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정우야! 정우야! 이번엔 저거 타러 가자!”
“왜 이렇게 신났어?”
“뭐 어때! 빨리 가자!”
대부분의 놀이기구에서, 거유로 인해 탑승 불가 처리를 받은 우림과 달리 평범한 키와 체형을 가지고 있는 은혜는 대부분의 놀이기구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 우림이 타지 못 할 위험천만한(안전장치가 필수인) 놀이기구들만 찾아다녔다.
한 번은 그러려니 했지만, 두 번. 세 번이나 거절당한 우림은 자신의 가슴을 감싸 안으며 좌절에 빠졌다.
“괜찮아?”
“……살이 찔 때 가슴만 찌더라. 나.”
“으음, 좋은 게 아닐까?”
“근데 빠질 때는 배부터 빠져! 아니, 왜!? 왜 그런 거야!?”
원래 세상의 여자들이 들으면 역정을 내다 못 해 그녀를 죽이려고 들겠지만, 이 세상에서 그녀의 가슴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힘 내.”
그저 위로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정우는 되도록 그녀도 탈 수 있는, 그러니까 회전목마나 커피잔같은 놀이기구를 골랐다.
물론 그런 원심력을 사용하는 기구를 타게 되면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흔들렸고, 그 과정에서 쿠퍼 인대가 이리저리 흔들린 그녀는 고통을 호소해 놀이기구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괜히 오자고 했다.”
“……아니, 괜찮아. 내가 오자고 했는걸.”
“그래도.”
“정말로 괜찮아. 하, 중학교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자신의 가슴이 고등학생이 되며 더욱 커졌다고 어필했다. 이미 커다란 가슴이었지만, 여기서 더 커진다는 걸 암시하는 걸까?
“그럼 저것만 타고 그만 돌아갈까?”
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관람차를 가리켰다. 저거면 가슴이 크다고 못 타는 일은 없을테고, 느리니까 가슴이 흔들리는 일도 적으리라, 세 사람이 다 같이 타도 충분한 크기니 불만도 없겠지.
정우가 가리킨 관람차를 보고서, 우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는 불만이 있는듯한 눈치였지만 그걸 당당히 말할 성격은 아니었다.
“좋아.”
“알았어…….”
두 사람의 동의도 받았겠다. 정우는 두 사람을 이끌고 관람차로 향했다. 마침 해가 져가기 시작하는 때라 노을이 예쁘게 공중에 수를 놓고 있었다.
“올라가면 딱 해 지겠다.”
관람차는 그리 줄이 길지 않았고, 세 사람은 금방 관람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누가 정우의 옆자리에 앉을건지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은 결국 알바의 중재로 정우의 건너편에 사이좋게 앉게 되었다.
“경치 좋네.”
정우는 두 사람에게 관심도 주지 않고 경치를 구경했다. 분별없는 개발로 자로 잰듯한 풍경의 살벌한 미래와 달리, 여기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구역도 많고 풍취가 흘러넘쳤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풍취가.
“그러네. 날씨도 좋고, 단둘이 왔으면 더 좋았겠는걸.”
“……다음엔 둘이 같이 오자 정우야.”
은혜가 우림의 말을 씹고 말을 건넸다. 그런 은혜를 보면서 우림은 한쪽 다리를 꼬면서 가소롭다는 듯 그녀를 내려 보았다.
은혜도 최대한 눈알에 힘을 주고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그래 봐야 그녀의 시선은 대부분 가슴에 막혀 소용없었다.
“누구랑 오자는 거야?”
“정우 넌 누구랑 오고 싶은데?”
그 질문에 우림이 정우에게 물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정우의 뇌가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갔다.
‘누구를 고르지?’
누구를 고르더라도 문제였다. 둘 중 한 사람을 고른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다른 한 사람과 오고 싶지 않다는 뜻이 될 수도 있으니까.
고른 쪽을 고르지 않은 쪽보다 좋아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즉, 누구를 고르더라도 문제였다.
“으음, 나는 은혜?”
그리고 정우는 여기서 은혜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명목상 은혜의 인연이 우림이보다 길었고, 그녀와 같이 온다고 하더라도 소꿉친구끼리의 우애를 다지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되었기에.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난 우림을 고르는 건 악수였다. 너무 티 나지 않는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에이, 아쉽네. 정말 은혜랑 사귀는 거 아니지?”
“아니래도?”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은혜가 옆에서 꼽사리를 끼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은 아니었다. 어떻게 들으면 그렇게 될 사이라고 들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정우도 우림의 독주를 견제하고 싶어서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구나. 역시 소꿉친구라 그런가?”
“마, 맞아. 소꿉친구! 부럽지?”
“그으래─ 소꿉친구라서 그렇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우림은 갑자기 정우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은혜가 말리기도 전에 정우의 옆자리에 앉은 우림이 그의 어깨에 팔을 기대며 귓가에 속삭였다.
“정우야, 너 무슨 초등학교 나왔어?”
“나? OO초등학교."
"어머! 정말? 나도 그 초등학교 나왔는데!“
우림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면서 자신이 정우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은혜는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금세 알아차리지 못 했다.
“은혜 너는 무슨 초등학교였는데?”
“나, 나도 OO초등학교 나왔는데…….”
“중학교는?”
“중학교도 OO중…….”
“나도 OO중 나왔어.”
