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한 번만 하게 해달라고…….”
“우리 은혜는 나한테 뭘 해달라고 하려고 했을까?”
정우는 여자애들이 유약한 남자애들을 괴롭히는 심리를 깨달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이렇게 크게 반응하는 게 왜 이렇게 귀여운지.
하는 짓도 생긴 것도 귀여우니 괴롭히는 맛이 났다. 은혜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비비며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스.”
“스?”
“키, 키스.”
키스, 그러나 정우는 키스가 아닌 다른 스를 말하려다 인내심을 발휘해 방향을 틀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귀엽네.’
그래, 뭐. 외국에서는 키스를 인사 대신 한다고 하니까. 딱히 상관 없겠지. 정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은혜는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정우의 얼굴을 보고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내밀었다.
정우는 그런 은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다가 그녀의 이마를 들추고 손가락 한 개를 붙이고 그 위로 입을 맞췄다.
“……!!”
눈을 감고 있던 은혜는 그게 입술인지 손가락인지 구분하지 못 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얼굴때문에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 입상하면, 제대로 해줄게.”
“어? 응?”
“돌아가자.”
“자, 잠깐만! 방금 뭐라고 했어!?”
해가 저묵저묵 져가는 시간. 저녁이 되어도 일이 바빠 만나지 못 하는 미래와 달리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집으로 돌아와 오붓하게 식사를 하는 시간.
학생들은 밤 늦게까지 놀지 않고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다. 은혜와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잘 가.”
“아까 뭐라고 했냐니까?”
은혜는 끝까지 궁금증을 놓지 못 했지만, 정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배웅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정우는 간단하게 저녁을 해먹은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마치고 미래에 대한 건실한 생각을 하고 있던 정우는 졸음을 참지 못 하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정우는 아침부터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는 은혜를 발견했다. 살금살금 다가가보니 어제 제출했던 글을 퇴고하고 있었다.
“뭐해?”
“저, 정우야! 좋은 아침!”
그녀는 정우가 온 걸 확인하자마자 종이를 책상 서랍 안으로 숨겼다. 보여주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보여달라 할 정도로 정우는 야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뭔데뭔데? 왜 숨겨?”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데 왜 숨기냐니까?”
야박한 사람은 아니고 그저 은혜를 놀리는 데 특화된 사람이었다. 정우가 치근덕대며 그녀의 살결을 은근슬쩍 터치하자, 그럴때마다 은혜는 찔끔찔끔 멈춰섰다.
그렇게 움찔대며 멈춰선 순간, 정우는 뛰어난 순발력으로 그녀가 쓰고 있던 종이를 뺏는 데 성공했다.
“야, 야! 돌려달라고!”
그녀가 정우의 위를 덮치며 종이를 뺏기 전, 정우는 재빨리 모든 글귀를 훑어보고 고칠 부분을 찾아냈다. 속독은 특기요, 거기서 고칠 부분을 찾아내는 건 정우가 평생 해오던 일 중 하나였다.
“잘 썼는데?”
“……그래?”
혹여나 정우가 자신이 쓴 글을 보고 놀릴까 걱정했던 은혜는 오히려 잘 했다고 칭찬하는 정우를 보고 멈칫했다.
그래, 그는 다른 년놈들처럼 자신을 괴롭히고 얕잡아보는 쓰레기가 아니었다. 친구. 절친. 소꿉친구. 듣기만 해도 절정에 오를 거 같은 그런 존재였다.
은혜가 칭찬에 부끄러워 하며 멈춰선 순간 정우는 다시 은혜가 쓴 글을 뺏어 들었다. 이번엔 아까와 달리 큰 저항이 없었다.
이미 정우가 그녀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학습했기 때문일까. 정우는 그녀의 글귀에서 어색한 부분, 비문으로 보이는 부분을 수정하고 알려 주었다.
“여기랑 여기는 이렇게 쓰면 안 되고…… 아, 여긴 오타가 있네.”
정우의 도움을 받아 글을 완성해나가면서, 은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입상하면 나랑 키스하는 거 맞지? 그렇지?’
