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NO.2 소우림 가슴은 소를 우림
이른 아침. 우림이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바람이 나뭇잎을 핥고 지나가며 내는 소리와, 따듯한 태양의 소리가 그녀를 맞이한다.
뚝.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집에 새가 있거나 나무가 있을 리 만무. 그건 그저 녹음해둔 알람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림이는 이 소리를 가장 좋아했다.
‘개운해.’
이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개운하다. 정말로 숲속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든다. 현실은 콘크리트로 된 마천루에서 눈을 뜨지만.
“콜록!”
아침 공기는 차다. 봄이라 할 수 있는 4월에도 새벽에 그윽 쌓인 냉기가 주변을 덮친다. 하지만 그녀는 이 찬 공기를 좋아했다.
“우림아! 뭐하는거니!”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다. 우림이 창문을 열고 아침 바람을 쐬고 있으니 금세 달려와 그녀를 타박하고 문을 닫는다.
“몸도 안 좋은 애가 이러면 어떻게 하니!”
“괜찮아요. 제 몸인데요.”
“네 몸이 네 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생각하렴.”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몸이 안 좋은 우림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그래서 일까, 이젠 그녀를 자식이라기보다 많은 노력을 가한 귀중품쯤으로 보는 듯 했다.
‘짜증나.’
“알았어요. 밥 먹어요.”
“그래. 빨리 씻고 와라.”
곧바로 화장실에 들려 세수를 하고 식탁에 앉은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 동시에, 정우가 한 번씩 해주었던 반찬.
“잘 먹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들어 하나 집어 들어 먹었다. 고기 산적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바스라지며 안에 담고 있던 고기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맛도, 향도 훌륭하다. 고기도 좋은 걸 쓰는 지 질이 좋다. 혀에 닿자마자 녹아내린다.
‘부족해.’
하지만 부족하다. 이 요리에는 사랑이 없다. 그도 그럴 게 그냥 동네 반찬가게에서 사온 걸 뎁히고 올려놓을 뿐이니까.
사랑이 있을 리 없다.
‘정우는 달라.’
그가 싸주는 도시락은 달랐다. 매일매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늘이 주말이라는 게 괴로울 정도다. 주말에는 정우의 음식을 먹지 못 하니까.
‘빨리 월요일이 왔으면 좋겠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학교가 기다려지는 날이 올지는, 그녀도 몰랐다.
* * *
월요일.
정우를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날.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띄운 채 학교로 등교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부모님이 매일같이 차로 태워다 주셨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건강해져서 그러지는 않았다.
“앗, 우림아!”
등교한 우림이를 알아보고 친구들이 인사를 건네온다. 우림이는 재빨리 상대방의 명찰을 확인하고 이름을 떠올린다.
“안녕.”
“어제 그거 봤어?”
“응. 그거 말이지?”
그게 뭔지, 어떻게 아냐고. 그렇게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학교에서의 소우림은 만인의 친구. 그런 말을 했다가 이미지에 손상이 오기라도 한다면 큰 손해였다.
‘너희들은 내 인생을 빛내줘야 하니까.’
자신의 인생은 남들보다 짧다. 자신이 생을 마감했을 때, 자신을 위해 울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의 위로를 위해서라도. 부모님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그렇기에 그녀에게 있어 친구란 피규어 같은 거였다.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구매하는 피규어.
‘오직 정우만이.’
오직 그만이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인형만이 가득한 이 극장에서 오직 그만이 사람이었다.
교실에 도착한 우림은 곧바로 정우를 찾았다. 물론 곧바로 달려가진 않았다. 반에서 두 사람의 사이는 적당히 친한 친구 수준이었지, 하나밖에 없는 단짝은 아니었기에.
‘저 망할년이.’
그렇기에 우림은 은혜가 정우에게 달라붙어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그저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부숴버리고 싶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산산조각내고 싶다.
그러나 은혜는 정우가 아끼는 인형. 자신이 함부로 망가트렸다간 그에게 미움을 받을지도 몰랐다. 물론 정우는 마지막에 자신을 골라 주겠지만.
‘아아, 정우야.’
“우림아! 오늘은 빨리 왔네.”
“무슨 소리야. 항상 일찍 오는걸.”
우림이는 교실에 앉아 있는 꼭두각시 인형들과 대화를 나눴다. 지루했다. 생동감이 없었다. 그들이 진짜 자신과 같은 살아 있는 사람인지 항상 의심이 갔다.
하지만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인형을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그렇게 보여야 했다.
인형놈들은 언제나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을 잡아 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자자, 애들아. 수업 준비해라.”
선생님이 들어와 간단하게 바뀐 일정을 소개하고,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무덤으로 갖고 갈 수도 없었지만 성적은 들고 갈 수 있었기에 우림이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1교시가 끝나고, 2교시가 끝나고. 4교시까지. 드디어 정우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
자신과, 정우 단둘의 시간.
‘저 망할년만 없었어도.’
아니, 무언가 하나 더 있던가.
* * *
“우와, 이건 뭐야?”
“볶음 김치랑 돼지불백.”
“맛있겠다.”
우림이는 정우의 도시락을 받아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먹었던 산적보다 맛있다. 그냥 동네 정육점에서 산 고기로 보이는데, 어쩜 이리 맛있을 수 있을까.
‘최고야.’
