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애가 분명 소꿉친구라는 설정이었지.’
양갈래 머리를 앞으로 넘긴 은혜를 보며 정우는 그녀에게 할 말을 찾아내었다. 어렸을 때는 키도 작고 안경도 쓰고 다녔다는 설정.
키는 여전히 작았지만, 안경은 벗어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응?”
“성실초등학교 3학년 1반. 이은혜 아니야? 안경 쓰고 다녔잖아.”
“기, 기억나?”
그녀는 뭐가 그리 기쁜지 정우의 말을 듣고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잘 넘겼다고 자화자찬했다.
“기억나지. 넌 나 기억 못 해?”
“아, 아니. 설마 기억해줄 줄 모르고…….”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응…….”
정우가 은혜의 호감도 작업을 마치고 친구가 됐을 무렵, 담임 선생님이 앞에서 아침조례를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조례를 하는 건 수 년만이라, 정우도 살짝 기대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말에 집중했다.
“올해 1학년을 맡게 된 신주희라고 한다. 담당은 수학이고, 우리반이 수학만큼은 일등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녀도 히로인이었다. 단일 엔딩은 학생과의 스캔들로 사회적 죽음을 당하고 그대로 손목을 긋고 자살하는 히로인.
선생님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반 아이들의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앉은 자리 순서대로 맨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차례대로 일어나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대부분 게임에도 나오지 않았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기소개였지만, 기억에 남는 학생들은 몇몇 있었다.
“이은혜라고 해. 음, 나, 나랑 친구가 되면…… 그 은혜를 잊지 않을……, 어. 음. 여기까지입니다.”
자기 이름으로 드립을 치려다 부끄러움에 주저앉은 짝궁이나.
“마리.”
성도 말하지 않고, 이름만 딱 말한 뒤 자리에 앉는 금발 일진이나.
“소우림이야. 잘 부탁해.”
이름에 걸맞게 젖소마냥 커다란 폭유를 가진 학생까지.
모두 정우의 기억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 히로인이었다. 그들 모두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소녀지만, 각자 엔딩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오직 하렘만이 그녀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자, 이걸로 자기소개 시간은 끝났고, 점심시간 되면 알아서 밥 먹으러 가라. 식당이 어딘지는 알고 있지? 오후에는 수업 있으니까 교과서 준비하고.”
잔혹한 고등학교는 입학 첫날부터 수업을 실시했다. 그 말에 미처 교과서를 챙겨 오지 않은 애들이 당황했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정우는 교과서를 챙겨왔다.
‘설마 공부를 다시 할 줄이야.’
게임 속에선 없던 기능이라, 정우도 살짝 당황하긴 했다. 그만큼 자신이 이 세상에 몰입하게 하기 위한 장치겠지.
* * *
수업 종이 울리고, 애들은 어색 어색한 티를 벗지 못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그 짧은 시간에 친해진 애들은 친해진 애들끼리 식당으로 향했지만, 그중에는 당연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교성 떨어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은혜가 그런 아이였다.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응? 어, 응!”
정우가 그런 그녀에게 말을 걸어 같이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첫날부터 이성끼리 밥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일탈 행위인지, 정우는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지금 은혜는 미친 듯이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랑 같이 밥을 먹어!’
중학교 3년 내내 마땅한 친구도 없이 홀로 밥을 먹었던 그녀로서는 장족의 발전이다. 친구가 생긴 것도 모자라, 그게 남자라니.
남자라니!
그녀의 머릿속에선 이미 정우와의 관계가 진척되어 손녀 손주를 끌어안고 행복하게 흔들의자에서 몸을 흔들고 있었으며, 증손녀의 이름을 정하는 중이었다.
‘손녀 이름은 뭘로 할까? 하은지…… 하은효? 아니지, 그건 너무 별로고…….’
“은혜야?”
“어! 왜!”
정우의 부름에 깜짝 놀라 상상의 나래에서 벗어나게 된 은혜는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잘생겼다. 가느다란 속눈썹이나, 커다란 눈망울, 탄탄한 몸매까지…….
“들어가자.”
“응? 아, 응.”
그녀는 정우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첫날이라고 힘을 좀 쓴 건지, 급식은 제육볶음이었다. 정우는 그리운 학교 식단을 보며 한 입 퍼먹음과 동시에, 그리움도 뭣도 모두 날아가 버렸다.
