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방과 후.
보람찬 첫 수업을 마친 풋풋한 고등학생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10대를 알차게 보내기 위해, 첫날부터 친목 활동에 애쓰고 있었다.
노래방에 가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은혜는 벌써 무슨 노래를 부르나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책가방을 챙겼다.
그때, 우림이 인원을 모았다.
“자! 노래방 가기로 한 사람! 이리 모여!”
가슴만큼이나 커다란 목소리로 시선을 모으고, 뛰어난 친화력으로 미리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은혜도 같이 노래방에 가기로 한 멤버 중 한 명이었지만, 이제 와 다시금 생각해보니 후회막심했다. 어째서 자신이 그런 결정을 했는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을 말리고 싶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우가 먼저 은혜에게 입을 열었다.
“안 가?”
“가, 가야지. 응.”
정우가 그녀를 부르자, 은혜는 그제야 자신이 노래방으로 가기로 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내가 지켜야지. 이 순수한 아이를.’
그렇게 생각하며 정우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여자 중에서도 꽤 작은 자신이랑 큰 차이 나지 않는, 남자치고는 꽤 작은 키.
작은 키에 맞게 여리여리하고 보들보들한 흰 피부. 가녀린 표정에 한몫 더하는 속눈썹에 동그란 눈동자까지.
그녀는 인생 처음 생긴 남자친구를 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물론 성별이 남자인 친구지, 애인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리라 생각하고 정우를 따라 우림에게 다가갔다.
미리 약속했던 사람들이 모두 모인 걸 확인한 우림은 곧바로 대열을 이끌고 학교를 나가 번화가에 있는 노래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사뭇 익숙해 보여,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인싸의 향기에 두려움을 느낀 은혜는 정우 옆에 달라붙었다.
오늘 처음 친구가 된 여자가 달라붙음에도, 정우는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그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고백받는 거 아니야?’
그런 헛된 망상을 꿈꾸며, 그녀는 결국 도착하고 싶지 않았던 노래방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 * *
“자, 먼저 노래 부를 사람?”
아무도 먼저 나서서 손을 들지 않았다. 첫날이다 보니 서로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우는 자신이 먼저 나설까 고민하다 노래방 책자를 펼치곤 생각을 바꾸었다.
‘아는 노래가 없어…….’
이 세계가 게임 속 세계라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노래 가사도, 리듬도 어느 정도 바뀌기 마련.
그런 의미에서 정우가 알고 있는 노래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바뀌었다고 해도 원래 세계에 있던 노래와 비슷한 노래는 많았다.
저작권을 피하는 건 아주 조금만 바꿔도 되니까. 하지만 아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부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그 누구도 먼저 선곡을 하지 않자, 우림이 이럴 줄 알았다면서 신나는 댄스곡을 예약했다.
시작하는 반주를 들은 정우는 곧바로 그 노래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건 병역 기피로 한국에서 두 번 다시 노래를 부르지 못하던 한 가수의 노래였다.
‘이런 노래도 있던가?’
그런 생각이 먼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다음 이 세계에선 남자가 군대를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설마 현실 보정으로 노래가 만들어졌다고?’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을 노래가 있다는 사실에 정우는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제작자의 절대성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듣는 노래지만, 저 가수 노래 부르면 대충 알겠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우림이를 내버려 두고, 정우가 곧바로 노래를 예약하자 물꼬가 트인 아이들이 하나둘 노래를 예약하기 시작했다.
정우는 노래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며 애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긴장으로 가득 차 있던 얼굴들이 어느 정도 풀리고, 붙어 앉은 애들끼리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우도 옆자리에 앉은 은혜를 보며 이야기를 걸었다.
“노래 안 불러?”
“어? 으, 응. 아는 노래가 없어서…….”
“괜찮아. 아무거나 불러.”
계속 고민만 하던 은혜도 정우의 말을 듣고 노래를 고르기 시작했다. 은혜는 노래방 수록 책자를 펼쳐 자신이 아는 곡을 찾기 시작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마땅한 친구도 없던 그녀가 노래 제목을 달달 외우고 다닐 리 없었다. 그나마 아는 곡들도, 만화 주제곡뿐이었다.
