 미소는 없다.
어젯밤 마주 보았던 진회색의 눈동자도, 타오르는 듯한 새하얀 마력에 자취를 감추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꿈이었을까.
그런 생각은 왼쪽 책상 밑에 널브러진 유리 조각과 누런 자국을 보자 금세 사라졌다.
참 많이도 쌌다.
"그, 일단 유즈 님께 방해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청소해볼게요. 그리고…."
"유즈."
"네?"
"유. 즈."
또박또박 한 글자씩 잘라서 내뱉는 유즈.
이윽고 그녀는 종이 뭉치 탓에 보이지 않던 책 한 권을 내게 보여주었다.
『친구 만드는 법.』
어째 굉장히 직설적인 책 제목이 중앙에 떡하니 박혀있었다.
"이 책에서 그랬어. 친구끼리는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아…."
"우리, 친구잖아."
"…어, 음. 네. 친구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건 서로 신분이 비슷할 때나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이런 말을 꺼내봐야 지금의 유즈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턱까지 내린 마스크를 쥔 채 한숨을 삼켰다.
분명 어젯밤 '먼저 말 놓을까요?' 같은 말을 하는 자신을 상상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즈는 그렇게 가볍게 말을 놓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당장 이미 잔뜩 반말로 부르며 박아댄 카엔도 평상시엔 카엔 님, 카엔 님,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유즈라고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말해. 유즈, 라고."
"……저기,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나 필요한데?"
"그게… 일단 지금 당장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냥 어제 섹…스 할 때처럼 말하면 되잖아. 그땐 허락하지 않아도 쉽게 하던데."
…아, 맞다.
저게 남아있었구나.
유즈는 아직 내가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유즈가 입에 담고 있는 것도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뜻.
'쉽게 하던데' 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아마 기억을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곧장 말을 놓았던 모양이다.
참…. 여러모로 대단한 새끼다.
"……."
"빨리 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러면 할 수밖에 없잖아.
"유…. 유………."
"……."
…모르겠다.
…친구니까.
"……유… 즈."
"루크. 루크. 루크."
간신히 내뱉은 나.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레 내뱉는 유즈.
서로의 이름이 교차되고, 내 이름이 몇 번 더 일방적으로 귀에 닿아왔다.
"루크. 루크. …루크."
그런데 어쩐지 그 목소리엔 갈수록 불만이 쌓여가는 것 같아서.
유약한 소시민일 뿐이었던 나는.
"저기, 이제 청소를…."
"한 번 더."
"……유…즈."
"…한 번 더."
"……유즈…."
"…딱 한 번만 더."
"그, 이 정도면 됐지 않습니까?"
"…해주면 안 돼?"
"……유즈."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 뒤 과장된 몸짓으로 마스크를 올려썼다.
"루크."
"네. 유즈 님."
"유즈."
"…유즈."
"내가 청소 도와줄까? 친구로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닦아내고 유리 조각들을 쓸어내는 일이라 도움받기 어려워서요."
"고작 빗자루 쓰는 게 뭐가 어렵다고……."
"유리 조각이 있다 보니……."
햇살이 참 따스한 오전이었다.
암막 커튼이 잔뜩 쳐져 있는데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바보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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