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13/218)



〈 13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저 망할년이…….’

우림이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마리를 보고서 격분했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열불이 솟아올라 그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게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떠나서, 곧장 달려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이기도 하고, 정우의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아아, 정우야.’

멍청하게 옷을 도둑맞고, 그게 다시금 돌아왔으며. 심지어 이상한 소문이 퍼진 것까지. 모두 그녀가 계획한 일이라는 걸 알면 그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비명을 지를까 너무나 궁금했다.

‘참자, 이년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팔뚝을 꼬집으며 그 사실을 밝히려는 자신을 제지했다. 아직 아니다. 지금 말하더라도 그는 충분히 큰 충격을 받겠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망가지지 않으리라.

망가지고  망가져,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낼 때까지 참아야 한다.

그래야 내 걸로 만들  있으니까.
그 누구도 흥미를 갖지 않는 망가진 장난감으로 만들자.
나의.
나만의.
나만의 장난감으로.

‘조금만 기다려 정우야…….’

* * *

다음 날, 정우는 도시락을 4인분씩 싸기로 했다. 이쯤 되니 어지간한 요리점 수준으로 식재료를 많이 사게 되었지만, 정우에겐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부모님은 뭐 하는 사람들이지?’

이 세상의 부모님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얼굴 한  비추지 않았다. 그가 자고 있을 때 집에 들어와, 잠에서 깨면 사라져 있다. 마치 스크립트처럼.

그러나 그럼 에도 그를 아낌없이 자신을 지원해주었다.

생각해보면 게임 속에서 주인공은 툭하면 집으로 히로인들을 데려와 광란의 파티를 즐겼었지. 부모님이 있다면 상상도 할  없는 일이다.

이젠 주인공이 된 자신도 언젠가 그럴 날이 오리라 생각하며 요리를 마친다.

4인분치 요리를 준비하고, 들고 가는 것도 일이었다. 가방에도 전부 들어가지 않았으니, 큼지막한 종이백을 하나  들고 다녀야만 했다.

사람들은 그런 큼지막한 종이백을 들고 다니는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정우는 최대한 시선을 무시하는 기술을 몸에 익혀야만 했다.

교실에 도착한 정우는 곧장 자리로 돌아가 가방과 도시락을 놓고 맨 뒷자리를 확인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마리는 이미 등교해있었다. 늦잠을 자다가 늦는 것보다 그냥 일찍 등교해 학교에서 자는  낫다고 생각한 걸까.

정우는 도시락을 꺼내 들고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녀의 책상 서랍 안쪽에 도시락을 넣어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학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정우는 예습을 하는 척 다른 히로인들을 어떻게 하면 문제없이 하렘에 넣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계획을 짰다.

마리는 계속해서 잠을 잤다.

학기가 시작한 지 이제 2주쯤 되었지만, 이미 그녀는 잠만 자는 양아치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기에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 * *

─♬

점심시간을 알리는 타종이 울리고, 마리는 그제야 깨어나 터덜터덜 급식실로 향했다. 맛대가리는 없었지만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

안 그래도 쓸데없이 신진대사가 좋아서, 한 끼만 굶어도 전신에 힘이  빠진다.

급식실에 도착한 그녀는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줄을 보고 눈치껏 앞으로 들어갔다. 다른 아이들이 그녀의 사나운 외모를 보고 알아서 비켜준 것이다.

‘내가 비키라고 안 했다. 이 새끼들아.’

새치기를 한다며 욕하는 눈초리를 느낀 마리는 그걸 무시하며 앞으로 반찬을 가득 담았다. 어차피 많이 가져가더라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맛없어서 다 남기니까.

그나마 남지 않는 건 고기 내음 그득한 메인 반찬뿐. 그러나 그건 급식 아저씨의 배식을 받기에 아무리 그녀라도 많이 받을  없었다.

“조금만 더 주세요.”

“학생, 다른 애들도 먹어야지.”

“그럼 저 밥 푼 만큼만 주세요.”

급식을 배식하는 아저씨도 그녀의 밥이 고봉처럼 쌓인 걸 보고는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배식해주었다.

급식 맛이 저질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런 급식을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맛 더럽게 없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밥을 전부 목구멍으로 넘겼다. 전투식사. 그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밥을  퍼먹은 뒤, 그녀는 곧바로 교실로 올라왔다.

