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와! 이게 정우 네가 만든 도시락이야?”
“그럼! 엄청 맛있겠지!”
우림이 정우가 직접 만든 도시락에 감탄하자,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데 은혜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정우는 그런 그녀에게 꿀밤을 먹여준 뒤 도시락통을 열었다. 시스템 제 도시락통이니만큼 막 만들어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도시락에선 따끈따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은혜는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들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지만, 우림이는 도시락통을 만져보며 이상함을 느낀 듯, 도시락통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왜?”
“아니…… 정우야, 이거 혹시 전자레인지 돌렸어?”
“아니? 왜?”
“근데 왜 김이 나?”
그녀의 의문은 타당했다. 도시락을 점심에 만든 게 아니라면 몇 시간이나 지났을 텐데,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나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왔다고 하기에는 도시락통이 너무나 차가웠다. 심지어 정우도 돌리지 않았다고 하지 않나.
물리 법칙과 상식에 위배 되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그 질문을 들은 정우는 순간 젓가락질을 멈추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시스템 상점에서 구매한 모든 것들은 게임을 좀 더 편리하고, 윤택하게. 그리고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게임에선 그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개 고등학생이 프로 격투기 선수를 때려눕히든, 미슐랭 3성 요리사와 요리 대결에서 승리하든 그저 ‘주인공 대단해!’로 끝난다.
하지만 여긴? 현실이다. 고작해야 고등학생인 정우가 도저히 이뤄낼 수 없는 업적을 이뤄냈을 때 그들은 정우의 천재성을 칭송하기보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무언가 부정을 의심하리라.
‘은혜는 아무렇지도 않길래 이런 부분은 게임이랑 똑같은 줄 알았는데…….’
그건 그냥 은혜가 단순했던 거다, 또 무엇보다 남자가 싸준 수제 도시락이라는 사실에 흥분해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 했겠지.
그에 비해 우림은 고작 남자가 싸준 수제 도시락 정도로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기뻐하긴 했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던 은혜에 비하면 이상함을 느낄 정도는 되었다.
“보온 도시락이라 그래.”
“아, 그래?”
그러나 그녀는 무슨 의심병 환자나 이상 현상에 목숨을 거는 집착증 환자가 아니었다. 그저 의문이 생겼을 뿐이고 설령 거짓말이라도 그 의문이 해결된다면 이 이상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만일 계속 왜 그러냐 질문 했다간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마니까, 십수 년 동안 쌓아온 그녀의 인싸 기질은 그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으응! 맛있네. 정우 너 요리사 해도 되겠다.”
“요리사는 힘들어서 안 해.”
“그래도 아까운데.”
우림이 아깝다며 젓가락을 씹어대긴 했지만, 정우는 요리사 같은 걸 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먼 미래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어차피 엔딩을 못 보면 죽을 텐데 뭐.’
만일 그때까지 하렘 엔딩을 보지 못 한다면, 그렇게 다른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대부분은 죽음, 절망, 좌절이다.
백 개가 넘는 다양한 엔딩 중에서 주인공이 죽는 건 7할이 넘었으며, 병신이 되는 게 2할이었으며, 애인을 잃고 평생 쓸쓸히 살아가는 게 1할이었다.
정우가 단 한 번도 보지 못 한 하렘 엔딩만이, 유일하게 행복한 엔딩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보통은 진 엔딩이 해피 엔딩이지.’
만일 진 엔딩마저 죽음으로 가는 길로 포장해두었다면, 정우는 제작자를 후려 팰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 배부르다.”
도시락통을 대부분 비운 은혜가 마지막으로 남은 반찬을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정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무얼 결심한 건지 정우의 입가에 반찬을 들이밀었다.
“……왜?”
“배, 배가 불러서. 남기면 아깝잖아.”
“버려도 괜찮은데.”
“아, 안 돼! 남기면 지옥 가서 다 섞어 먹어야 해.”
은혜는 반드시 자신의 젓가락으로 정우에게 음식을 먹여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건 그녀 나름대로의 어필이었다.
우림이와 달리, 자신과 정우는 이 정도 일도 태연하게 한다는 어필!
그 사실을 눈치챈 정우는 순순히 그녀가 먹여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은혜는 곧장 우림이를 힐끔 바라보았다.
“훗.”
“……?”
우림이는 관심 없다는 듯, 반찬을 하나 집어 먹었다. 그녀는 집어 든 반찬을 아주 약간 먹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정우야.”
“또 왜.”
“이거 맛이 이상한데?”
“그럴 리가, 어디 봐.”
우림이의 말에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한 입 베어 먹은 반찬을 똑같이 베어 먹었다. 그것도 우림이의 젓가락으로.
우물우물.
“이상 없는데?”
“그래? 착각이었나 보네.”
그렇게 우림이는 자신이 먹었던 음식을 정우에게 먹이고, 또 정우가 입을 댄 음식을 자신의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그게 우림이의 계획이었다는 걸 깨달은 은혜는 큰 충격을 먹었다. 친분이 없어도 자연스러운 커뮤니케이션 스킬로 먹여주고, 심지어 정우가 먹었던 부분을 자신이 독식했다!
