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NO.2 소우림 가슴은 소를 우림
월요일. 주말동안 중간고사의 반동으로 하염없이 뛰어 놀았던 아이들은 전부 피로에 쩔어 책상에 엎어져 죽어가고 있었다.
우림이도 비슷했다. 금요일에는 밤샘 자위에 대한 역풍으로 하루 종일 잠만 잤으며, 토요일에는 다시 일어나 하루종일 자위. 일요일 날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월요일이었다. 너무나 빠른 시간이 그저 야속했다.
‘오늘이면 성적이 나올려나.’
예전 같았으면 시험 성적이 나오는 건 일주일은 지난 다음이었겠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는 컴퓨터가 모두 처리를 해주니 시험 성적이 나오는 것도 금방이었다.
막말로 OMR카드를 모아 검사기에 넣기만 하면 되는 작업이라, 일짝 끝난 금요일 오후에 선생들이 다 끝내 놓았을 것이다.
“자자, 자리에 앉아라.”
“썜! 성적 나왔어요?”
“그래. 나왔다.”
실제로, 학생 중 한 사람의 질문에 담임 선생님이 미소를 가득 띄우며 말했다. 그 미소의 이유는 한 가지였다.
“우리 반이 1학년 1등이다.”
“와아아아─!”
“그럼 쌤, 뭐 있어요?”
“피자 사주세요! 피자!”
반 1등이라는 사실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은 아이들까지 덩달아 신이 났다. 물론 선생님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뭘 잘했다고 사줘?”
“우우우우!”
“농담이고, 한 번 날 잡아서 먹자!”
“와아아아!”
아이들이 일희일비하고 있는 동안, 정우와 우림이는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성적에 내기가 걸려 있으니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성적 발표에 집중했다.
“이름 부르면 나와서 성적표 가져가라. 마리.”
한 사람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성적표를 챙겼다. 가나다 순으로 성적표를 받아가던 아이들은 우림의 차례가 오자 한 차례 멈칫했다.
“소우림, 네가 일등이다.”
“네.”
“와, 진짜 우림이 네가 일등이야?”
우림이가 공부를 잘 한다고는 생각지 못 했던 아이들이 달려가 그녀의 성적표를 확인했다. 가슴 큰 여자는 멍청하다는 속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그녀의 성적에 다들 입을 닫지 못 했다.
“하정우.”
“네.”
정우도 앞으로 나가 성적표를 받았다. 일등은 우림이라고 했으니 아마 그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한 문제 더 틀렸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성적표를 받아 확인하자, 정우의 성적표에도 1이라는 숫자가 박혀 있었다.
“정우 너도 일등이다. 공동일등이야!”
“……감사합니다.”
정우는 성적표를 받아가며 우림이와 눈을 마주쳤다. 공동일등, 그렇다는 건 성적이 똑같다는 뜻이었고.
우림이와의 사전 협의로 인해 둘의 성적이 똑같으면 승리는 정우의 몫으로 하기로 했다. 이번 내기는 정우의 승리였다.
‘다행이네.’
이번 내기에서 이기려고 쓴 포인트가 몇 점인데, 졌으면 아마 혀 깨물고 세이브 지점으로 로드 시켜달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현실에 세이브 지점이 있을 리가 없지만.‘
정우가 일등이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정우의 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성적우수자]
[40SP를 획득하셨습니다!]
시험에서 1등을 하면 주는 도전과제, 사실 이 도전과제 자체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다. 다만 그를 눈여겨보고 있는 히로인들이 그의 지적 매력을 깨달아 주는 포인트일뿐.
그리고 그건 그가 일등을 유지하는 한, 앞으로 다른 히로인들은 얼굴만 마주쳐도 10포인트를 상납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겼으니,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전에 이야기한대로 하루 종일 데이트 형식으로 끌고 다니면서 하인처럼 부려 먹을 생각이었지만.