‘여기 애들은 착해서 좋네.’

초등학교, 중학교 땐 그녀의 머리 색과 이름을 듣고 시비를 거는 양아치들이하도 많아서, 그녀는 평화로운 학창시절을 보낼  없었으니까.

곧바로 잠을 자기 위해 교실로 올라온 그녀는 자신의 책상에 엎드리려다 서랍에 툭 튀어나온 무언가를 발견했다.

“─?”

서랍 안에 손을 넣어 물건을 확인한 그녀는 그게 반에서 유명한 정우의 도시락이라는 걸 눈치챘다. 똑같은 도시락통에, 살짝 열어보니 김이모락모락 나는 게 겉보기에도 맛있어 보였으니까.

‘이건왜?’

도시락과 함께 놓여 있던 그녀는 쪽지를 들어 올려 읽기 시작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쓰여 있는 쪽지.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이러려고 도운 거 아닌데.’

예전에 그에게 도시락을 요구했던 게 떠오른 마리는, 자신이 이런  원하고 도와준  아니라는  밝히고 싶었으나.

정작 도시락을 준 주인은 밥을 다 먹고 어디론가 사라진 이후고, 공짜로 생긴 밥을 놓칠 수 없던 그녀는 가방 안에 도시락을 챙겼다.

‘저녁값 굳었네.’

한 끼라도 아낄  있다면, 그게 큰돈이 된다. 그녀가 일하는 아르바이트에선 식비랍시고 한 끼에 오천 원씩 빼가니까.

그걸 빼면 한 달에 십만 원은 아낄 수 있으리라. 십만 원. 그녀가 이틀은 일해야   있는 돈.

도시락을 챙긴 그녀는 다시금 잠에 들었다. 아침엔 쌀쌀했지만, 점심이 되어 나뭇잎을 핥는 햇살과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포만감이 그녀를 졸음으로 몰고 갔다.

춘곤증과 식곤증이 합쳐지니, 잠에 빠지는 건 금방이었다
.
* * *

“누가 쟤  깨워라.”

그녀가 일어난 건 종례 시간이었다. 그녀는 학교에 와 하루종일 잠만 퍼질러 잤던 것이다! 그럴 거면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녀는 학비가 면제다.

무엇보다 중졸과 고졸은 대우 자체가 틀렸다. 고졸 또한  무시당하는 위치였지만,아무래도 중졸보다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애초에 대부분의 직장에서 요구하는 최저 조건이 고졸이니까. 중졸도 뽑는 일자리는 대우도 급여도 쓰레기였다.

학교가 끝나고 곧장 아르바이트로 달려간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도시락을 까먹기 시작했다.

사장에게는 오늘치 식비를 빼달라고 말했다. 도시락을 본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도시락을 연 그녀는 아직까지 김이 새어 나오는 내용물을 보고 안심했다.  가게에는 전자레인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방에서 젓가락 하나를 받아 온 그녀는 곧바로 소시지를 하나 집어 먹었다. 고기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 중 하나였으니까.

소시지를 집어 먹은 그녀는 입안에서 가득 터지는 육즙에 순간 멍을 때렸다.

‘……맛있잖아?’

학생이 만드는 도시락이고, 만들어 진지 12시간은 족히 됐을 테니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맛있다! 막말로 이 가게에서 먹는 저녁보다 훨씬 나았다. 이런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얼마 만일까.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먹었던 짜장면보다 맛있었다.

그러니, 10년은 족히 된 거 같다. 10년 동안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입고 싶은 옷도 못 입으며 살아온 그녀의 한이,순간적으로 해소되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팔뚝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식사에 집중했다.

‘내일도 싸주려나.’

다 먹고 남은 도시락통을 챙기며, 그녀는 일을 시작했다.

* *

[10SP를 획득하셨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오르냐?”

집에서 히로인들의 정보를 써 내려가던 정우는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을 보며 당황했다. 게임에선 이런 일이 절대 없다.

왜냐, 게임은 그저 게임. 주인공이 보지 않는 곳은 아예 연산 자체를 하지 않으니까. 주인공이 SP를 얻을만한 상황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획득한다.

‘10SP면…… 좀 큰데.’

