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NO.2 소우림 가슴은 소를 우림
“소원이 뭔데?”
“내 소원은…… 소원을 백 개로 늘려줘!”
“좋아.”
“어, 정말로?”
“응. 대신 ‘들어만’ 줄게.”
그 말에 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원을 취소했다. 어딜 날로 먹으려고,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우림이가 피로에 쩔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오늘 하루는 정우가 내 꺼?’
그래, 소원으로 그걸 말하자. 소원을 결정한 은혜는 정우에게 매달린 채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하루 나랑 놀아줘.”
“놀아달라고?”
“응.”
소원을 정우는 교육이 잘 되었다고 느꼈다. 만일 그녀가 놀아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오늘 하루 자신을 주인님처럼 여기라고 말했더라도 들어줬을텐데.
그녀는 최대한 자제하여 놀아달라고 말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놀아달라는 말은,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부탁하는 형세나 마찬가지였다.
‘오늘 한 번 해줘야겠네.’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으니,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혜를 어화둥둥 업기 시작했다. 다리를 붙잡힌 은혜는 깜짝 놀라 발버둥쳤다.
“잠, 내려. 내려줘!”
“아니, 오늘 하루 놀아달라며?”
정우는 그대로 은혜를 업고 교실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자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힘이었기에 학교를 하교 하던 다른 학생들도 살짝 놀라며 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진짜 놀란 이유는 남자를 타고 있는 여학생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결국 은혜는 정우의 등에 업혀 교문까지 내려갔다. 고개를 정우의 뒷목에 틀어박고 최대한 얼굴을 숨겼다.
그러나 정우는 일부러 교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천천히 내려 놓았다. 놔주는 데 내려가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 은혜는 재빨리 뛰어 내렸다.
“……고마워.”
“별말씀을.”
은혜는 재빨리 걸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미 몇몇 학생들이 그 추태를 찍어 자기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으므로, 은혜의 행각은 평생 인터넷을 떠돌리라.
“으아아아! 왜, 왜 그런거야!?”
“으음, 널 쪽팔리게 해서 죽이려고?”
“축하해! 유서에 네 이름 쓰고 죽을테니까!”
은혜가 그렇게 부끄러움에 발버둥치며 정우를 타박하자 정우는 가볍게 웃으며 응대했다. 주변에서는 커플을 욕하는 욕지거리가 슬며시 들려왔다.
‘커플?’
남들의 시선과 이목에 민감한 은혜가 그 말을 놓칠 리 없다. 커플, 그래 커플인가. 어느새 자신은 정우와 커플로 보일 정도로 성장했다!
‘친구 하나 없던 찐따년이 어느새…….’
인싸중의 인싸가 되었다. 남자친구 있으면 다 인싸 아닌가? 남자친구 없던 경럭 0의 인싸 이은혜가 부릅니다. 너만 남친 없어~
“은혜야.”
“응?”
“뭐 하고 놀래?”
“으음─ 뭐 하고 놀지.”
일단 버스를 타고 번화가로 향하던 두 사람은 버스 내에서 말 없이 곰곰히 고민했다. 피시방, 피시방 좋다. 게임도 할 수 있고, 라면도 먹을 수 있고. 최근에 생긴 커플 PC방에 가면 단둘이 사이좋게 앉아 대화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우가 좋아할까?’
자신은 좋다. 무조건 좋지만…… 정우가 좋아할까란 생각을 해보면 고개를 젓게 된다. 은혜가 아는 한 정우는 인터넷의 ㅇ자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다만 그건 은혜가 모르는 것뿐이었다. 정우는 은혜 이상 가는 인터넷 죽돌이였다. 다만 이 시대 사람들과 인터넷의 수준이 너무 뒤떨어져서 잠시 활동을 접은 것뿐이지.
원래 세계에선 은혜 이상가는 죽돌이, 겜돌이였다.
“그…… 있잖아.”
“응. 말해.”
“나, 가고 싶은데가 있는데…….”
“어딘데?”
“피…….”
“피?”
“……피시방.”
“피시방?”