그녀가 만화 주제가가 모인 항목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 정우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거 부르게?”
“어? 아, 그냥. 그냥 보고 있었어.”
“아, 나 이 노래 아는데. 같이 부를래?”
“……같이?”
남자랑 노래를 같이 부를 수 있다. 그 생각에 그녀는 아무 근심 없이 곧바로 노래 주제가를 예약했다. 제목에 만화 오프닝이라고 적혀 있는 노래를 보자마자, 다른 애들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만화 노래? 누구야. 예약한 사람?”
“재 아니야? 아까부터 노래 한 곡도 안 부른 애.”
“저런 노래 부르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거야?”
자신을 지목한 앞담에 그녀의 어깨가 주눅 들어가고 어두컴컴한 낯빛이 되어 노래방 리모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예약을 취소하기 위함이었지만, 그전에 정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예약했는데?”
“뭐? 정우 네가 예약했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만화 좋아해?”
남자가. 그것도 귀염장하게 생긴 정우가 예약했다는 말에 곧바로 태도를 바꾸는 세 사람의 모습에, 은혜는 구역질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래가 끝나고 반주가 시작했을 때. 정우와 같이 듀엣을 부르자 그런 생각은 싹 달아났다.
‘목소리 좋다.’
사실 좋은지는 모르겠다. 잘 부르기는 한다. 그저 자신이랑 같이 불러주니까 더 좋은 거뿐이지.
짝짝짝짝짝짝.
리모콘을 가져갔던 한 아이가 박수 버튼을 남발했다. 그러나 그 박수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은혜는 잘 알고 있었다.
* * *
‘애가 왜 이러지?’
정우는 옆자리에서 계속 우울해하는 은혜를 보고서 어리둥절했다. 자신 같았으면 여자가 먼저 말도 걸어줘, 친구도 해줘, 노래방에서 같이 노래도 불러줘.
그린라이트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다음 날 고백하고 떡각까지 잡을 텐데, 그녀는 뭐가 그리 문제인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정우야, 너 노래 잘 부르더라?”
“그래? 다행이네. 다른 애들이랑 온 게 오랜만이라.”
“에이, 가수해도 되겠던데?”
우림이 옆으로 다가와 달라붙으며 그렇게 말했다. 팔뚝 옆으로 튀어나온 그녀의 옆가슴이 자신의 팔뚝에 닿았지만, 그녀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아, 같이 보자.”
“그래.”
정우가 노래방 책자를 들어 올리자 우림이 옆에서 같이 보자며 팔뚝에 달라붙었다. 살짝 닿아 있던 그녀의 가슴에 반쯤 팔뚝이 씹혀 들어가면서 가슴 감촉을 느끼기 쉽게 되었다.
‘와, 존나 부드러워.’
정우는 팔뚝에 느껴지는 그녀의 옆가슴살을 느끼며, 일부러 천천히 책자를 넘겼다. 그렇게 계속 둘이 달라붙어 있을 때, 정우는 옆에서 자신의 몸을 잡아당기는 손길을 알아차렸다.
“……?”
“나, 나도 볼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은혜가 정우를 살짝 잡아당겨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덕분에 우림의 풍만한 가슴에 파묻혀 있던 팔뚝이 불행한 자유를 되찾았다.
‘으음, 가슴 무덤.’
양쪽에 가슴이 있다. 한쪽은 젖소보다 커다란 폭유요, 다른 한쪽은 거유라고 부르기엔 부족하지만 덩치와 나이에 비해선 커다란 평유가 있었다.
어느 쪽도 부드러운 가슴이었지만, 굳이 한쪽 편을 들자면 정우는 우림의 폭유에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남자는 역시 거유지.’
그것도 평생 한 번 만나볼까 말까 한 젖소 크기의 폭유! 정우는 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림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은혜는 충격을 받아 좌절에 빠졌다. 우림은 그런 은혜를 보며 가소롭다는 의미가 담긴 비웃음을 띄었다.
물론 가운데서 가슴에 집중하고 있던 정우는 그 어떤 모습도 보지 못 했지만.
