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NO.1 이은혜를 잊지 않아
드르륵!
점심시간, 교실에서 사람이라도 죽인 듯 한 표정의 은혜가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정우는 조심스레 자신의 자리로 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저, 정우야! 괜찮아!?”
워낙 그를 걱정하고 있던 걸까, 은혜는 다가온 정우에게 빠르게 달려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정우는 유래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은혜를 내려다보았다.
“……미안, 너 누구였지?”
“……뭐?”
하지만 정우는 그런 그녀를 보고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무표정으로 응답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마냥 그녀를 밀어내고 다시 묵묵히 가방을 챙겼다.
“서, 설마 기억 상실증?”
평소 책을 달고 살던 은혜는 그런 정우의 반응을 보고 곧바로 기억 상실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정우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챙겨 나가는 척을 했다.
“어, 어디 가는거야?”
“병원에.”
“역시 크게 다쳤구나…… 나 때문에…….”
“너 때문에?”
은혜의 말을 들은 정우가 은혜를 붙잡는다. 어깨를 붙잡힌 은혜가 흠칫 놀라며 정우를 바라봤다.
“너야?”
“어? 뭐, 뭐가?”
“나를 이렇게 만든 녀석이.”
“……맞아.”
정우의 말을 들은 은혜도 심각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이 심각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덩달아 심각해진 우림이가 끼어 들었다.
“그래서 정우야, 언제까지 그럴거야?”
“……무슨 소리를.”
당황한 정우가 변명을 내뱉었지만, 우림이는 논리정연하게 이상한 점을 짚어 나갔다.
“진짜 기억 상실증 걸렸으면 여기로 오는 게 아니라 구급차나 선생님 차를 타고 병원으로 바로 갔겠지? 가방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
“그리고 그 정도 일이면 이미 학교가 난리가 났겠지. 근데 아무 일도 없어. 이게 바로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지, 진짜야?”
“푸흡.”
정우는 아무 말 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진실을 밝혀냈다. 심각한 표정이었던 은혜도 장난이라는 사실을 알고 똑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뭐야, 장난이었어?”
“장난 같아?”
“어?”
“장난 맞아.”
“아, 정말!”
끝까지 장난을 멈추지 않는 정우의 행각에 은혜는 정우를 끌어 안았다. 물론 그녀의 키가 정우의 키보다 작았기에 안는다기는 보다 껴안기는 형태가 되었지만.
“……미안.”
“맞다. 네가 밀어서 넘어졌지?”
“민게 아니라 끌려간기기는 하지만…….”
“그래서, 어땠어?”
“응?”
정우의 말에 은혜는 그제야 자신이 정우와 부딪히면서 입술을 부딪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입술과 입술이.
‘처, 첫 키스?’
과연 이런 사고도 키스로 쳐주는지 아닌지, 그런 건 전혀 상관 없었다. 중요한 건 그녀가 정우와 입을 마주쳤다는 사실.
키스했다는 사실뿐이다.
“처, 처처처처처. 첫 키스?”
“으음, 부모님을 제외하면 첫 키스긴 한데.”
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은혜의 얼굴을 탁, 붙잡았다. 쫀득쫀득한 볼을 붙잡힌 은혜는 고개를 돌리지 못 하고 정우와 눈을 마주했다.
“그래서, 내 첫 키스 맛이 어땠어?”
“아, 으아아, 흐아아아…….”
첫 키스라는 말을 듣고 정우의 입술을 바라보던 은혜의 얼굴이 곧장 새빨갛게 물들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미세하기 김이 나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정우는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읏, 흐윽, 처, 첫 키스. 아, 아아. 그래, 응. 첫 키스. 아으, 하, 우히. 하.”
언어능력을 상실한 은혜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봐주고, 고개를 들어 우림이와 눈을 마주치자 우림이는 갑자기 현기증이 난 것 처럼 머리를 붙잡고 쓰러지는 연기를 시작했다.
“아아, 갑자기 현기증이…… 누가 인공호흡을 해주면 괜찮아질 거 같은데…….”
우림이는 티 나는 연기로 자신도 키스를 해달라며 입술을 싸악 핥았다. 그러나 그게 연기라는 걸 알고 있는 정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해?”
“아, 왜 나만 왕따시켜? 나도 입술 박치기 해줘. 입술 박치기이~”
“미쳤구나.”
“아아, 정신 나갈 거 같아─ 현기즈으응!”
정우가 입술을 대주지 않자, 우림이는 스스로 그에게 다가가 입술을 훔치려 들었다. 그러나 정우는 그녀의 머리를 밀어내며 입술을 지켜냈다.
“징그러.”
“내가 징그러워? 이렇게 귀여운데?”
“응.”
“아아, 그럼 어떻게 하지? 이 얼굴 가죽을 벗겨낼까?”
“그냥 뒤로 물러나줄래?”
정우의 말에 우림이는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혜도 우림이 더 이상 수작을 부리지 못 하게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밥이나 먹을까?”
