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4/218)



〈 4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다녀왔습니다.”

은혜는 집에 들어오면서 힘차게 인사했다. 그러나 집안에는 적막이 가득 맴돌았다.


그녀도 알고 있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인사라도 하지 않으면 쓸쓸한 우울감이 그녀를 가득 지배했다.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그녀는 아까 전 훔쳐 들었던, 정우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거절한다라…….’


정우는 우림의 고백을 거절했다. 그 사실에 그녀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걱정되어 뒤따라간 두 사람 사이에서 쓸데없이 좋은 분위기가 연출되었을 때는 걱정되기는 했지만, 역시 정우는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게 나야!’

물론 증거도, 근거도 없는 일방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여자의 감이라는  믿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방안에 있는 컴퓨터를 킨 그녀는 오늘의 웹툰을 정독하고, 친한 사람들의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댓글을 남겼다.

그리고 본인의 블로그에 오늘 있었던 기적 같은 일을 써넣었다.

[잘생긴 짝궁이 먼저 들이대더라 ㅋㅋ]


곧바로 좋겠다는 댓글이 잔뜩 달리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만큼은 그녀도 물경 백에 달하는 친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정우야…….’

아까 전, 애써 만져보았던 그의 몸이 떠오른다. 남자치고는 부드러운 몸. 그러면서도 의외로 딱딱한 팔뚝.

‘윽!’

민감한 가슴에 비벼졌던 팔뚝의 감촉을 떠올리자, 은혜는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걸 느꼈다.

이 나이대의 여자는 머릿속에 뇌 대신 자궁이라도 들어 있는 걸까, 조금이라도 야한 생각이 들면 곧바로 젖어 드는 걸 막을  없었다.


“하아…….”

다행히 부모님도 맞벌이로 나가계신 상황. 경험상 몇 시간 동안 그녀의 집에는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을  알고 있는 은혜는 곧바로 옷을 벗어 던지고 인터넷을 뒤져 바이러스 가득 한 사이트에 들어갔다.

근육으로 가득 찬 미남들이 자신의 몸을 가감 없이 선보이고, 별 볼일 없는 여자들에게 희롱당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은혜는 수음을 시작했다.

“흐아앗, 정우야…….”


물론 그 상상의 주체는 자신과 정우였다.


* * *

[1 SP를 획득했습니다.]


“??”

저녁을 먹고 목욕을 마친 정우는 몸을 닦으면서 갑작스레 떠오른 알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갑자기 왜 올라?’

SP는 히로인과의 알콩달콩한 일들, 호감도를 올리거나 CG이벤트를 뚫거나 도전과제를 클리어했을 때 주어지는 포인트다.

그러나 정우는 지금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오히려 호감도를 깎아내면 깎아내렸지.


‘아무튼 올랐으니 좋은거겠지.’

기왕 얻은 포인트, 알뜰하게 쓰기 위해 포인트 상점을 뒤지던 도중 눈에 띄는 항목을 찾아냈다.


[뛰어난 요리실력]
[1 포인트]

요리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건 다년간의 자취 생활로 만들어진 자취 요리지, 사람들에게 내놓을 요리실력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던 정우는 저도 모르게 요리실력을 구매했다.

공짜로 얻은 포인트라 그런지 아무런 생각 없이  쓰게 된다. 스킬을 구매했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걸 느낀 정우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뭐 먹지…… 어?’

냉장고에 있는 재료만으로 무슨 음식을 할지 한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정우는 몸이 가는 대로 따라 움직였고  결과. 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맛있는 백반 정식이 만들어졌다.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먼 미래에 유명한 쉐프들이 유튜브에서 공개했던 음식 같다며 자화자찬하곤,  수저 떠먹은 정우는 자신의 요리실력에 감탄했다.

‘이거 음식점 해도 되겠는데.’

그리고  순간, 정우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이런 실력이면 굳이 학교 급식을 안 먹어도 되지 않나?


‘도시락을 싸가면 되잖아.’


