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안녕 정우야!”
“어, 음. 안녕 은혜야.”
정우는 은혜 머리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분홍색 깃발을 보면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제 정우가 구매한 스킬의 효과.
[미연시 가이드]
히로인의 현재 상태와 주인공을 향한 호감도를 알 수 있는 스킬.
솔직히 이런 스킬이 없더라도 CG나 대사의 변화등으로 히로인의 호감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게임 특성상, 이 스킬은 정말 포인트를 쓸 데가 없거나 그런 사소한 변화도 쉽게 감지하지 못 하는 눈새들을 위한 스킬이었다.
‘위험하네.’
머리 위에 깃발이 있다는 뜻은 이미 그녀를 공략하고 있다는 뜻이되며, 분홍색은 그 진척도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뜻을 뜻했다.
정우가 사귀자고 한 마디만 하면 곧장 사귀고, 섹스하자고 하면 당장 속옷을 벗어던질 그런 상태.
정우는 혹여나 싶어 교실 안을 훑어보았다. 놀랍게도 교실 안에는 깃발이 둥둥 떠다니는 여자애들이 넷이나 있었다.
‘이런 미친.’
세 명까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말을 건 히로인들이 세 명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뭐란 말인가.
심지어 그 한 사람은 학생도 아니었다. 담임 선생인 신주희였다.
‘당신은 선생이잖아!’
게임 설정란에 그녀의 취향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라고 써있을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한다. 뭘 했다고 호감도가 올라 공략 상태에 올랐단 말인가.
‘다행히 색은 흰 색이네.’
게임적으로 말하자면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이, 그러나 섹스 하자고 하면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즉 이 반에 지금 정우가 하자고 했을 때 수락하는 여자가 넷이나 있다는 뜻이었다.
‘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렵네.’
야스각이 선 여자가 네 명. 심지어 넷 모두 다른 매력을 지닌 미소녀, 미녀였으니.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안 돼.’
섹스는 정말 최후의 수단이다. 그나마 지금 가능성이 있는 건 은혜정도. 그녀가 아닌 다른 히로인들은 섹스로 인해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면 일단…….’
한 사람을 완전정복해야겠지. 정우는 은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혜는 자신을 바라보는 정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혜야.”
“왜?”
“글쓰기 대회 나간다며, 써왔어?”
“……아, 아직.”
“이번 주 금요일까지니까. 그때까지 쓰려면 시간이 부족할텐데.”
게임에서는 불가능했던 일 그 두 번째. 두 명의 히로인과 한 가지 이벤트를 즐긴다. 게임에선 처음부터 두 명의 히로인이 나오는 이벤트가 아닌 이상, 한 이벤트에 한 히로인.
이게 국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규제가 없다. 자신을 막을 무언가가 없다.
‘그렇다면 다 써먹어야지.’
마침 자신에게 느끼는 호감도도 가득 차있으니, 이 기회에 완전공략하는 게 편하리라.
“도와줄까?”
“아, 아니. 내가 알아서 할게.”
“아니, 도와줄게. 꺼내 봐.”
정우의 말에 은혜는 조심스레 읽던 책을 집어 넣고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정우는 그녀의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 들었다.
“자, 써 봐.”
“아, 음. 그러니까…… 주제가 뭐더라?”
“친구.”
“친구…….”
그녀는 백지노트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얼핏 보면 무슨 글을 쓸 지 고민하는 듯 보였으나,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걸 확인한 정우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쪽팔려서 그러나?’
사실 이게 교실에서 당당히 쓸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에겐 친구가 없지 않은가. 유일한 친구라고는 자신이니, 친구를 주제로 쓰는 글 또한 당연 자신이 나오리라.
어쩔 수 없이, 정우는 그녀의 글쓰기를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다.
“왜 안 써?”
“새, 생각중이야.”
“오늘 안에 완성 못 하면, 놀러가는 건 주말로 하자.”
“!!!”
