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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뵈어 반갑습니다. 이슈타르 양. 부족한 몸이지마는 어쩌다 보니 교황의 자리를 맡고 있는 노인네입니다."
퍽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위에 달려있는 얼굴은 목소리와 살짝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깡 마른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 그래도 머리숱은 좀 많다.
용인 특유의 뿔도 나름 멋있고.
자신을 '교황'이라 자칭하는 노인의 얼굴을 처음 본 이슈타르의 감상평이었다.
"다들 보는 눈이 참 없나 봅니다. 이렇게 늙어서야, 당장 내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그렇게 덧붙인 남자는 재미있는 농담이었다는 듯 껄껄 웃기 시작했다.
이슈타르는 할 말이 참 많았지만, 함부로 입을 열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침묵을 고수했다.
교황의 새하얗게 새어버린 백발이 가볍게 나부꼈다.
양옆에 같이 따라온 새하얀 옷을 입은 남자 여덟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도 재미없나 보다.
입꼬리가 꿈쩍도 안 한다.
"일단, 제가 성국에서 직접 부친 편지는 잘 받으셨는지?"
"네. 성녀… 후보라고…."
이슈타르는 머뭇머뭇 대답했다.
성녀.
천신의 선택을 받아 잠재되어있던 막대한 신성력을 일으킬 수 있는 여인.
그 크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라고, 편지를 받은 직후 며칠간 공부한 덕에 대강 알고 있긴 했으나.
"…잘 모르겠어요."
이슈타르는 왜 자신이 선택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천신님을 딱히…."
믿고는 있다.
기록된 문헌도 많고, 당장 천신께 간택 받은 전대 성녀님또한 일평생 아픈 이들을 돌보다 일선에서 물러나시지 않으셨던가.
하지만, 숭배하진 않는다.
종교인들의 그것에 비하면, 이슈타르의 믿음은 무척이나 유약했다.
사실상 남남이라 생각했다.
옆 동네 가문에서 키우는 귀여운 강아지 뽀삐보다 관심 없었다.
이럴거면 차라리 신실한 신도 하나를 성녀로 키우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어린 이슈타르는 그 생각에 커다란 모순이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교황이 굳이 자신을 찾아올 일도 없었다는 것을.
"괜찮습니다. 이슈타르 양만 그런 게 아니니까요. 제가 알기론 전전전대 성녀님도 그러셨어요. 천신님의 딸이 되실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성녀 후보가 되기엔…."
"믿게 될 겁니다."
"……."
믿고는 있어요, 라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진중해진 목소리에 이슈타르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온 교황의 앞에서 이슈타르는 아직 어린 소녀일 뿐이었으니까.
아예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교황은 그렇게 알아들은 모양이다.
허허실실 미소를 짓던 얼굴이 살짝 굳어있었다.
"다른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요? 혹시 성국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아십니까?"
"…포탈을 이용하더라도 일주일 조금 넘게 걸린다고 알고 있어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 이야기가 더 빨라지죠."
"……?"
"생각해 보세요. 이슈타르 양. 제가 과연 그렇게 멀리 있는 국가의…."
교황의 발이 반 발자국 가까워진다.
이슈타르의 발이 반걸음 뒤로 물러난다.
"어느 한 작은 지방의, 관리 감독을 담당하고 있는."
반 발자국 더 가까이.
반 발자국 더 뒤로.
"어느 조용한 백작가의, 34일 전 10살 생일 축하를 받은."
더 이상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슈타르는 반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독서가 취미인, 다과를 즐기고 가지를 싫어하며 주방장의 음식보다는 7살 적 한 번 먹어보았던 아버지의 살짝 탄 생선구이를 더 좋아하는 영애를."
"……."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당신을 콕, 집어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거고?"
"……."
"아니면, 천신께서 당신을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습니까?"
교황은 살짝 허리를 숙여 이슈타르와 시선을 맞춰주었다.
변함없이 인자한 입매. 그 위의 싸늘한 시선이 이슈타르의 눈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이슈타르 양."
"…네, 네. 교황님."
"아. 절 지칭할 땐 교황 성하가 대부분이지만, 뭐…. 상관없습니다. 편한 대로 불러도 괜찮아요. 강요하진 않습니다. 교황 할아버지도 좋습니다. 상스러운 욕만 아니면 전부 허락하겠습니다."
"……."
"성녀가 되는 순간 천신님의, 저희의 얼굴은 당신이니."
"……."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성녀님."
내민 손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
단기간에 교리를 외우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얼어붙지 않고 자연스레 미소 짓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끔찍한 부상을 보고서도 구역질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세상엔, 생각보다 아픈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녀님!"
따스한 오후.
성녀가 환자들을 돌보는 것에 지쳐 잠시 정원에 산책 나왔을 무렵.
어린아이 몇 명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와 함께 성녀의 치맛자락에 안겨들었다.
이름은 모른다.
외울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어차피 잠깐 치료실에 들렀다가 떠나갈 아이들이다.
정을 줄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왜 이곳을 찾아온 아이들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나는 친구와 함께 용기 테스트라며 저택 3층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분질러진 머저리.
하나는 어머니의 생신을 기념해 직접 주방장의 도움을 받아 요리해보려다가 기름에 데인 효녀.
나머지 하나는 머저리 곁에서 같이 뛰어내린 머저리 2호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린아이 특유의 쨍한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감사인사는 됐으니, 빨리 너희 집으로 돌아가기나 하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성녀'가 된지 어언 11년.
그 동안 어린아이를 좋아하게 될 순 없었지만, 속마음을 숨기는 것 정돈 간단했다.