짝, 하고 우림이 박수를 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둘의 시선이 모인 걸 확인한 우림이 터무니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도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 출신이네. 알고보니 나도 정우랑 소꿉친구인 거 아니야?”
“어?”
“그야 그렇잖아. 너랑 정우랑 소꿉친구인 이유가 같은 초, 중학교 나와서 그런 거면. 나도 소꿉친구가 될 수 있는 거 아냐?”
“그, 그게 무슨…….”
“그리고 은혜야. 너 중학교 때 친구 없었잖아.”
“……어?”
그 말에 은혜의 심장이 멈췄다. 설마 자신이 친구도 없는 찐따였다는 사실을 들킬 줄 몰랐기에. 우림은 어떻게 알았는지 은혜의 중학교 사정을 샅샅이 밝혀내었다.
“초등학교 때 잠깐 아는 사이였다가, 중학교 땐 한마디도 못 했으면서 소꿉친구? 그게 무슨 소꿉친구야.”
“하아, 하아…….”
은혜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파래지고 있었고 공기가 거의 통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점점 더 빠르게 호흡하고 있었다.
“자, 그럼 나도 이제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지?”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저, 정우야. 미안, 나 속이 안 좋아서…….”
은혜는 관람차가 땅에 닿자마자 재빨리 뛰쳐나갔다. 그녀는 재빨리 주변에 있는 쓰레기통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은 그저 멀미를 하는구나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정우만이, 그녀가 왜 그리 고통스러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어때? 정우야. 이제 나도 소꿉친구지?”
“아니.”
터벅터벅, 은혜에게 걸어가면서 정우는 우림이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넌 너무 심했어.“
자신을 내버려 두고, 저 볼품없는 소녀로 걸어가는 걸 우림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그 등을 노려보며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허, 내가 잘못 한 거야? 내가?”
저 멀리 걸어가는 정우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 * *
“하아, 하아…….”
정우가 은혜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쓰레기통을 붙잡고 약하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걱정하며 근처로 다가가니 강한 신내가 풍겼다.
‘윽…….’
[CG 회수]
[미소녀도 사람입니다! 사람!]
[히로인의 토사물 발견]
[10 SP를 획득했습니다.]
‘필요 없어…….’
정우는 곧장 근처 자판기에서 물을 가져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건넸다.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은혜가 팔만 뒤로 내밀어 물을 받아갔다.
“……고마워.”
물을 받아든 그녀는 입을 헹구고 몇 번 뱉어낸 뒤 물을 삼켰다. 목구멍에 남은 잔해물들이 그녀의 식도를 툭툭 건드리며 지나갔는지, 물을 마시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진정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이야.”
“뭐가?”
“내가 중학교 때 친구 하나 없던 찐따년이었다는 것도, 그래서 기껏 얻은 친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너한테 이래저래 폐를 끼친 것도, 다 사실이야…….”
우림의 말에 워낙 충격을 받았던 걸까, 그녀는 우림이 하지도 않은 말들을 툭툭 내뱉곤 했다.
딱 좋게 부서졌다. 정우는 속으로 우림을 칭찬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가, 갑지가 무슨…….”
“친구가 없다니, 여기 있잖아. 네 절친이.”
그 말에 은혜가 뚝 멈춰서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정말 나랑 친구 해 줄 거야?”
“그럼.”
“나, 나 중학교 내내 친구도 없어서…… 할 이야기도 없고…… 갑자기 분위기를 망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래도.”
“나, 안 버릴 거야?”
“안 버리지.”
은혜는 글썽이다 못해 아예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는 모습을 보이기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헐떡였다.
“흑, 진짜로, 진짜. 나, 안 버리는 거지?”
“네가 먼저 나를 버리지 않을까 걱정인데.”
“내가 왜!”
정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번쩍 들었던 그녀는 발개진 얼굴과 퉁퉁 부은 눈가를 깨닫고 곧바로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은근슬쩍 정우의 품속에 안겨 눈물을 닦아냈다.
“……고마워.”
“뭐가?”
“이런 나랑, 계속 친구 해주겠다고 해서.”
“아니 뭐, 친구 없는 게 무슨 죄야?”
“다들 그랬어. 내 잘못이라고. 내가 못나니까 친구가 없는 거라고.”
그런 사실까지는 몰랐다. 게임 속 단편적인 설정을 읽고 그녀가 중학교 때 어땠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냥 자기망상이 심한 정신병자일 테니까.
“그랬구나. 다들 네 잘못이라고 했구나.”
그러나 그게 아니다. 그녀에게 친구가 없는 게 어찌 그녀 탓이란 말인가? 그녀라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지금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분명 제대로 된 노력을 했을 터이며 그저 그 노력이 성과를 보이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그저 운이 조금 나빴을 뿐이라는 걸.
“네 잘못이 아니야.”
굳이 잘못이 있다면 그녀를 이딴 설정으로 만든 제작자이리라. 정우는 속으로 제작자를 욕하면서 그녀를 보듬었다.
“……정우야, 그럼 나 부탁이 있는데.”
“뭔데?”
“이대로, 이대로 조금만 있고 싶어.”
그녀는 정우의 품속에 안긴 채 그렇게 말했다. 정우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더욱더 강하게 껴안았다.
그 모습을 저 멀리에 있는 우림이 독기 찬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정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정우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옷에서는 약간의 신 냄새가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