정우의 문답에, 은혜는 망했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애인에게 가자고 하면 안 되는 장소 1위가 피시방이라는 걸, 얼마 전 인터넷에서 봤을텐데.
“좋아.”
“역시 안되겠……응?”
“좋다고, 가자.”
은혜는 정우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정우의 표정을 보니 싫은데 억지로 가는 표정도 아니었다. 정말로 좋아서, 그의 마음이 동해서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 정말 괜찮아?”
“뭐가?”
“아니, 피시방 가도 되겠어?”
“괜찮지.”
그 말에 은혜는 큰 감동을 받았다. 자기 취미까지 이해해주는 남자 친구는 귀했던 것이다! 물론 남자친구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사실혼 관계지.’
가끔 집에 놀러가 정도 나누고, 같이 라면도 먹고. 그러면 사실상 부부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은혜는 싱글벙글 웃으며 정우에게 매달렸다.
그의 팔을 끌어 당겨 자신의 가슴 안에 가뒀다. 은근슬쩍 위아래로 가슴을 비비는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의 팔뚝으로 성욕을 푸는 추악한 행위였지만, 은혜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남들도 다 하는데 뭘.’
정우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지, 은혜에게 순순히 팔뚝을 내놓았다. 은혜는 마치 애인마냥 정우의 팔뚝에 달라붙은 채 피시방으로 향했다.
여자들의 성지. 피시방에 남자가 들어오자 여자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리고 그 옆에 달라붙은 은혜를 보고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커플 개짜증나…….”
“커플 뒤졌으면.”
은혜는 그 말을 듣고 팔짱을 더 강하게 끼며 정우를 데리고 커플석으로 향했다. 남들의 시선이 차단되고, 단둘이 붙어 앉을 수 있는 커플석.
곧바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킨 정우는 선불제도 아닌 후불제 시스템에 한 번 놀랐고, HDD를 이용해 부팅에 3분이나 걸리는 컴퓨터에 두 번 경악했다.
‘아니 이게 무슨…….’
피시방이라고 해서 살짝 기대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시대 피시방은 정말로 컴퓨터만 빌려주는 장소나 다름 없었다.
컴퓨터들도 좋아봐야 그 사양을 살릴 게임이 없으니, 그리 높은 사양이 아니여도 상관없었고.
‘앞으로 5년은 이 상태인가.’
모든 피시방의 컴퓨터를 개박살내버리고, 상향평준화를 이끌어낸 그 게임이 나오기까지 대략 5년정도가 남았다.
그때면 이미 정우도 이 세상을 탈출했든 목매달고 자살을 했든지 했을 테니, 아마 이 세상에서 피시방을 오는 일은 없으리라.
“뭐 할거야?”
“으음…… 뭐 하지?”
은혜는 컴퓨터가 부팅되는 걸 기다리며, 무슨 게임을 할 지 고민했다. 단풍 이야기같은 RPG 게임이 아기자기하고 남자들이 좋아한다고 하던데,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지루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썰트어택을 하기엔…….’
남자가 하기엔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 싶었지만, 그전에 먼저 정우가 입을 열었다.
“오, 이 게임도 있네. 이걸로 하자.”
정우가 가리킨 게임은 은혜가 폭력성으로 고민하던 FPS 게임이었다.
“어, 이거 조금 잔인한데…….”
“난 괜찮은데?”
“그러면 하자. 아이디 있어?”
“아니, 없는데?”
정우에게 이 세상의 게임 아이디 같은 게 있을 리 만무, 미리 만들어두었을리도 만무. 다행히 은혜에게 아이디의 여분이 있어서 그걸로 접속했다.
정우의 자리로 상체가 넘어 온 은혜가 오래 전 만들었던 아이디를 입력한다. 19세 게임이었기에 그녀의 부모님 주민으로 생성한 계정이었다.
“분명…… 아이디가…….”
기억을 떠올려 아이디를 입력하고, 로그인을 한 뒤 게임에 접속했다. 은혜는 먼저 접속해 자신의 반짝이는 훈장을 자랑했다.
[★★]
이 게임 좀 해봤다는 사람만 찍는 소장. 은혜는 겜순이였다. 잠시 후, 정우가 게임에 접속하자 은혜는 초대하기 위해 아이디를 불러 달라 말했다.
