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얼굴을 붉히며 빈 도시락을 내미는 그녀에게서 도시락을 건네받고, 정우는 새로이 준비한 도시락을 넘겼다.
그녀는 반가운 표정으로 도시락을 건네 받았다. 그리도 좋은걸까. 정우는 혹여나 싶어 물었다.
“혹시 못 먹는 거 없지?”
“응.”
물론 게임 속 설정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정우는 게임 속 설정이 상대방의 모든 걸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알레르기가 없더라도 현실이 되면서 그냥 싫어하는 음식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럼 맛있게 먹고.”
“……야.”
“응?”
“아니, 그냥. 고맙다고.”
마리는 그 말을 남기고 책상에 엎어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곧장 잠에든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정우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도시락에 무슨 이벤트가 있던가.’
정우는 마리와 관련된 이벤트를 떠올려봤지만,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이러니까 게임 속 정보를 너무믿으면 안 된다고 하는거다.
이런 식으로 게임에선 없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니까.
공책에 마리와의 관계 향상을 적어놓은 정우는 게임 속에서 있던 이벤트들 중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벤트들을 떠올리며 그걸 어떻게 써먹을 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 다른 학생들이 등교하고 조례가 시작되었다.
“교내 글쓰기 대회가 있는데, 나갈 사람?”
담임선생님이 대뜸 그런 말을 남겼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글쓰기라는 게 생소한 일이기도 하고 애초에 곧바로 손을 드는 건 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애들을 보던 선생님은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관심 있으면 교무실로 와라.”
그 말을 끝으로 선생님은 교무실로 돌아가셨고,1교시가시작되기 전 짧은 시간동안 애들은 왁자지껄떠들기 시작했다.
정우는 선생님의 말을 곱씹으며 이벤트를 반겼다.
‘글쓰기 대회!’
히로인들 모두가 참가 가능한 이벤트였으며, 만일 히로인과 함께 대회에서 입상하면 큰 호감도를 얻을 수 있는 대회였다.
물론 누가 입상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왜냐,랜덤이니까.
‘현실성은 개뿔이.’
대회 입상이 랜덤으로 정해지는 수준에서 이미 현실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랜덤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랜덤은 아니었다.
‘국어 실력에 비례해서…….’
예를 들어 은혜를 기준으로 봤을 때, 그녀가 입상할 확률은 33%다. 세 번 중 한 번은 입상했다. 우림이는 50% 이상의 확률, 마리는 1%의 확률로 입상한다.
즉, 완전히 랜덤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입상시켜볼까.’
그리고 무엇보다, 게임에서는 완전히 캐릭터의 실력에 비례했지만 현실에서는 남이 도와줄 수도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신이 도와주면 쉽게 입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침 포인트도 있으니.’
글쓰기 실력을 기르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냥 상점에서 글쓰기 스킬을 사면되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 글쓰기 대회에 누굴 입상시키느냐, 그게 문제였다.
‘은혜? 우림이? 마리?’
사실 지금까지 상황을 정리해보면, 자신에게 가장 큰 호감을 지닌 건 은혜였다. 그다음이 마리였고, 그다음이 우림이.
실제 행동이 어찌 됐든, 절대적인 판단 기준인 시스템이 그렇게 판단했다. 왜냐하면 우림이한테는 1포인트도 얻지 못했으니까.
‘게임 속 설정은 못 믿어도, 시스템은 믿을만하지.’
당장 손에 얻은 요리 실력이나 말도 안 되는 성능의 보온 도시락, 자신의 행동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까지.
눈에 보이는 성능을 지닌 시스템은 믿을만했다. 그래, 시스템은.
‘어디 보자.’
상점을 뒤지던 정우는 중간에서 [순문의 길─초급]을 구매했다. 1포인트.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스킬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국어 성적이 오르거나, 이런 글쓰기 대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스킬이었다.
‘초급이면 되겠지.’
중급, 고급이 되면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서, 10포인트, 100포인트가 되니. 사고 싶어도 못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중급만 되어도 어지간한 프로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니까, 그 정도만 되어도 적수는없겠지만.
고등학교 교내 대회에 그 정도 기술은 필요 없다. 초급이면 충분하리라.
‘우림이를 입상시키자.’
그녀가 가장 호감도가 낮으니, 그녀를 입상시켜 호감도를 올려야 하리라. 물론 셋 중에 정우에게 고백한 사람은 그녀가 유일하지만, 정우는 그게 그저 흔들다리 효과로 인한 뇌의 착각 같은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시스템은 그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입상시킬 사람을 정한 정우는 곧장 우림이에게 다가갔다. 그녀 곁엔 항상 다른 친구들이 몰려 있었지만, 정우가 다가가자 우림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서서 교실 밖으로 나왔다.
“왜에─?”
“교내 대회, 나가지 않을래?”
“응? 글쓰기 대회인가 하는 거?”
“응. 그거.”
정우가 글쓰기 대회에 나가자고 하자, 우림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그런 걸 나가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거 나가서 뭐해?”
“내신 챙겨야지.”
“흐응─ 솔직히 난 별로 안 땡기는데.”
“같이 하자.”
정우의 말에 고민하는 척, 생각을 하던 그녀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이번 주 주말에. 우리 집에 와서 같이 하는걸로.”
“겨우 그거야?”