우림이는 도시락을 꺼내 먹으며 은혜를 바라봤다. 주말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부가 더 하얗고 탱탱하게 변했다.
‘뭐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우림이는 불안감을 감추며 은혜를 불렀다.
“은혜야.”
“응?”
그녀에게 항상 가지고 있던 적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강자가 보이는 여유같은 모습에, 우림이는 살짝 치를 떨었다.
‘어째서?’
불안감의 정체도 알 지 못한 채, 우림이는 웃으며 은혜에게 물었다.
“피부가 좋아졌네. 뭐 발라?”
“으음, 그래? 오늘은 늦잠자서 로션도 안 바르고 나왔는데.”
“그래?”
즉, 화장품이나 어떠한 물품으로 인해 생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언가 신체 자체에서 큰 변화가 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지 못 했다.
‘뭐지?’
반짝이고 탱탱해진 은혜와 다르게, 정우는 살짝 살이 빠진 듯 홀쭉해졌다. 주말 사이에 이렇게 홀쭉해질 수 있는걸까.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된 그녀는 정우에게도 물었다.
“살 빠졌어?”
“아, 그래보여?”
“으응. 저번주보다 살짝 빠진 거 같은데.”
“헤헤, 우리 정우. 주말동안 힘들었나보네.”
우림이의 말을 들은 정우는 정작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이 빠졌다는 사실을 못 느끼고 있었지만, 옆에서 도시락을 챙겨 먹던 은혜가 배시시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주말동안, 힘들어?’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과 말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었다. 아마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 같은데.
‘나는 모르는데, 저년은 아는 무언가가?’
그 사실만으로 짜증이 난다. 짜증나. 죽여버리고 싶다. 하지만 참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도시락을 음미했다. 사랑이다. 사랑이 느껴진다. 사랑. 정우의 사랑.
‘아아, 내 사랑.’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우림이의 머리에 번개가 치듯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
그래, 사랑. 주말동안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다면 어떨까. 남녀가 성교를 한다면 체력 소모가 큰 남자는 마르고 지치지만 정기를 쪽쪽 빨아먹은 여성은 호로몬 과다 분비로 피부결도 좋아지고, 활기가 넘친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보라. 정우는 겉으로 티가 날 정도로 삐쩍 말랐고, 은혜는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탱탱해져 있었다.
빠직.
그 순간 우림이 들고 있던 젓가락이 반으로 부러진다. 정우는 그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 하고 새로운 젓가락을 꺼내 건네줬다.
“조심해.”
“아, 응. 고마워.”
그러나 우림은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은혜의 쓸데없이 넘쳐 흐르는 생기와 정우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그녀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허리춤 어딘가가 불편해보이는 은혜의 모습과, 조금씩 흔들거리는 정우의 허벅지를 보면서 두 사람이 주말동안 얼마나 많이 성을 나눴는지 예측도 가능했다.
10대 소년소녀가 만난다면 당연 밤을 새가며 떡을 칠 게 분명. 우림이는 은혜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도 까먹고 은혜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뭐, 뭐야?”
가슴만 크지 성격은 덜 자라 애나 다름 없는 우림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은혜는 살짝 뒤로 물러나면서도 당황했다.
‘가, 갑자기 왜 이래?’
항상 틱틱대던 그녀가 조용히 얼굴을 가져오자,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된 은혜는 어째선지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예, 예쁘네.’
우림이는 어려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기에 당연하게도 외모 관리에 많은 돈을 쏟아 부었다. 그만큼 투명하고 반짝이는 피부를 코앞에서 본 은혜는 레즈 성향이 없음에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 했다.
은혜의 얼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우림이는 역시나, 라고 중얼거리고는 손가락을 질근질근 깨물기 시작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손톱과 손끝은 날카롭고 단단하게 연마된 이빨을 이겨내지 못 했고, 그녀의 손끝은 점점 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너, 너 뭐해!?”
갑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질 않나, 손끝에서 피가 날 정도로 깨물지를 않나. 이상행동을 하는 우림을 보고 경악한 은혜가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어 내었다.
그러나 우림이는 도와주려는 은혜에게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그녀를 노려 보았다. 그건 자기 먹잇감을 빼앗긴 짐승보다 더욱 살기 넘치는 눈빛이었다.
“뭐, 뭐야. 갑자기 뭔데?”
“……눈.”
“눈?”
“눈가에 다크서클이 생겨 있잖아…….”
‘진짜 뭐하는 년이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훑어보고, 스스로의 손을 깨물고, 도와주니 팔을 떨쳐내고. 이젠 그 이유가 다크 서클때문이라고 말하는 우림이를 보고 은혜는 웬 미친년 하나가 앉아 있냐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그녀에게 갑작스런 레즈 성향이 생긴 것도 아닐터, 은혜는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런 이상행동을 보이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들켰나?’
자신이 주말 내내 밤을 세워가며 정우와 섹스를 한 일.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자신은 알 수 없는 방법을 이용해서 그 사실을 깨달은거라면?
은혜는 심장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만약 누군가에게 정우와 성관계한 사실을 들킨다면 두 번 다시 해주지 않겠다는 언질을 들었기 때문이다.
‘좆됐나?’
이제 섹스 없이는 단 하루도 살지 못 한다. 만약 섹스 금지령이 내려진다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자살하는 길을 택하리라.
‘막아야 해!’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막아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