돈 주고 먹는 밥이 쓰레기면 굳이 그 비싼 급식비를 내가며  먹을 이유가 없다. 그냥 안 먹고 말지.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학년에선 선생의 주도로 학급 전체가 업체에서 도시락을 주문해 먹는 이벤트가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게임에선 그걸 얻어먹으면 체력이 상승했다. 그만큼 학교 밥이 맛없다는 뜻이겠지.

그 뒤로도 몇몇 학생들이 급식을 먹는 대신 도시락을 싸 오기도 한다.

히로인중에서도 호감도를 올리면 도시락을  오는 히로인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정우는 직접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싸가기는 귀찮으니까.’

정우는 포인트 상점을 뒤져 자신이 원하는 스킬을 찾아내었다.

[매일 아침 커피 한 잔의 여유]
[5 포인트]

매일 아침 1시간동안 자신이 미리 지정해놓았던 행동을 하는 스킬. 이게 있으면 잠자는 도중에도 설정해놓았던 행동대로 움직인다.


그 상품을 구매한 정우는 일단 매일 아침 30분의 달리기 후 샤워를 한다로 설정해놓은 뒤 안방을 뒤져 부모님의 도장 두 개를 찾아냈다.

다음은 간단했다. 급식표에 있는 성분  매일같이 들어가는 성분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가짜 진단서를 컴퓨터로 프린트하고, 개인 도시락을 지참하는 걸 허용한다는 문서에 부모님의 도장을 찍으면 완성.


이걸 담임 선생님에게 보여주고 허락을 맡으면 끝. 물론 이런 귀찮은 짓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정우는 어떤 부분에서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었다.

‘선생님도 히로인인데, 괜히 밉보이는 것보다야 낫지.’

하렘 엔딩을 꿈꾸는 그로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정우는 서류를 모두 완성하고 다음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 * *


“그러니까, 알레르기가 있어서 급식을  먹겠다고?”


“네. 여기 제가 가진 알레르기 진단서랑 부모님 허락도 받아 왔어요.”


정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미리 준비된 서류를 담임 선생님에게 넘겼다. 담임은 넘겨받은 서류를 훑어보며 완벽한 서류라는 걸 확인했다.

“응. 뭐, 부모님 허락도 맡았고, 병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점심에는 뭐 먹을 생각이지?”

“도시락을  들고 다니려고요.”

“힘들 텐데.”


“요리는 자신 있어서.”

“음,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들어가.”

만일 그녀가 선생 경험이 오래된 중년 여선생이었거나, 학생 주임쯤만 되었더라도 귀찮음에 무조건  된다고 했겠지만.


그녀는 올해  임용한 신임교사. 학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불태울 준비가 된 파릇파릇한 교사였다.

학생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조금 귀찮아지더라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그게 귀여운 남학생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온 정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허락을 맡았으니 오늘부터 바로 써먹어야지.

“정우야, 그거 뭐야?”

아직 까지도 친구를 만들지 못해 정우를 기다리고 있던 은혜가 정우에게 다가와 관심을 보였다.


“도시락.”

“……급식  먹게?”


“응. 맛없잖아.”

“저, 근데. 급식실에서 급식 말고 다른  먹으면 급식 아저씨들이 화내지 않을까?”

“교실에서 먹을 건데?”

“어?”

정우는 자신과 그녀의 대화 사이에 무언가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가 급식을 먹으러 가지 않은 채 홀로 교실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제야 정우는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며 그녀가 그렇게 당황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혼자 밥 먹으라는  알았구나.’

그걸 깨닫자 웃음이 절로 나온다. 혹여나 버림받을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엽다.

정우가 킥킥 웃기 시작하자, 은혜는 자신의 불안이 실제가 될까 더더욱 두려움에 떨면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같이 먹자.”

“응?”

“같이 먹으려고 2인분 싸 왔어.”