‘져, 졌다.’
절대 이길 수 없는 벽! 벽을 느낀 은혜는 좌절하며 고개를 숙였다. 답이 없다. 대체 그녀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아, 남았잖아. 야. 이것도 먹어.”
그때, 정우가 은혜의 도시락에 남긴 나물을 젓가락으로 쥐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일부러 남긴 반찬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반찬보다 더 반가웠다.
“응!”
맛도 식감도, 혀를 녹여 내리는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은 채 최대한 나물을 씹었다. 알레르기라도 있는 걸까, 먹으면 먹을수록 속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겼다.’
하지만 이걸로 자신의 승리. 말빨로 우림이가 정우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건 할 수 있어도, 정우가 그녀에게 음식을 먹여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우림이는 자신도 먹여 달라며 징징댔지만 정우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 * *
5교시 체육 시간.
점심을 먹고 난 뒤 에너지를 보충한 학생들은 곧장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지루한 교과과정에 질린 학생들이 그나마 좋아하는 시간. 운동에 흥미를 가진 학생들은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고, 운동에 관심 없는 학생들은 친구들과 떠들며 즐길 수 있는 시간.
정우는 체육을 즐기는 편에 속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운동을 할 기회가 많지 않기도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운동 부족의 몸과 달리, 십 대의 몸은 아무리 달리고 넘어져도 멀쩡했기 때문이다.
“후우!”
이 세상에서 남자들은 운동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었으며 아무리 친하지 않은 남자애라고 할 지어도 같이 하자고 말하면 같이 운동해줄 여자애들은 널려 있었다.
하물며 정우는 은혜와 우림이라는 하렘 멤버까지 있으니 더 말이 필요한가?
파앙!
“꺄악!”
정우의 전력 스매싱에 셔틀콕이 바닥을 향해 내리꽂힌다. 기술이라곤 없는 단순무식한 스매시였지만 정우의 몸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피지컬로 내리꽂으니, 훌륭한 기술이 되었다.
“괜찮아?”
“괘, 괜찮아.”
건너편에서 셔틀콕을 받으려다 넘어진 은혜가 먼지를 털며 일어난다. 그녀를 보고 느낀 거지만, 그녀는 정말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공부도 운동도 평범, 외모는 꾸미니까 예쁘장 하지만 그 외에 잘하는 특기나 취미는 없다. 정우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되는 아이.
“다음엔 내가 서브할게.”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한 가지 장점이 있었는데, 그건 한 번 눈 돌아가면 아무도 말리지 못할 만큼 푹 빠진다는 것.
지금도 승부에 빠진 그녀의 두 눈동자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승부욕이 얼마나 뜨겁게 타오르든지 간에 몸치인 건 변하지 않는다.
결국.
탁!
“아!”
네트를 넘기지 못하고 그녀의 라인에 떨어지는 셔틀콕. 그녀는 땅에 무릎 꿇으며 좌절했다.
“……나, 왜 이렇게 운동을 못 하지? 병신인가?”
“괜찮아 은혜야.”
좌절하고 있는 그녀에게 우림이 다가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리곤 말했다.
“나도 운동은 잘 못 하는걸.”
“……정말?”
“그럼.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흔들려서…….”
“너 그냥 나가 뒤졌으면 좋겠어.”
사이가 나빴던 두 사람은 어느새 친해져 서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냥 둘 다 덤벼.”
“호오, 정우야. 이건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인데.”
“그래, 아무리 정우 너라도 남자인 이상 여자 둘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자신만만하던 두 사람이지만, 정우는 라켓을 흔들며 웃을 뿐이었다. 도발을 받아들인 두 사람은 혼신을 다해 정우에게 맞섰고, 패배했다.
“말도 안 돼…… 남자한테 여자 둘이…….”
“은혜 네가 더럽게 도움 안 돼서 그래…….”
“그러니까 내가 말했지? 둘이 덤벼도 안 된다고.”
정우는 가볍게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손등으로 닦아내던 땀은 너무 흘러내려 정우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들어 올려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옷을 내린 순간, 정우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들의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왜?”
“왜, 왜? 왜에에?”
“남자애가 무슨!”
그녀들의 반응을 보고 난 뒤에야 정우는 이 세계가 헐렁하기 짝이 없는 설정으로 이루어진 야겜 속 세상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그중에는 여자보다 남자의 정조가 더 귀하다는, 남녀역전 설정이 들어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자신은 체육복 아래에 티셔츠 한 장 걸치지 않았다. 아니, 설령 걸쳤어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니까 즉, 자신이 한 일은 브라도 안 입은 여고생이 배꼽 위까지 옷을 들어 올려 노출한 일이나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니까 개 꼴리네.’
그래, 다르게 말하자면 정우는 지금 이 강당에 있는 모든 여고생들을 상대로 머꼴을 선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