“아이디가 뭐야?”
“아이디가…….”
정우는 은혜의 부계정 아이디를 확인했다. 그리고 말을 잇지 못 했다. 아이디를 부르지 않는 정우를 보고 이상함을 느낀 은혜가 정우의 모니터를 확인했다.
[LV.1 은혜짬찌강철짬찌]
“어, 음…… 이건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그녀가 초등학생때 만든 아이디기에 어째서 이런 이름으로 만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은혜는 수 년전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뒷통수를 후려 갈겨서라도 막아내고 싶었다. 어떻게든.
정우는 그런 아이디를 보고, 은혜의 하복부를 한 번 노려 본 뒤 비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네 거 강철이야?”
“하, 하지마…….”
“강, 강철짬찌…… 푸하하!”
창피함에 얼굴을 가득 붉힌 은혜가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정우의 입을 틀어 막았다. 잠시간의 소동이 있은 뒤, 두 사람은 게임을 시작했다.
한 번 게임이 시작하자, 이름이 어떻든 상관없을 정도로 집중한 두 사람은 라면까지 한 사발 말아먹고 피시방을 나왔다.
“으음─ 재밌었다.”
피시방을 나오자마자 기지개를 펴며, 피로를 푸는 은혜를 정우가 얌전히 바라봤다. 은혜는 순수한 눈빛으로 그런 정우와 눈을 마주쳤다.
“……왜?”
“아니, 이걸로 끝?”
“으음, 뭐 더 하고 싶은 거 있어?”
그 말에 오히려 정우가 더 놀랐다. 그녀라면 당연히 당장이라도 하고 싶다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노는 걸 더 좋아했다니.
‘설마 내가 이상한건가?’
10대 성욕이면 하루에 세 번쯤은 기본으로 하고, 섹스할 기회가 생기면 하루에 백 번도 할 거라고 농담조로 말했는데.
그녀를 보고 있으면 성욕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처럼 순수했다. 아니 그냥 멍청한건가.
“그럼 돌아갈까?”
“그래!”
은혜는 정말로, 진심으로 집으로 돌아가자 말했다. 정우는 살짝 황당했지만 자신이 먼저 나서서 하자고 하기엔 조금 그랬다.
그랬다간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자신이 그녀를 좋아한다 생각한 은혜가 매일 같이 성교를 요구할테니까.
물론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 또한 남자니 매일 같이 성교를 나누는 게 싫을 리 없다. 싫지는 않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말이 대위소생이지. 더 많은 여자를 따먹으려고 궁리하는 거 뿐이잖아.’
가끔 그런 자아성찰을 하기도 했지만, 결론은 이러했다. 먼저 손 대는 건 최대한 자제한다. 한 번 몸을 허락하면 두 번째부터는 철저히 통제한다.
지금 정우는 숙련된 창남이나 다름 없었다. 몸을 무기로 사용해 여럿 여자를 묶어두고 있었으니.
“아…….”
은혜와 집으로 돌아가던 길,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은혜가 슬슬 정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냥 돌아가자고 자기 입으로 말했는데, 갑자기 꼴렸다.
그렇다고 자존심에 말을 번복할 수도 없는 노릇, 은혜는 저벅저벅 정류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저기, 정우야…….”
“왜?”
“그, 내일은 주말이고─ 이제 며칠동안 못 만나는데…….”
“그래서?”
“으음, 그러니까…… 너희 집에서 자고 가도 돼?”
정우가 거절할까봐, 은혜는 안절부절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우는 이제야 눈치챘냐는 눈빛으로 은혜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응?”
“오늘까지 놀아주기로 했잖아.”
“그, 그랬지! 응! 오늘은 아직 4시간 정도 남았지!”
시간을 확인한 은혜는 오늘이 아직 4시간 정도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4시간이면 떡을 치고도 남는 시간이다.
“가자!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택시를 타자! 택시!”
급한 은혜는 곧장 저 멀리에 있는 택시를 붙잡았다. 기다리는 10분 조차 아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