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키스!”
은혜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모르는 장소에 누워 있었다. 미묘하게 풍겨오는 악취와 격자 무늬의 천장.
학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푹신한 침대와 베개, 그리고 커튼. 그제야 은혜는 이곳이 양호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에?’
그때, 은혜가 지르는 소리를 듣고 양호 선생님이 다가왔다. 그녀는 은혜의 상태를 보고서 물었다.
“괜찮니?”
“네? 아, 네. 근데 제가 여긴 왜…….”
“너 쓰러져서 업혀왔어.”
“……누구한테요?”
“남자애한테.”
은혜는 그 남자애가 정우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남자에게 업혀 양호실로 실려 왔다는 전설이 생길 거라는 사실도 눈치 챘다.
‘아, 쪽팔려.’
여자가 되어서 남자한테 업혀 실려 오다니, 아마 평생 술안주거리가 되어도 모자라리라. 은혜는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런 그녀를 보고서 양호 선생님이 말했다.
“가게? 조금만 더 쉬다 가지?”
“아뇨, 괜찮은 거 같아요.”
“그래? 그럼 조심해서 가라. 아, 가는 길에 물도 마시고.”
“네. 감사합니다.”
은혜는 양호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급수기에서 물을 떠 마시고, 화장실에 들려 볼일도 봤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남의 교실을 훔쳐보는 건 그 나름의 맛이 있었다.
‘지금 시간이…….’
몰래몰래 다른 교실을 훔쳐보며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12시가 지나 있었다. 2교시까지는 듣던 걸 기억하는데, 2시간이나 기절해 있던걸까.
‘걱정하겠네.’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며, 은혜는 조심스럽게 교실로 복귀했다. 수업 도중 뒷문이 열리자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들은 뒷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은혜인 걸 확인하고 다시 칠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숙이고 앞자리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은혜는 곧장 정우로부터 걱정을 들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갑자기 왜 쓰러진거야?”
“모르겠어.”
아마 그날인데다가 흥분이 겹쳐서 그런 게 아닐까, 어렴풋이 예측할 뿐이다. 수업시간이라 그런지 정우도 그리 길게 캐묻지 않았다.
12시에 들어왔기에 수업이 빠르게 끝나고,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학생들도 그깟 질문보다 당장 먹을 급식이 급했기에 곧장 급식실로 뛰어갔다.
교실에는 도시락을 챙겨먹는 은혜와 정우, 우림이와 잠을 자고 있던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정우는 도시락을 꺼내며 마리를 깨웠다.
“하아암, 벌써 점심시간이야?”
마리는 정우에게 도시락을 받아 챙긴 뒤 급식실로 향했다. 예전에는 급식실에서 밥을 먹나 싶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녀가 정우의 도시락으로 저녁을 챙겨먹는다는 걸.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만 2인분씩 싸올 수는 없는 법.
정우는 홀로 급식실로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남은 두 사람과 도시락을 까먹기 시작했다.
“자, 고기 먹어 고기.”
“그래, 갑자기 쓰러진 거면 빈혈 아니야? 철분제좀 줄까?”
은혜의 도시락통에 자신의 고기를 얹는 정우와, 영양제를 챙겨주려는 우림이를 보며 은혜는 자신이 이렇게나 학창생활을 잘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이제 여기에 키스만 받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 같은데, 그런 마음을 담으며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우림이의 시선을 느끼고 젓가락을 들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언제 먹어도 맛있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다 난다. 눈물을 삼키며 정우가 덜어준 제육볶음을 먹은 그녀는 강렬한 매운 맛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콜록! 잠, 목에 양념이, 콜록!”
“물 마셔, 물.”
“케엑! 콜록!”
은혜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정우가 따라 준 물을 삼켰다. 물을 마셔도 목을 건드리는 매운 따끔거림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뭐가 이렇게 매워…….”
“미안, 조금 맵게 만들었네.”
은혜가 콜록거리고 있자, 정우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냈다. 볼을 딱 붙잡고 입술을 닦으면서 스치는 그의 손가락이 너무나 달콤했다.
“……짜.”
“짜다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입술과 혀에 닿은 그의 손가락 맛을 기억하며, 은혜는 도시락을 싹싹 비우고 양치를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뒤에서 우림이 칫솔을 들고 같이 뛰어와 그녀와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선 두 사람은 치약을 짜내며 입을 열었다.
“좋냐?”
“……뭐가.”
“정우한테 그렇게 안기니까 좋냐고.”
은혜는 기억하지 못 하는, 정우에게 업혀 양호실로 실려갔던 일을 찌르는 우림. 은혜는 거울 속 너머의 그녀와 눈을 마주치면서 입을 행궜다. 거품이 가득 세면대로 떨어졌다.
“시끄러워. 알 바 아니잖아?”
“아니긴, 우리 정정당당히 하기로 했잖아. 정정당당히.”
우림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 고개를 비틀며 눈을 마주쳤다. 은혜는 머리채를 붙잡혀 속절 없이 그녀에게 끌려갔다.
“안 놔?”
“야, 이따위로 할 거야? 응? 정말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해볼까?”
폭력. 예전의 은혜였다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 하고 그대로 강렬한 적의에 노출되어 약자가 되었겠지만, 이젠 은혜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퉤, 하고 입안 가득한 거품 째 그녀의 눈에 침을 뱉은 뒤 손에 들고 있던 칫솔로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목을 강하게 찔렀다.