‘그래, 하인처럼.’
남자와 여성. 이성 관계를 뛰어 넘은 주종 관계로서 그녀의 자존심을 모조리 박살낼 생각이었다. 계획을 짠 정우는 성적표를 펄럭이며 우림이이게 다가갔다.
“이번 주 토요일.”
“……알았어.”
우림이는 정우의 성적표를 보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있는 학생들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뭐냐고 웅성거리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에게는 서로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가니 은혜가 평균 30점 짜리 성적표를 내밀며 자신만만하게 자랑했다. 만점이 하나 있다고.
정우는 아무 말 없이 평균 98.9점짜리 성적표를 내밀었다. 은혜는 자신이 세 명 모여도 이길 수 없는 성적표를 보고 경악했다.
중간고사가 끝났지만, 학교생활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토요일이 되었다.
우림과 만나기로 한 약속날이었다.
* * *
“으음, 뭐 입지.”
요즘은 날씨가 따듯해지기 시작해서, 긴팔을 입어도 좋고 반팔을 입어도 좋은 지구의 황금기였다. 일 년에 한 달밖에 오지 않는 봄.
“대충 이렇게 입자.”
이 시대 패션은 솔직히 말해서 흑역사다. 세기말 감성이 아직 남아 있어 펑키하고 화려한 걸 좋아한다.
그에 비해 정우가 있던 미래에서는 깔끔한 단색이 유행이었다. 남들과 비슷하고 잘 동화되는 색.
정우는 감색 와이셔츠에 단촐한 슬렉스를 입고 나갔다. 어차피 패완얼이라 상관없다. 일단은 주인공이니 다른 건 몰라도 얼굴 하나는 자신 있었다.
그렇게 약속장소로 가니 이미 도착한 우림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세계로 와서 여자보다 먼저 도착한 적이 없는 거 같다.
“빨리 왔네.”
“아, 정우야. 옷이 그게 뭐야.”
“어때? 잘 생겼지?”
“으음…… 너무 평범한데.”
그녀는 정우의 옷차림에 불만이 있는 듯 했다. 확실히 그녀가 입고 있는 복장에 비교하면 굉장히 평범한 편이기는 했다.
‘저게 뭐야.’
가슴을 최대한 감추기 위한 푸른 색 티셔츠. 그러면서 곧바로 가슴 굴곡을 따라 흘러 치마 속으로 들어가 자랑의 몸매를 힘껏 드러냈다.
하의는 이 시대 사람들도 잘 입는 테니스 치마. 티셔츠가 밝은 색이었기에 아예 검은 색 치마로 색조를 맞췄다.
하지만 옷걸이가 우림이라서 그런지 원래 세상에서 저러고 서있었으면 곧바로 야동 배우라고 가짜 뉴스로 도배 되어 인터넷 스타가 될 정도로 선정적인 복장이었다.
‘그냥 몸이 음란하네.’
음탕한 몸이라는 게 무엇인지 직접 경험한 정우는 그녀를 품평하며 손을 내밀었다. 우림이는 뭔가 싶어 그 손을 내려다보다, 무언가를 깨닫고는 냉큼 잡아 당겼다.
물컹─ 하는 소리와 함께 옆가슴에 정우의 팔꿈치가 닿았다. 니트와 브라로 이중으로 감싸져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살덩이보다 부드러웠다.
“가자!”
우림이는 신나서 가자고 말했지만, 정우는 힘으로 멈춰서 그녀를 멈춰 세웠다. 앞으로 힘차게 걸어가려다 툭 걸린 우림이 멈춰선 정우를 뒤돌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왜라니, 일단 넌 오늘 내 하인이잖아?”
“아…….”
“하인이 주인한테 반말 쓰게 되어 있나?”
정우가 그렇게 말하자, 우물쭈물 대던 우림이는 동갑내기 친구에게 존대를 쓰는 자존심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존심사이에서 싸우다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이런 걸 원해?”