“아, 이걸로 할래.”
“그래.”
정우가 노래를 고르고 책자를 넘기자 우림은 그제야 정우의 팔에서 떨어졌다. 은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압도적인 암컷 차이에 굴욕감을 느꼈다.
동시에 자위하다 가족에게 걸린 것보다 더 큰 울렁거림이 그녀를 괴롭혔다.
‘정우는 내 건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니까. 그래, 그럼 사귀게 되면 되겠지. 은혜의 마음속에서 정우를 향한 애정이 점점 더 거세게 타올랐다.
* * *
“애들아, 조심히 가.”
“잘 가.”
“내일 보자!”
노래방에서 친목회가 끝나고, 저녁 시간.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고등학생이 되어 신난다지만 첫날부터 노래방에 저녁까지 외식한다면, 고등학생 용돈에 큰 타격이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우 넌 어디 살아?”
“저쪽에 있는 아파트.”
“어! 나도 그쪽에 사는데. 같이 가면 되겠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정우는 우림과 함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 우림이 할 말이 있다며 천천히 걸어갔다.
아무 말 없이 몇 분쯤 걸었을까, 우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우야, 넌 반에서 마음에 드는 애 있어?”
“마음에 드는 애?”
“응. 아, 애랑은 사귀고 싶다. 뭐 그런 애.”
“오늘 처음 봤는데?”
“그래도, 첫인상만 보고 알 수 있는 것도 있잖아?”
우림이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내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색기 넘치는 동작이었기에 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하물이 껄떡이는 걸 느꼈다.
“응?”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여자애들 몸에서 나는 특유의 달달한 우유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정우는 코를 어루만지며, 그녀에 말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으음…… 잘 모르겠는데.”
사실 마음에 드는 여자애들은 몇몇 있었다. 찐따미를 풍기며 자기 입맛대로 개조할 수 있을 거 같은 짝궁이 그러했고.
한 손으로 다 쥐지 못해 차고 넘칠듯한 폭유를 지닌 눈앞의 그녀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하나를 고를 수는 없었다. 단일 루트는 불행, 혹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기왕 게임 속 세계에 왔는데.’
한 여자에게 종속되어 살아가기란, 너무 아쉽지 않은가? 그렇기에 정우는 어물쩍 질문을 넘겼다.
“나는 너 마음에 드는데.”
하지만 우림은 정우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정우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정우는 깜짝 놀랐다. 어딜 봐도 그녀가 자신에게 반할 요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생기긴 했지만 그건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기준이고, 배우나 연예인급은 아니었다.
호감도 작업도 아직이고, 그런데 뭘 했다고 자기한테 반해?
“……왜?”
“으음, 착하고, 잘생겼고, 또…… 내 가슴을 보고도 징그럽다는 눈초리를 안 해서?”
“응?”
정우가 깜빡하고 있던 건, 이 세계의 남자들이 여자의 큰 가슴을 싫어한다는 거였다. 여자의 가슴은 여기나 저기나 성적 어필이 강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20대 30대도 아니고, 10대 애들은 큰 가슴이라고 하면 일단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원래 세계를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남학생이 바지춤을 뚫고 나올 정도로 커다란 물건을 과시하고 다닌 격.
거기에 그녀는 은근슬쩍 자신의 가슴을 정우의 몸에 비비며 그의 반응을 확인했다. 한두 번이야 다른 남자애들도 실수겠거니 하고 넘어가지만, 여러 번이 되면 딱 봐도 눈치를 챈다.
아, 얘가 나를 성추행하고 있구나. 그리곤 경멸의 눈초리로 보답한다. 하지만 정우는 그런 눈초리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림의 가슴에 큰 관심을 보였다.
마치 그 커다란 가슴에 흥미가 있다는 것처럼. 우림의 인생에서 그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흥미가 돋았다.
그리고 10대 여성의 흥미는 금세 애정으로 바뀌었다.
“어때? 너만 좋으면 우리, 사귈래?”
큰 가슴만큼이나 저돌적인 그녀의 태도에, 정우는 침을 삼켰다. 한참을 제자리에서 고민하던 정우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