단순히 호감도가 올라간 수준이 아니라, 히로인과 어느 정도 연이 생겼다고 보는 게 합당했다. 문제는 그게 누군지, 무슨이유인지 모른다는 점.

정우는 자신이 알  없는 정보에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싸맸다. 이런 정보는 솔직히 골칫거리다. SP를 획득한다는 건 어느 히로인과 점점  깊은 관계가 되어간다는 뜻인데.

막무가내로 포인트를 얻었다고 좋아했다간 하렘 엔딩에 지장이 갈  있다. 하렘 엔딩은 모든 히로인에게 공평한 사람을 주어야만 가능한 엔딩이니까.

어느 한 히로인만 관계가 진척되어 있다면, 엔딩은 하렘 엔딩이 아닌 단일 엔딩으로 향한다.

그리고 누누이 말했듯이, 단일 엔딩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애초에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아이템조차 하렘 엔딩을 이루지 못하면 구매하는 게 불가능한 포인트로 되어 있으니까.

‘누구지?’

갑자기 자신에게 10포인트나 되는 감동을 느낄 사람. 자신에게 호감을 가질 사람. 당장 그가 관계를 맺은 히로인은 고작  명.

이은혜, 소우림, 마리. 이렇게 세 명뿐이다.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진 건 아무래도 은혜겠지. 종종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아니 근데 10포인트를 얻으려면 대체  한 거야? 나를 딸감으로 10연속 절정이라도  건가?’

은혜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은 주말도 아니고, 만일 그녀가 범인이라면 진즉에 얻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림이?’

그녀도 아니다. 그녀랑은 이렇다 할 관계가 없으니까. 게임 속에서도그녀가 하는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플라토닉에 가까웠으니까.

‘마지막은 마리인데…….’

이쪽은 더더욱 말이  된다. 대체 뭐에 감동 받았단 말인가? 도시락을 싸준 거? 그럼 점심시간에 감동 받았어야지.

설마 저녁이 될 때까지 도시락을 아껴두었다가, 저녁 대신으로 먹었으리라곤 생각지 못한 정우는 결국 자신에게 포인트를 준 히로인을 찾지 못했다.

“쯧, 시스템은 도움이 안 되고.”

게임 속에서 히로인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야 히로인의 CG가 바뀌었으니까.

평범한 얼굴에서 홍조가 띤 얼굴로, 나중에 가면 눈동자에서 하트가 뿅뿅 보이는 수준이었으니.

하지만 현실이  지금은 어떤가? 아무리 호감도를 올린 히로인이라고 해도 얼굴에 홍조가 생기거나 눈이 하트 모양으로 바뀌지 않는다.

‘망할 현실보정.’

제작자놈은 게임도 충분한 현실성을 따지고 만들었다고 한 주제에 정작 현실이 되니 게임이랑 다른 부분이 너무 많다.

그따구로 엔딩 낸 변명이 현실성인 주제에! 정작 게임에 표현  한 거면 능력 부족이지!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10포인트나 올랐다는 건, 히로인에게 직접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한 번씩 찔러보면 티를 낸다는 뜻.

물론 정말로 셋 중 누군가가 자신을 딸감으로 10연속 분수쇼 같은 걸 했다면 절대로 말하지 않겠지만.

정우는 그게 아니기를 빌며 다음 날을 고대했다.

* *

‘도시락통에만 몇 포인트를 쓰는 거야.’

히로인이 늘어날수록, 준비해야 할 도시락통이 늘어난다. 물론 히로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주는 포인트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게임에서는 별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현실에서 하렘 엔딩을 노리는 입장이 되니, 여간 고된  아니었다. 하렘 엔딩의 특성상 초반에많은 SP를 얻을 수 없다. 그러면서 써야 하는 SP는 히로인 수에 비례하니, 소득은 조촐한데 지출은 산더미였다.

오늘도 일찍 등교한 정우는 곧바로 마리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미친 듯이 졸린  꾸벅꾸벅 졸고는 있었지만.

정우가 앞으로 다가가자, 마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가방에서 어제 그가 준비했던 도시락통을 넘겨 주었다.

“이거, 잘 먹었다.”

“아, 맛있었어?”

“……엄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그녀를 보면서, 정우는 어제 10포인트나 상납한 범인을 알 수 있었다.

‘너였구나.’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친하지 않은 마리라면, 자신을 딸감으로 10연딸 분수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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