그건 그녀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안 그래도 어제 놀지 못 해서 불만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오늘까지 밀린다면 아마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정우를 딸감으로 분노의 상상딸을 자행할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현자타임에 빠져 죄책감으로 혀 깨물고 자살하려다 아파서 그만두고 치킨을 뜯어 먹겠지.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과 혀에 스크래치를 낸 정우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정우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쓰, 쓸게!”
그 말과 동시에 은혜는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소 책을 자주 읽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막힘없이 글을 써내려갔다.
글을 쓰는 걸 확인한 정우는 겨우 은혜에게서 관심을 끄고 맨 뒷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는 마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깨웠다.
비몽사몽하며 깨어난 그녀는 짜증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자신을 깨운 사람이 정우라는 걸 깨닫고는 화를 풀었다.
“……뭐야.”
“저기, 글쓰기 대회 안 나갈래?”
“……안 나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엎드렸다. 정우가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자 건드리지 말라는 듯 어깨를 퉁 쳐냈다.
‘안 되겠네.’
그녀까지 입상 시켜서 세 히로인의 호감도를 동시에 올리려고 했는데, 그렇게는 안 될 모양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시킬 정도로 호감도가 쌓인 건 아니니까. 정우는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오른 깃발을 확인한 정우는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자, 애들아. 이번 주 금요일까지 접수니까 글쓰기 대회 많이들 참가하고, 수업 열심히 준비해라.”
흰색 깃발을 지닌 선생님이 그 말을 끝으로 교실을 나섰다. 아이들은 1교시 수업을 준비했고, 잠시 뒤 선생님이 들어와 수업이 시작됐다.
‘스킵이 필요해.’
고등학생으로 돌아온 건 좋았지만 학교생활은 결코 좋지 않았다는 걸 정우는 몸소 깨달았다.
* * *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은혜는 완성한 작품을 정우에게 보여주지 않은 채 곧바로 제출했다. 정우는 그 사실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일단 작품을 낸 건 사실이므로, 그녀와 함께 번화가로 향했다.
“오늘은 뭐 하면서 놀까?”
“으음…… 솔직히 학생들이 할만한 게 없기는 해.”
번화가를 맥아리 없이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오락실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래에는 대부분 망해서 몇 가게 남지 않은 오락실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양아치들의 소굴이자 잘 나가는 자영업 중 하나였다.
“와아─ 새로 생긴덴가? 엄청 깨끗하네.”
두 사람이 간 오락실에는 다행히 자리 잡고 담배나 뻑뻑 피워대는 그런 양아치들이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두 사람은 곧장 발을 돌려 집으로 런 했으리라.
“한 판 할래?”
“그럴까?”
두 사람은 가게 안에 비치된 기계에서 돈을 동전으로 바꾸고, 게임기 앞에 앉았다. 정우는 현실에서 가끔 즐겼던 대전액션게임과 판박이인 게임을 보고 추억에 잠겼다.
‘이건 내가 고수지.’
흔히 -붕-이라고 부르는 그 게임. 정우와 은혜가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하자, 오래된 게임 특유의 고전 그래픽이 정우를 반겼다.
정우는 주인공 포지션의 캐릭터를 선점하고 은혜를 기다렸다. 은혜도 어느정도 지식은 갖고 있는지, 초보자 학살기라고 불리우는 얍삽이 캐릭터를 골랐다.
게임이 시작하기 전, 정우는 은혜에게 말을 걸었다.
“은혜야, 우리 내기할까?”
“무슨 내기?”
“으음……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한테 뭐든지 들어주기?”
“……뭐, 뭐든지?”
“응. 뭐든지.”
그 뭐든지에 그렇고 그런, 살색이 노출되고 핑크색이 난무하는 그런 시츄에이션도 가능한지 은혜는 애써 묻지 않았다.
그런 걸 묻는 순간 변태 취급을 받을 게 분명 했으며,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음으로서 어떻게든 팔뚝이나 허벅지라도 한 번 만져볼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좋아! 하자!”
소원권에 눈이 돌아간 은혜는 유래없을 정도로 게임에 집중했다. 두 눈이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갈 정도로 집중하던 그녀는 시작하자마자 발차기를 난타, 정우의 캐릭터를 휩쓸었다.