‘맛없어…….’
그리고 그제야 떠올렸다. 게임 속 학교는 맛없기로 유명한 학교 중 하나였고, 덕분에 학생들은 모두들 매점을 애용한다는 사실을.
은혜도 옆에서 한 입 급식을 퍼먹고는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급식을 버리고 매점으로 향했다.
“돈 있어?”
“응. 있어.”
은혜는 교복 주머니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정우는 웃으며 그녀를 이끌고 매점으로 향했다. 게임 속에서만 알고 있던 정보지만 매점의 위치는 눈에 익듯 훤했다.
정우가 막힘없이 매점으로 향하자, 은혜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오늘 입학식인데 매점 위치는 어떻게 알았어?”
“……오자마자 매점부터 확인했지.”
“그래? 먹는 걸 좋아하나 보네.”
분명 남자는 기초 대사량이 많아 여자보다 많이 먹는다고, 은혜는 중학교 때 배운 보건 지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사람 개 많네.”
“2학년이랑 3학년인가 봐.”
“하긴.”
그들은 이미 1년 이상 이 학교 급식의 질을 경험해온 숙련자들. 아마 첫날부터 답이 없다는 걸 알고 곧바로 매점으로 향했으리라.
그 수가 물경 수백이니, 매점이 미어터져도 이상할 건 없다. 정우는 주변을 둘러보다 은혜의 손을 붙잡았다.
“어?”
“안으로 들어가자.”
“어? 어어?”
은혜는 속절없이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정우는 힘으로 무리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 매점에서 햄버거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랑 콜라 하나 주세요.”
“이천 원.”
매점 아주머니에게 돈을 낸 뒤, 은혜가 물건을 사는 걸 기다리던 정우는 그녀가 당황하며 몸 이곳저곳을 뒤적거린다는 걸 확인했다.
“왜?”
“……지갑이 없어.”
“잃어버렸어?”
“……그런 거 같은데.”
“그럼 사줄게.”
“뭐?”
그녀는 깜짝 놀라 정우를 바라보았다. 남자한테 얻어먹는다는 건, 이 세계 여자에게 있어 용서할 수 없는 금기였다.
“괘, 괜찮아! 나는 안 어도…….”
“됐으니까. 아주머니. 이거 천원이죠?”
“어. 천 원.”
햄버거를 사들고 나온 두 사람은 곧바로 매점 안에 설치된 전자레인지 앞으로 향했다. 이미 사람들이 잔뜩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었다.
10분쯤 기다렸을까, 같이 햄버거를 돌린 뒤 햄버거를 들고 매점 밖으로 빠져나온 두 사람은 학교 내 정원의 벤치로 향했다.
꽤 구석진 곳에 있어서, 아는 사람만 아는 명당이었다. 게임에서 이 사실을 알아낸 정우는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와, 이런 곳도 있네. 여기서 먹으면 되겠다.”
“으, 응.”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아까 산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었다. 학생 때 물릴 정도로 먹었던 햄버거인데, 이제 와 다시금 먹으니 행복했다.
“은혜야, 그건 무슨 맛이야?”
“그냥, 햄버거 맛인데.”
“먹어봐도 돼?”
“어?”
정우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먹던 햄버거에 입을 가져다 대고 조금 베어 먹었다. 애당초 그녀의 햄버거를 먹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정우의 목적은 그녀와의 간접키스였다. 정우가 햄버거를 베어 물자, 은혜는 뚝 멈춰 서서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 아까워서 그래? 내가 사줬잖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에이, 인심 썼다. 너도 내 꺼 한 입 먹어.”
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먹던 부분을 들이밀었다. 그녀가 다른 부분을 베어 먹지 못 하도록 일부러 봉지 안에서 슬쩍 내밀고, 자신이 베어 문 부분을 들이밀었다.
“자.”
“으, 음. 그럼, 잘 먹을게……?”
그녀도 다른 곳을 먹으려 하다가, 정우가 봉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가 먹었던 부분을 베어 물었다.
그녀가 우물우물 햄버거를 씹어먹는 모습을 보며 정우는 다른 손에 든 음료수를 내밀었다.