그렇게 얼마나 대치했을까, 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도시락을 꺼냈고 두 사람은 대치를 끝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면서, 정우는 무언가를 까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무언가를 까먹은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 * *
[대상. 1학년 1반. 하정우]
정우는 강당에 올라가 교감에게 상장과 문화상품권이 든 봉투를 받았다. 그 다음 우림이와 은혜도 올라가 상장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우림이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덤덤하게 상장과 상금을 받아 들였다. 하늘에서 조명이 그녀를 쬐는 게 마치 천사가 내려앉는 듯 했다.
“감사합니다!”
돈으로 환금할 수 있는 상품권을 받은 은혜는 마치 황금이라도 주운 것 마냥 기뻐했다. 입가에 가득 핀 미소가 세상을 뒤덮었고, 정우의 정신을 장악했다.
[CG 회수 성공]
[우림의 입상]
[10SP를 획득했습니다!]
[CG 회수 성공]
[은혜의 입상]
[10SP를 획득했습니다!]
우림이와 은혜의 입상을 구경하자 CG를 회수했다는 말과 동시에 포인트를 획득했다. 이게 다인가 하고 실망하던 그때, 시스템이 비명을 질렀다.
[ERROR]
[CG 회수 #%]
[#@$의 입상]
[ERROR]
한동안 멈추지 않던 알림은 어느 순간 뚝 그치고, 정우의 눈앞에 정렬된 형태로 나타났다.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하셨습니다.]
[10SP를 획득하셨씁니다.]
[40SP를 획득하셨습니다.]
“……?”
10SP를 얻은 건 이해할 수 있다. 입상하면 다 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러나 40SP는 어째서 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러나 그 이유는 잠시 후 알 수 있었다. 흰 색이었던 선생님의 깃발이 약간 주황색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아예 주황색이던 마리의 깃발은 노란색으로, 분홍색이던 은혜의 깃발엔 아예 하트 무늬가 뿅뿅 튀어 나오고 있었다.
‘나한테 호감을 가진 사람들 전부 업이라고?’
현실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교내 대회 자체가 시스템의 힘을 얻은 이벤트였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격한 역겨움또한 느끼게 되었다.
‘……그럼 그녀들이 사랑하는 건 뭐지?’
지금까지 정우는 자신이 노력하여 호감도를 올렸다고 생각했다. 그건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정우가 한 만큼. 그가 노력한만큼 호감도가 올랐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건 뭔가, 저 위에 있을 초월적인 무언가에게 세뇌되어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에 불과하지 않나.
‘역겨워.’
순수한 사랑이 아닌, 저 위에서 내려다 볼 정체불명의 스파게티 괴물 같은 녀석들에게 조작당해 생긴 가짜 사랑.
자신은 그 사랑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 진짜 사랑이 가짜 사랑에 오염되어 가는 모습을 구분할 자신이 없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정우는 웃었다. 가짜 웃음. 가짜 세상과 가짜 사랑에 이어, 가짜 웃음이었다. 가짜에게 잘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정우는 웃지 못 했다. 이 세상에서 진짜는 그저 자신뿐이요, 자신만이 진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중압감에 억눌려 속이 울렁거렸다.
‘안 돼.’
정우는 곧장 상점에서 [비타민 Q]를 구매해 들이켰다. 정신적 피로도를 낮춰주는 아이템이었다. 현실에선 신경안정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후우.”
스킬이나 아이템들은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곧바로 성능이 발현되었다. 정우의 정신은 정상으로 돌아갔다. 정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상이었다.
“……정우야, 괜찮아?”
“응? 아아. 괜찮지.”
옆에서 그런 정우를 훔쳐보던 은혜만이 이상함을 느끼고 말을 걸었다. 그래, 그녀는 가짜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이 반응만큼은 진짜다.
그렇다면, 가짜에게서 진짜를 느끼는 게 이상하다고 할지어도. 괜찮지 않은가. 이 정도 일탈은 나쁘지 않은 게 아닐까.
‘돌아가고 싶다.’
때때로 이따금씩, 이렇게 향수감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모든 것을 끝내기/10,000포인트]
[현재 포인트 : 107]
너무나 멀어서, 손에 닿지 않을 것 처럼 보였다.
* * *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자신이 하는 행동이 맞을까, 하렘 엔딩이 정답이 맞을까. 나는 틀린 길을 향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포기하고 싶다.’
친구들과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포인트를 번다. 좋다.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고작 그런 일로 1만 포인트를 모으는 게 가능한 일일까.
‘불가능해.’
정우가 지금까지 모은 모든 포인트를 모조리 합산해도 300포인트가 되지 않는다. 시간은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 1년은 12개월, 게임은 고등학교 3년동안 이루어지니.
1 포인트도 안 쓰고 지금까지의 페이스대로 모조리 모아야 1만 포인트가 아슬아슬하게 가능하다.
그러나 정우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대로의 페이스라는 게 불가능하다.
‘애초에, 포인트는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만 주어지니.’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니 무얼 그려도 쉽게쉽게 점수를 벌 수 있다. 백지 시험지에 한 문제만 찍어서 맞춰도 점수가 무한대로 상승하듯.
아무 경험도 없는 지금에야 모든 게 새롭고 신비한 경험이라, 포인트를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해야만 했다. 섹스를. 교접을. 누구와?
‘그녀들과.’
과연 자신이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까, 정우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