그녀는 손을 놓고 눈을 감으며 뒤로 물러섰다. 미끄러운 바닥에 자칫 넘어질 뻔 하기도 했지만 운 좋게 넘어지지 않았다.
“이, 씨발년이…….”
“뭐, 먼저 시비건 건 너 아니야?”
두 사람이 불이 붙었고, 우림이 먼저 물을 틀어 얼굴 가득 묻은 더러운 침을 닦아내면서 두 사람의 싸움은 막을 내렸다.
“후우, 은혜야. 페어플레이 하자고. 페어플레이. 소꿉친구랍시고 계속 그렇게 앵기면, 진짜 나 정우 덮쳐버린다?”
“지랄하네.”
은혜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녀가 실제로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우는 그녀를 그저 가슴 큰 골빈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지만, 피식자는 포식자를 알아본다고.
그녀는 우림이 고작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일이 수틀리게 되면 정말로 정우를 덮치고 강간할. 그런 여자였다.
“너도 그런 거 싫잖아. 솔직히 네가 나 보다 돈이 많아, 얼굴이 예뻐, 가슴이 커? 셋 다 안 되잖아.”
“…….”
“그래서, 네가 정정당당히 매력만으로 승부하면 나도 그 세 개 안 쓰겠다고. 돈으로 유혹 해서 안 넘어올 남자가 몇이나 될 거 같니?”
“정우는.”
정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확실할 수 있을까. 정우가 돈을 받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가 될까, 은혜는 당당히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돈에 크게 휘둘리는 사람이니까 돈을 받지 않았던 게 아닐까. 돈의 마력을 잘 알고 있으니까 한 번 받으면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정우는 뭐?”
우림이도 그 사실을 알고 씨익 웃었다. 은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그녀를 찔러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보다 체격도 힘도 좋은 그녀를 정면에서 이길 기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역으로 제압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끝없이 대립하고 있을 때,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애들아, 똥 싸냐?”
“……잠깐만 기다려!”
밖에서 들려오는 정우의 목소리에 우림이 재빨리 칫솔을 닦아내고 입안을 물로 행군 뒤 밖으로 나갔다. 은혜도 양치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 * *
“으윽…….”
“또 왜?”
“아니, 아무것도.”
정우는 우림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뒤로 돌리는 걸 확인했다. 평소라면 또 장난을 치는거겠거니 싶겠지만, 이번에는 무언가가 달랐다.
“보여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아─.”
우림은 시치미를 떼며 손을 숨겼지만, 정우는 억지로 힘을 써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겼다. 손을 붙잡자 그녀가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우는 빨갛게 물들고 부어 오른 그녀의 손목을 발견했다.
“이거 왜 이래?”
“실수로 미끄러져서.”
그녀는 은혜를 바라보며 화장실에서 미끄러졌다 말했다. 정우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의 말을 믿었다. 가슴이 커지면서 운동치가 된 그녀는 자주 미끄러지거나 하는 덜렁이 속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크게 부풀지는 않았지만, 딱 보기에도 아파보이는 손목에 정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손목 부위를 주물렀다.
“읏…… 아파.”
“붕대 감아야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니면 뭐, 마사지라도 해줄까?”
이런 타박상에 마사지가 효과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림이는 마사지를 거부하지 않았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우림이의 손목을 주무르며 마사지를 시작했다.
“흐읏, 흑.”
“……그렇게 아파?”
“아니, 참을만…… 하응!”
정우가 손을 주무르자 그녀는 거센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파서 그런 걸로만 생각했지만, 그녀의 신음을 잘 듣다보니 고통에 비명 지른다기 보다 쾌락에 신음하는 쪽에 가까웠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들켰나?”
그녀의 말을 들은 정우가 일부러 부운 자리를 강하게 눌렀다. 우림이는 고통을 지르면서 정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아아아! 아파! 진짜 아파! 부러져! 부러진다고!”
“안 부러져.”
“손목 부러져! 진짜 부러져!”
엄살을 부리는 그녀의 손목을 놓고서 정우는 자리로 돌아갔다. 손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던 우림이는 그런 정우의 행동을 보고서 다가와 물었다.
“헤에, 우리 정우 삐졌어? 삐져써?”
“아니.”
“으응, 화풀어. 화 풀면 이 누나가 가슴 만지게 해줄게.”
“네 가슴엔 아무런 가치도 없거든.”
“야.”
그때, 은혜가 양치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왔다. 우림이는 그런 은혜를 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아, 은혜 왔어?”
“저리 비켜.”
은혜는 마치 자기 남자를 지키듯 우림이와 정우 사이를 갈라놓고 그 사이에 섰다. 우림이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두 손을 들어 올려 항복 표시를 했다.
“아하하,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그리고 과장스런 행동을 하면서 손목을 강조했다.
“아야야. 갑자기 손목이 아파지네.”
“……정우야, 자리로 가자.”
“아니,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가자니까.”
은혜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정우를 질질 끌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원래 자기 자리에 정우를 앉히고 정우를 감쌌다.
그 모습이 마치 자기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고양이같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두 사람 사이에 낀 정우는 그저 의문을 표하며, 은혜의 말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