“아, 네 음료수를 안 샀네. 자, 이거 마셔.”
“!!”
은혜의 커지는 두 눈동자를 보며, 정우는 씨익 웃었다.
* * *
‘얘가 왜 이러지?’
은혜는 정우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며 그가 마셨던 음료수를 들이켰다. 탄산이라 트름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스레 입에 댄 뒤, 몰래 입구를 혀로 핥아 보았다.
알루미늄 특유의 씁쓸한 맛이 느껴지고, 다른 맛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이 정우의 입술이 닿았던 장소, 침이 묻은 장소라 생각하니 불끈하고 무언가 올라왔다.
‘나를 좋아하나?’
그렇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었다. 갑자기 말을 건 것도, 친구가 되자고 한 것도, 같이 밥을 먹어주고, 매점에서 빵까지 사준다.
심지어 자신이 먹던 음식까지 먹으라며 들이밀었다. 이렇게나 신호를 보내는 데 못 알아차리면 병신이고, 석녀다.
‘렌즈로 바꿔 끼길 잘했어!’
그녀에게 있어 정우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아이들 모두와 친한 데다가, 잘생겨서 인기까지 많았으니.
그에 비해 그녀는 산발이 된 장발에 안경, 매일같이 굽히고 다녔던 어깨, 음침한 성격까지. 자신 같아도 친구가 되기 싫은 모양새였으니.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안경은 벗어 던졌고 어깨는 당당히 폈다. 성격은 숨길 수 없었지만, 머리도 다듬고 약간이지만 화장도 했다.
남자는 갑자기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성에게 호감을 보인다고 했으니, 그리고 이 정도면 반해도 되지 않나 생각했다.
‘아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비싼 돈(싯가 3만원)을 주고 구입한 패션 잡지에 감사하며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고백할까? 이 정도면 고백해도 받아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조심스레 벤치 위에 올려진 정우의 손 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가 손을 올려놓자 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무언가 볼 일이 있다고 생각한 걸까, 좋아하는 사람을 대한다고는 믿기지 않는 가벼운 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그녀는 황급히 손을 떼었다.
“아, 아니. 그냥. 벌레가 있던 거 같아서.”
“그래? 나무가 많아서 그런가?”
‘아, 바보. 멍청이. 등신.’
은혜는 스스로를 욕하며 남은 햄버거를 먹는 데 집중했다. 그럼 그렇지, 자신 같은 머저리를 누가 좋아 해준다고.
하마터면 기껏 생긴 유일한 친구마저 잃어버릴 뻔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지. 첫날부터 남자애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소식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고등학교 3년은 또다시 얼어붙은 냉동고마냥 쓸쓸하고 어두컴컴한 생활이 되었으리라.
‘다행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에 만족하기로 하고, 그대로 반으로 돌아갔다. 그래, 친구가. 남자인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하자.
그렇게 생각한 뒤, 점심을 다 먹어치운 두 사람은 교실로 돌아갔다.
* * *
“정우야!”
“어, 우림이라고 했나?”
“응!”
소우림. 그녀는 커다란 가슴만큼이나 드넓은 마음을, 그러니까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새 반 아이들 모두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친해졌다.
우림은 정우에게 자연스럽게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며 방과 후 놀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몸을 앞뒤로 흔들며 얘기하는 그녀 덕분에, 정우는 게임과 달리 움직이는 그 커다란 중력에 신경이 팔려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애들이랑 노래방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출렁.
“응, 가야지. 갈게.”
“좋았어! 그럼 끝나고 반에서 기다려?”
“알았어. 아, 은혜도 가도 돼?”
“은혜도?”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자, 은혜는 조심스레 고개를 꺾어 우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앉은 자리에서는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폭유에 압도당했다.
“은혜 너도 갈래?”
당연하게도, 은혜는 갈 생각이 없었다. 노래는 잘 부르지도 못하며, 아는 노래라곤 10년은 더 된 오래된 옛날 노래나 애니메이션 노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가지 않겠다고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정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만 내버려 두고 이 가녀린 남자를 노래방에 보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지? 라는 깨달음을!
“가, 갈래.”
“─그래? 그럼 너도 끝나고 남아.”
“응.”
우림이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은혜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