분명 그랬다. 이번엔 알량한 말장난으로 속여 넘길 수 없으리라. 자신이 입상하면 키스를 해주겠다고, 분명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성심성의껏 자신의 글을 수정해주고 있었다. 책을 좀 읽어본 그녀는 그게 자신이 썼던 글보다 훌륭한 수준의 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즉, 이대로 가면 자신이 입상할 확률이 늘어난다. 자신이 입상하면 그와 키스를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그도 자신과의 키스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역시 정우도 나를…….’
착각에 빠진 은혜는 정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냥 고백하면 될텐데, 남자애라 그런지 이런 식으로 돌려서 말하는 걸 좋아하는걸까.
여기선 자신이 여자답게 먼저 고백해야하는 게 아니락.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찼다.
“그럼, 열심히 해.”
“응.”
자신을 응원해주는 상투적인 말조차 사랑을 속삭이는 단어로 들리게 된 은혜는 아예 글쓰는 것도 잊고 정우의 얼굴을 훔쳐보다, 배시시 웃었다.
그런 은혜를 보면서 정우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은혜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오늘도 크게 별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고, 내일도. 내일 모레도. 그렇게 일주일이 모두 태평하게 지나갔다.
금요일까지였던 글쓰기 대회도 마감이 되었고, 새학기의 풍취가 흐르는 3월도 끝이 났다. 그리고 4월이 왔다.
“정우야! 나랑 사귀자!”
4월의 첫 날. 학교에서 마주친 은혜가 대뜸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만우절(April Fool's Day). 은혜는 만우절의 힘에 기대 정우에게 장난 고백을 했다.
물론 받아들이면 좋고, 거절하면 만우절 장난이었다고 박박 속일 수 있는. 아무리 고백해도 손해가 없는 그런 날.
정우는 만우절이 생긴 게 어쩌면 이런 겁 많은 겁쟁이들이 숨김 없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라는 의미로 생긴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럴 리 없지만.
“그래.”
“어?”
“왜 그래? 사귀자며?”
정우는 은혜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을 들이 밀었다. 은혜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얼굴을 붉히며 뒤로 살살 물러났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오늘 만우절인데…….”
“아는데?”
“그래! 너도 알겠지!? 내가 한 말이 거짓말…….”
“나는 거짓말 아닌데.”
“어!?”
그 말에 당황한 은혜가 걸음을 멈췄다. 혹시나 싶어 정우를 올려다봤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오해와 착각이 정우의 말을 진짜라고 믿게 만들었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킨 은혜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지, 진짜……?”
“응, 아니야.”
“……아악!”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은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정우에게 달려들었다. 화악하고 올라오는 은혜의 향기에 정우는 조금 설레임을 느꼈다.
두근두근두근.
딱 들어도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에 은혜는 살며시 물었다.
“그럼 이 심장소리도, 거짓말이야?”
“……응. 네가 달려들어서 깜짝 놀란거야.”
“정말로 정말?”
“진짜.”
거짓말이라는 건지, 진짜라는 건지, 너무나 애매해서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둘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뿐.
“그래. 알았어.”
“응.”
대화가 끝난 두 사람은 살짝 떨어졌다. 끝날때는 약간 어색해져 있었다. 은혜도 정우도 각자 다른 이유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뒤로 돌리고 속마음을 숨겼다.
물컹!
“정우야압!”
그때, 등교한 우림이가 정우에게 달라 붙었다. 여자가 남자의 몸을 껴안는 건 남들이 보기에 좋은 행동이 아니었으나, 정우는 신체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가슴에 신경이 팔려 그런 걸 지적할 새가 없었다.
“좋은 아침!”
“우림아, 갑자기 무슨 일…….”
“무슨 일이긴! 우리 어제부터 사귀기로 했잖아!”
금시초문, 들은 적 없는 얘기를 꺼내는 우림이의 모습에 정우는 그녀가 만우절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은혜는 방금 막 자신이 만우절 장난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림이의 장난을 이해하지 못 하고 진심이라 여겼다.
“저, 정말이야……?”
“응! 정말이지! 이 모습을 봐.”