정우는 알았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림이는 혹시 싶어 찔러본 건데 진짜로 오겠다고 할 줄은 몰라서, 살짝 당황했다.
“어, 음…… 그날 우리 집에 아무도 없는데.”
“그래서?”
“아니, 남자애가 겁도 없이 여자 집에 혼자 놀러와? 아무도 없는 데?”
“이상한 짓 할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정우의 모습에, 우림이는 심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아, 이래서 놓칠 수 없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남자애를, 어찌 놓치겠는가.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어. 그런 마음에 사로잡힌 우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에 오면.”
그래도 올 거냐, 라는 눈빛으로 정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겠다고 답했다.
“믿고 있을게.”
그렇게 말하고 교실로 들어가는 정우를 보면서, 우림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믿을 걸 믿어야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편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 * *
토요일.
교내 글쓰기 대회에 나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우는 우림이네 집으로 향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라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누르고 기다리자, 안에서 평상복을 입은 우림이 뛰어나왔다.
“어서 와.”
목덜미가 살짝 늘어난 펑퍼짐한 흰 티셔츠에, 돌핀 팬츠. 오늘 꼭 너를 먹고 말겠다는 야한 복장에 정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안 들어 올 거야?”
“……들어가야지.”
정우가 안쪽으로 한 발짝 발을 옮기자, 공기가 바뀌었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살며시 풍겨오는 여자 특유의 향기와 살내음이 그를 자극했다.
이런 곳에 있으면 우림이 그를 덮치는 것보다 자신이 우림이를 덮치는 게 빠를지 모르겠다며, 정우는 겉옷을 벗어 스탠드형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천천히 걸어 우림이의 방으로 향한 정우는 그녀의 방안을 눈으로 훑었다. 게임 속에서 CG로 구경한 그 방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마실 거 챙겨올게.”
그렇게 말하며 우림이가 방에서 나가자, 정우는 그제야 침을 꼴딱 삼켰다. 참느라 힘들었다. 이 세상에 온 뒤로 마땅한 딸감도 못 찾아서 풀지 못한 10대의 성욕이 가득 쌓여 있는데 저런 유혹을 받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심지어 노브라였지.’
걸을 때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가슴, 흰 티셔츠 너머로 슬쩍 비치는 핑크색 무언가와 살 색 그윽한 가슴.
정우는 터질 듯이 흥분한 하물을 가라앉히려 속으로 애국가를 반복해서 삼창하면서 물건을 가라앉혔다.
“기다렸지?”
그러나 잠시 후, 우림이가 음료수를 컵에 따라 가져오면서 그의 앞에 내려놓을 때. 티셔츠로 채 가리지 못하고 중력에 의해 아래로 축 처진 가슴골을 본 순간 다시금 솟아올랐다.
“잘 마실게.”
우림이가 챙겨온 주스를 정우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음료가 몸 안을 맴돌자 뜨겁게 열을 내던 몸이 살짝 가라앉는다.
“후후, 마셨지?”
“……?”
정우가 음료수를 마시자, 우림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다.
“슬슬 반응이 올 텐데…….”
“……뭘 먹인 거야?”
그녀는 후후 웃으며 품속에서 통 하나를 꺼낸다. 상표가 붙어 있지 않은 흰색 약통. 정우는 그녀가 자신에게 수면제라도 먹였나 싶어곧장 토해내려 했지만, 그녀의 말은 그보다 빨랐다.
“종합비타민제.”
“……어?”
“슬슬 몸이 건강해지는 신호가 올 텐데.”
그건 레몬보다 신 종합비타민제였다. 그녀가 말하는 반응이란 신 음식을 먹고 보여주는 찡그린 얼굴이었으리라.
‘음료수에 섞으니 효과가 없지.’
차라리 맹물에 녹여 왔으면 모를까, 멍청하게도 그녀가 섞어 온 음료수는 오렌지 주스였다.
“……여기에 섞어오면 맛이 느껴지겠니?”
“아.”
그녀는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멍하니 주스가 따라진 컵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오렌지 주스부터 조금 신 음료수인데, 비타민을 떨어트려 봐야 얼마나 셔지겠냐.
“으음, 그러네. 다시 가져올까?”
“자리에 앉아. 시작할 테니까.”
정우는 챙겨온 가방에서 종이와 이번 대회의 주제를 꺼냈다. 주제는 친구. 주제를 본 순간부터 정우의 머릿속에는 폭발적인 영감이 떠올랐다.
‘이게 스킬의 힘.’
앞에 노브라 폭유 미소녀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정도로, 정우는 떠오르는 영감에 집중해 글을 써 나기 시작했다.
사실 이는 스킬의 힘뿐만이 아니다. 스킬은 그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줄 뿐, 그걸 어떻게 써 내려가느냐는 오로지 정우의 힘.
그리고 정우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구상만으로, 그 이상의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선천적인 크리에이터였다.
우림을 입상 시키기 위해 왔다는 사실조차 까먹은 채, 정우는 글쓰기 대회에 집중했다. 자신을 앞에 두고 글쓰기에만 집중하는 정우를 보고, 우림은 그를유혹하겠다는 생각마저 놓쳐 버렸다.
‘후우, 오늘만 봐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정우는 이미 그녀의 밑에 깔려 앙앙대고 있어야 하지만, 그가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저도 모르게 계속 바라만 보게 된다.
‘진짜, 맛있겠다.’
이 남자는 요물이다. 계속해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참게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