"크게 다칠 뻔 했으니까, 앞으로 요리할 땐 조심해야 해요."
"네! 다음엔 꼭 답답하더라도 앞치마랑 장갑 쓸 거에요!"
"다시는 3층에서 뛰어내리고 그러면 안 돼요."
"조금 더 자라서 다시 도전해볼게요!"
나이가 들어 귀가 꽉 막힌 노친네를 설득하기.
어린아이가 잘 알아듣도록 조리 있게 말하기.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싫어하는 분야다.
성녀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곤, 신나서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기까지 경주라며 뜀박질하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깔끔한 옷을 차려입은 노신사 몇이 부랴부랴 속도를 맞췄다.
하하호호 웃는 아이들의 발걸음 끝엔 저 멀리, 삼두마차 2대와 사두마차 1대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두콩처럼 조그맣게 변한 아이들이 서로 손을 흔들더니 자연스럽게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이윽고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성녀를 찾아오는 사람 중 가난한 아이는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녀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 중 가난한 아이는 없는 것이겠지.
빙하 색 눈동자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녀는, 천천히 치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릴땐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린다는 것만으로 기분 좋긴 했지만, 최근 들어 어쩐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성녀가 되어 전 세계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어요! 따위의 거창한 각오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왕 성녀가 되었으니 아픈 사람들이 찾아오면 최대한 치료해볼게요. 정도의 마음가짐은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엔, 생각보다 아픈 이들이 많았다.
성녀가 볼 수 있는 환자는 고귀한 핏줄의 사람들뿐이었다.
평범한 핏줄의 환자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마주하지 못했다.
그나마 어린아이들을 치료할 땐 이런 생각이 덜했으나.
가끔.
"이 새벽에 저를 만나야 할 급한 환자라는 게…."
아니, 생각보다 자주.
"……22살 차이 나는 백작 영애에게 술을 먹이고 강간하려다 그곳을 물어뜯긴…."
"크흠, 부끄, 럽네요. 성녀님. 이 일은 꼭 비밀로…."
"그럴 수… 있죠. 페르마 공작님. 네."
"아. 혹시 상처… 부위에… 손이, 닿아야, 한다든가…?"
"그럴 필요. 없습니다."
"…'헌금'은 꼭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듯 정말 아픈 사람은 성녀를 찾아오지 못하고.
그놈의 천신을 숭배한다는 교회가 금전적인 이유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고 있으려면.
"…그 영애는…."
"아, 뭐…. 네."
역겹긴 했다.
성녀,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
아침부터 지나가는 신도들에게 '성녀님 잠깐이라도 쉬시는 게….' 라는 말을 7번쯤 듣게 된 어느 날 오후.
정원에 앉아 내뱉는 숨이 모조리 한숨으로 바뀌고만 어느 날 오후.
지난밤 가로세로가 똑같은 귀족의 성욕 덩어리 쓰레기를 치료해준 게 떠올라 회의감이 가득하던 어느 날 오후.
성녀가 내뱉는 숨결에 잠시 푸른 빛이 우아하게 스며들었다.
아주, 뜬금없이.
"……."
다른 사람이었으면 몇 날 며칠 동안 축하받을 일이었을진대. 어째서 나일까.
성녀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때려치고 싶다고 하니까, 천신이라는 놈이 드디어 소원을 이루어 준걸까?
이대로 마법이나 배우러 가라고?
…하지만 그랬다간 지금 느끼고 있는 역겨운 감정들을 모조리 다음 성녀에게 떠넘기는 꼴이잖아.
"하…. 이래서 저번 성녀님이 꾸역꾸역 환갑까지…."
어쩐지 역대 성녀들 은퇴시기가 굉장히 늦더라.
한순간의 실수로 순결을 잃어 강제로 성녀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성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뱉었다.
한숨이 습관이 되어 큰일이다.
"…잠깐만 쉬는 것 정도는…."
아직 정말 때려치울 생각은 없으나, 이대로면 분명 불쾌함이 책임감을 넘어서는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실 교회가 망하건, 말건, 애초에 신도가 아니었으니 별 상관없었다.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냉정히 말해 새로운 밥그릇을 찾은 거나 다름없다.
약초꾼과 평범한 치료사들의 수입도 늘어날 게 분명하니까 손해를 보는 건 교회뿐, 일석 삼조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하지 않으려면 휴식시간이 필요했다.
딱 1년 정도는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성녀는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났다.
****
처음엔 곤란하다며 고개를 젓던 교황도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어젯밤 있었던 역겨운 일을 전해 들은게 확실했다.
'1년. 편히 쉬다가 오세요.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1년만 공부해 보다가 적성에 맞지 않으면 돌아오겠다는 성녀의 말. 그 이면에 숨은 뜻을 제대로 알아먹은 모양이다.
공부에 시간 제한을 둔다는 것은 곧 1년만 휴가를 보내달란 뜻이나 마찬가지 였으니까.
처음이자 마지막 휴가를 얻은 성녀는 급히 지어진 좁다란 교회 안에서 그 동안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지냈다.
기왕 아카데미에 왔으니 정말 마법 공부도 해보려 했다.
곧 제자리로 돌아갈테니 부질없는 행동이란 걸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지만 말이다.
이후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와 읽기도 하고.
정원사들의 손을 거친 아름다운 정원이 떠올라 살짝 흉내 내보려 하기도 하고.
사용인들이 어떻게 차를 달였더라, 스스로 하나하나 연구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쾅! 쾅!
"……?"
여기저기 부러진 채 신음 소리를 흘리는 남자 하나가 귀여운 수인과 함께 교회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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