그때 정우가 가방 속에서 도시락을 꺼내자, 그제야 옷자락을 놓고 기대되는 눈빛으로 도시락통을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싼 수제 도시락. 원래 세계에서는 짜증이 나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여고생이 직접 싸 온 도시락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특히나 밥보다 애정이 고픈 청춘 17세 여고생이라면 더더욱.

“와아─ 지, 진짜 먹어도 돼?”


“먹어도 되지.”

보온 도시락이라고 해도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하면 점심때쯤엔 식기 마련, 식으면 무슨 음식이든 맛이 없어진다는 걸 알고 있는 정우는 한 가지 더 특별한 아이템을 준비했다.

[24시간 내내 따듯한 도시락]

1포인트짜리 도시락통. 열량보존법칙을 위배하는 마법의 아이템이었기에 포인트가 아깝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방금  지은  마냥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을 보며, 그녀가 조심스레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퍼먹었다.

정우는 아기새에게 먹이를 주는 부모의 마음으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무려 7포인트나 들어간 도시락이었다.


그 이상의 포인트를 벌어다 주지 않으면 손해였다.

“진짜 맛있어. 응. 레스토랑해도 되겠는데?”


“정말?”

“응! 나중에 신부 될 사람은 좋겠다.”

친구가 없어 홀로 만화나 읽는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던 은혜는 정말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를 나불거렸다.


정우는 그녀가 기뻐함에 만족하며 자신도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도시락에 관련된 이벤트가 있었다. 먹여주기 이벤트. 연인 사이에서나  일이었지만, 호감도와 포인트에 눈이 먼 정우는 그런  신경 쓰지 않고 가장 맛있는 닭튀김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은혜야.”

“으음?”


“아.”

“어, 어? 머, 머야?”


정우가 부르자 입을 가린 채 밥을 먹던 그녀가 자기 입 앞에 들이 밀어진 닭튀김을 보고 그대로 뻣뻣하게 굳는다.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뇌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멈춘다. 그러나 정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의 앞에서 닭튀김을 흔들었다.

“안 먹을 거야?”

“머, 먹어! 응. 먹을래!”

그녀는 곧장 입안에 있는 모든 음식물을 목구멍으로 집어삼키고 침도 한 번 꼴딱 삼켰다. 입가에 밥풀이라도 묻지 않았나 손으로 한 번 쓱 닦아내고, 이빨을 감춘 채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아, 아아.”

“아아.”


정우가 만든, 정우가 직접 만든 음식이 그가 먹던 젓가락으로 자신의 입안에 들어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덕감에 부르르 떨면서 그녀는 닭튀김을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육즙과 후추향이 입안을   휩쓸고 지나간  곧이어 딱딱한 나무젓가락의 감촉이 그녀의 혀에 닿았다.

그 끝부분은 조금 눅진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한입에 닭튀김을 전부 빼내면서, 그 젓가락에 되도록 많은 흔적을 남겼다.

젓가락이 은혜의 입에서 빠져나왔을 때, 투명한 실타래가 길게 늘어졌다 끊어졌다. 그 모습을 본 정우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먹여 줘.”

“머, 먹여 달라고?”

그녀는 먹여 달라는 말에 크게 흥분하며 젓가락을 이리저리 비벼댔다. 한 쌍의 젓가락이 마치 다른 짝을 찾은 것 마냥 이리저리 비틀렸고, 겨우 음식을 잡은 손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아.”


“아, 아아…….”

정우가 입을 살짝 벌리고 눈을 감자,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이대로 몰래 입을 맞춰도 모르지 않을까? 그런 추잡한 욕망이.


툭.

“아!”


욕망에 지배당하던 그녀는 결국 음식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고, 그 모습을 본 정우가 몸을 치움으로써 먹여줄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에 상당히 낙담했던 그녀는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온 정우의 말을 듣고 화색이 돋았다.

“뭐해? 안 먹여 줄 거야?”

“먹여줄게!”


언젠가는 입에서 입으로 먹여줄 날이 오리라 믿으며, 그녀는 정우에게 닭튀김을 먹여주었다.

정우의 입안에 들어갔다 나온 젓가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녀는 행복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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