“좋네. 주인님.”
“하, 취향 참 특이하네.”
“존댓말.”
“……하시네요.”
“좋아.”
정우는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이끌었다. 우림이는 동갑내기에게 존대를 쓰면서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갈꺼야……요?”
“어디 가고 싶어?”
“으음, 딱히 가고 싶은데 없는데.”
“그럼 백화점으로 가자.”
“백화점……이요?”
정우의 말에 우림이 살짝 당황하며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이 세상은 제작자가 만들어낸 편의주의 게임이 배경이라, 남녀의 역할이 바뀐 부분도 있지만, 바뀌지 않은 부분이 있다.
여자가 쇼핑을 더 좋아하는 건 바뀌지 않은 설정 중 하나였다. 거기다가 인싸인 그녀는 더욱 옷을 많이 사는 편이기도 했다.
“괜찮겠어, 요?”
“어우, 우림아. 너 존댓말 진짜 못 한다. 그냥 반말 쓸까?”
“정말?”
“응, 구라야.”
어딜 날로 먹으려고,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놓았다. 이정도는 정우도 용인해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좋아?”
“응!”
“오늘 옷은 내가 사줄테니까…….”
“사줄테니까?”
“내가 입으라는대로 입어봐.”
“……어, 음.”
우림이는 정우의 말을 듣고 정우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정우의 패션은 이 시대 사람들의 감각으론 특출나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며.
가슴이 워낙 커 무슨 옷을 입어도 태가 무너지는 우림의 특성상, 패션 디자이너급으로 옷을 잘 입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옷을 맞춰주기 힘들었다.
“……정말 괜찮겠어?”
“그럼.”
우림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정우는 엄청난 수준의 겜돌이. 그것도 겜창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겜창들의 특징은, 자기 옷은 안 사 입으면서 자기 캐릭터 옷은 미친듯이 사입힌다는 거였고, 진성 겜창인 진우가 게임에서나 나올법한 폭유를 지닌 우림이의 옷을 못 고를리가 없다.
‘그정도는 흔하니까.’
우림이의 가슴이 현실적으로 봤을 때나 보기 힘들지, 게임 속에선 널리고 널린 게 우림이만한 크기의 거유들이었고.
정우의 손 아래 재탄생한 거유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만 믿으라고.”
우림이는 정우가 그리 미덥지 못 했지만, 약속은 약속. 오늘 하루는 자신이 그의 노예였다. 무슨 말을 하든 전부 다 들어줘야만 하는 노예.
‘아니 뭐, 정우가 사준다니까. 거기에 의미가 있는거지.’
정우의 손에 이끌려, 정우는 여성복 가게로 들어갔다.
* * *
“어, 음. 정우야. 이거 너무 야하지 않아?”
“야하기는.”
우림이는 자신의 복장을 만지작거리면서 정우의 눈치를 살폈다. 어깨를 포함해 겨드랑이를 완전히 노출한 와이셔츠. 심지어 가슴 위에는 꽃 모양 매듭이 장식되어 있어 안 그래도 커다란 그녀의 가슴을 더더욱 강조했다.
“오늘은 이거 입고 다니자.”
“오늘!?”
자신의 몸에 자신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고 다니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우림이는 남들의 시선을 생각하며 다시금 되물었다.
“어, 음…… 재고해주면 안 될까?”
“왜?”
“그야, 사람들이 쳐다볼테니까…….”
“그럼 그거 안 입으면 내가 널 싫어한다고 하면?”
“아.”
그럼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우림이가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는 하지만, 그런 것 따위보다 정우의 의견이 더 소중했다.
“알았어. 입을게.”
평생 입어본 적 없는 야한 옷. 상체의 30%는 드러내고 다닌다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해 꽁꽁 감싸고 다녔거늘, 이제는 알아서 노출까지 한다니. 조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정우야. 역시 너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