‘무조건 이긴다!’
그런 열정으로 캐릭터를 조작하던 그녀는 갑자기 일어난 정우의 캐릭터를 보고 당황했다. 분명 때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일어났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정우의 캐릭터가 움직여 10단 콤보를 넣기 시작했다. 파훼법을 모르는 은혜는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맞았고.
콤보가 끝났을 무렵엔 피가 절반 이상 깎여 있었다. 그러나 아직 할만하다. 그런 생각에 공격을 맞추기 위해 은혜가 정우의 캐릭터에게 달려 들었을 때.
[오아!]
정우의 캐릭터가 일권을 날리자 은혜의 캐릭터가 쓰러졌다. YOU LOSER. 게임이 단판은 아니었으나, 허무하게 한 판을 날려 먹었다.
그제서야 은혜는 정우에게 슬며시 물었다.
“……정우야, 혹시 너. 이 게임.”
“응, 옛날에 몇 번 해봤어.”
옛날에 몇 번 해봤어라는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으나, 은혜는 그런 걸 신경 쓸 시간도 없이 시작한 다음 게임에 집중했다.
그래, 정우가 고수라는 걸 알았으니 다가가는 건 불리하다. 그렇게 은혜는 정우에게 다가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기다렸다.
은혜가 다가오지 않으니 정우도 캐릭터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1분이 흐르고, 게임은 무승부로 끝났다.
은혜는 두 사람 모두 한 칸씩 오르는 승점을 보고 좌절했다. 자신이 이기기 위해선 그에게 먼저 접근해야한다.
그러나 초보인 자신이 그에게 접근하면? 지옥이다. 그렇기에 쉽게 접근하지 못 했다.
은혜가 겁을 집어 먹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정우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에게 필살기를 사용했다. 뭐가 뭔지 모르던 은혜는 그저 뒤로만 걷다가 운 좋게 필살기를 피했다.
“어!?”
그리고 공격, 은혜는 자판이 부서져라 키를 난타했고, 정우의 캐릭터를 쓰러트렸다. 그렇게 게임은 2대 2가 되었다.
마지막 라운드. 은혜는 평생 느껴본 적 없었던 집중력으로 접근했다. 정우가 1나노미터라도 움직이는 순간 몸을 피해 공격을 회피하고, 곧바로 반격.
그렇게 피를 깎은 뒤에는 미친듯이 도망을 다니며 시간을 끌었다. 남들이 보면 졸렬하다고 말하겠지만 은혜에게 있어선 전략이었다.
결국 아주 미세한 차이로 은혜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은혜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팔을 크게 들어 올려 만세 삼창을 했다.
“이겼다! 소설 1부 끝!”
“푸흡!”
“……?”
은혜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정우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배꼽을 부여잡고 웃는 정우를 보며 은혜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왜 그래 정우야?”
“……아니, 아까 내가 뭐라고 했지?”
“이, 이기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고?”
“아니.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한테 한 가지 소원 들어주는거였는데.”
그 말에 은혜는 몸을 굳혔다.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려가며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랬던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정우가 은혜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은혜가 정우의 부탁을 들어주어야만 한다.
“자, 그럼. 소원권 바로 써볼까?”
정우는 함정에 빠져 기뻐하던 은혜를 보며 곧바로 물었다.
“소원권 받으면, 나한테 뭐 시키려고 했어?”
“아, 음. 그…… 숙제 도와달라고?”
“거짓말 하지 말고.”
“……팔뚝 만지게 해달라고?”
“그게 다야? 설마?”
제정신이었다면 말할 리 없을 말을, 극한의 흥분상태까지 올라갔다 떨어진 상태의 은혜는 조심스레 담으려 하고 있었다.
말을 해서 정우를 실망시키는 것보다, 그에게 거짓말을 해 실망시키는 게 더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은혜는 처음 자신이 떠올렸던 말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스.”
“뭐라고?”
“하, 한 번 하게 해달라고…….”
설마 그렇게 대놓고 성욕을 드러낼 줄 몰랐던 은혜를 보며, 정우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