꾸우욱─
우림이가 그렇게 말하며 가슴이 짓눌리도록 달라 붙었다. 교복이 터질듯이 늘어나며 가슴을 팽창시키자, 은혜는 그 가슴에 압도되어 그녀의 말을 믿고야 말았다.
“아, 아아…… 그래, 그렇구나. 내가 안 되는 이유가…….”
“야, 은혜야. 누가봐도 거짓말이잖아.”
“응? 그게 무슨…… 아! 오늘 만우절이었지!”
그제야 오늘이 만우절이고 우림이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은혜는 그녀를 노려보며 정우의 목을 감싼 우림이의 팔을 풀어 헤쳤다.
“뭐하는 거야!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그럼 넌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왜 달라 붙었어?”
“어, 그, 그건…….”
“그치? 나도 달라 붙어도 되지?”
“그걸 왜 니들끼리 정해?”
정우는 남자답지 않은 힘으로 우림이의 팔을 풀어내었다. 가슴의 감촉은 천상의 구름처럼 푹신 했지만, 그게 독이 든 성배나 다름 없다는 걸 정우는 알고 있었다.
‘이 망할 가슴!’
자신이 빈유 취향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정우도, 빈유는 2D로 볼 때만 좋다는 걸 깨달았다. 실제 육신에 닿으니 빈유는 무슨, 거유가 짱이다. 폭유는 폭발이다.
“그래서, 무슨 짓이야?”
“으음, 정우랑 어제부터 사귀는 장난? 짜잔, 만우절이었습니다.”
우림은 태연하게 거짓말이라고 말하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가면서 정우의 머리칼을 흐트려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림이 헤쳐놓은 머리칼을 정리하며, 정우는 은혜와 그녀의 뒷담화를 즐겼다. 은혜에 대한 질투심을 그녀의 가슴 크기만큼 가지고 있던 은혜는 그 이야기에 잘 어울렸다.
한참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조례 시간이 되어 선생님이 들어오고, 선생님은 매일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내뱉었다.
“자, 4월이라고 긴장 풀지 말고, 이번 달에 중간고사 있는 거 알지? 너네들 첫 시험이니까 최선을 다해라. 이상.”
벌써 시험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4주는 남았다고는 하지만, 입학한 게 벌써 4주가 지났다고 생각하면 그리 긴 것도 아니었다.
은혜는 중간고사가 조금 걱정되는 눈치였다. 하긴, 그녀는 공부가 특기가 아니었으니까.
“은혜야, 공부 도와줄까?”
“응? 뭐가?”
“아니, 시험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
“아…… 응. 맞아.”
그녀는 다른 걸 생각하고 있던 눈치였는데, 그녀답지 않은 센스를 발휘하여 정우의 말에 응답했다. 그런 은혜를 보며 정우는 뭐가 문제인지 생각했다.
‘뭐지?’
그녀가 이렇게 고심할 문제가 성적 말고 또 있었나 싶지만, 정우의 머리로는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수업이 시작하고도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선생님의 주의를 받고 나서야 수업에 집중했다.
* * *
‘아아, 발표는 대체 언제 나오는거야.’
은혜는 저번 주에 낸 글쓰기 대회에 결과 발표를 학수고대했다. 그 결과가 나와서 자신이 입상하면, 정우가 키스를 해준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키스, 연인의 가장 달콤한 행위이자, 전희. 섹스를 하기 전 많은 커플들이 키스를 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즉 키스는 섹스다. 키스를 하면 섹스도 할 수 있다. 그런 낙관적인 생각이 은혜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키스키스키세스키위스키.’
키스와 관련된 단어들이 그녀의 뇌를 헤집어 놓았다. 키스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정우의 부드러운 입술과 촉촉한 혀가 떠올랐고, 그녀의 하복부는 투명하게 물들었다.
‘정신나갈거같아정신나갈거같아 결과는 언제 나오는 거야!!’
키스에 정신이 팔린 은혜는 미칠 거 같은 충동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키스로 발열된 몸은 진정할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은혜야?”
옆 자리에서 정우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으나, 은혜는 그의 빛나는 눈동자보다 탐스러운 입술이 눈에 더 들어왔다.
“……스.”
결국 열병이 난 그녀는, 그대로 교실에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