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NO.3 그녀를 김말이라고 부르지 마요.
마리가 일하는 가게는 술집. 물론 안주나 음료수도 있기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술집이란 들어갈 때부터 민증 검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상점에서 판매하는 위조 신분증을 챙겨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술을 먹고 싶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마리가 있기에 그런 신분증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예 다른 사람들이 의심도 못 하게 해야지.’
그렇기에 정우는 한 사람을 데리고 마리가 일하는 가게로 향했다. 아직 오후 6시. 초저녁이어서 그런지 가게에는 그리 많은 사람이 없었다.
“어서오세……요.”
가게 점원은 가게로 들어오는 정우와 한 사람을 힐끔 바라보고 곧장 자리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메뉴판을 보고 술은 나중에 시키겠다고 말했다.
“술은 나중에 시킬게요.”
“아, 예.”
“그럼 일단……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음료수도 갖다주세요.”
술은 안 시키고 음료수나 시키는 두 사람을 알바생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이런 대낮부터 술 먹고 사고를 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음식과 음료를 날랐다.
“아, 어서오세요!”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슬슬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가게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주로 들어오는 건 방학을 맞이한 대학생들이었다.
“꺄하하!”
“마셔라! 마셔라!”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시끌벅적 해지고, 이때다 싶은 정우는 가볍게 벨을 눌렀다.
“네에!”
“……이거, 하나 더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쉽게도 뽑기에 실패했다. 정우는 다음 타이밍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주방쪽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벨을 눌러 점원을 호출.
“네에…… 너, 뭐야. 여긴 어떻게?”
“어떻게 오긴, 우림이랑 같이 오니까 의심도 안 하던데?”
“안녕─.”
고등학생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커다란 가슴의 우림이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마리는 재빨리 두 사람의 테이블을 훑었다. 다행히 술을 마시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빨리 나가. 미성년자가 있는 거 걸리면 골치 아프니까.”
“에이, 마리 네가 사주기로 했잖아. 이거 다 사주게?”
“……뭐 먹고 싶은데?”
“술이라고 하면 갖다 주게?”
“미쳤냐? 가게 망하게 할 생각 있어?”
“그럼 그냥 시킨 거나 빨리 갖다 줘.”
마리는 그 말을 끝으로 두 번 다시 테이블에 들리지 않았다. 우림이는 술안주로 나온 음식들로 저녁을 떼우며 배를 채웠다.
“으음, 가격 생각해보면 맛은 있는데. 그렇게까지 맛있는 건…….”
“하긴, 여긴 술집이니까. 술 안 시키면 민폐지?”
“우리가 술 시키면 그게 더 민폐야.”
정우의 말에, 우림이는 배시시 웃으며 오뎅탕의 국물을 떠먹었다. 그리고 그때, 다른 자리에서 술잔을 든 대학생이 두 사람의 자리에 찾아왔다.
“저기…… 두 분 애인이신가요?”
“네? ……왜요?”
“아니, 제가 이쪽 남자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아, 그거구나.”
술자리 헌팅. 이런 시간부터 술에 거하게 취한걸까, 남녀혼성으로 된 자리에 술잔을 들고 찾아올 정도면 뇌수가 얼마나 애액으로 되어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제 남친이 그쪽같은 빈유는 별로 안 좋아해서요.”
“비, 빈유?”
우림이는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들고 찾아온 여성의 가슴을 가리켰다. 솔직히 그녀도 옷 너머로 볼륨감이 느껴질 정도의 크기는 있었지만.
젖소의 젖을 떼다가 자기 가슴에 박은듯한 우림이의 폭유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점원조차 설마 그녀가 미성년자일거라곤 생각지 못 하고 들여보낼 정도의 폭유니까.
“내, 내가 빈유라니…….”
그 사람은 우울감에 빠져 제 자리로 돌아갔다. 우림이가 잘했냐는 듯 미소를 싱글벙글 지으며 정우를 바라봤다.
정우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며 다시금 부엌쪽을 쳐다봤다. 마리가 이쪽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고 있었다.
“가자.”
“응? 아직 다 안 먹었는데.”
“버려.”
정우의 단호한 말에, 우림이는 가볍게 겉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계산대로 향하는 걸 본 마리는 재빨리 걸어와 계산을 맡았다.
“다음에 또 올게.”
“오지 마. 바빠 죽겠는데.”
“에이, 우리 손님이다?”
“술집에서 술 안 먹는 건 진상이야.”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정우는 그녀에게 쪽지 하나를 남겼다. 거기엔 정우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뭔데?”
그러나 휴대폰이 없던 그녀는 그게 전화번호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 했다. 안 그래도 바쁜 가게 일이 겹쳐 그녀는 그 종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우는 그녀의 전화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야 그녀가 전화번호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 *
‘진짜 어렵다.’
마리를 공략하면서 느낀 감상은, 그녀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꼬실 수 없다는 거였다. 당장 먹고 살기 바빠 연애할 여유도 없는 그녀를 꼬시는 방법은, 그녀의 가정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게임에선 어떻게 했더라.’
게임 속에선─ 게임 속에선…….
‘기억이 안나?’
기억나질 않는다. 정우는 그제야 은혜와 부딪혔을 때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히로인들의 공략 방법.
이미 손을 대고 있던 우림이야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었기에 금세 떠올릴 수 있었지만, 아예 머릿속에서 미뤄놓았던 마리의 공략법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보고 어쩌라고.’
물론 자신은 프로다. 프로 큐레이터이며 미연시와 야겜에 한해선 프로 게이머 저리가라 할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녀를 공략할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주인공에겐 주식 기능이 있었지. 그럼 주식으로 돈을 벌어다주는 건?’
안 된다. 옛 성인 가라사대, 물고기를 잡아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라 하셨다. 그럼 그녀가 주식의 천재인건가?
‘그것도 아니야.’
마리는 육체적 재능이 뛰어나긴 했지만, 머리는 썩 좋지 않았다. 차라리 프로 선수로 데뷔해 돈을 벌게 해주는 편이 빠르리라.
‘프로 데뷔?’
그거다 싶었다. 마리는 이 미연시 세계에서 무력으로 최강의 자리를 차지한 불량배니까. 마치 만화에 나오는 불량배들처럼 프로고 뭐고 다 패버릴 수 있는 존재다.
‘그녀를 이기려면 100포인트짜리 격투기술을 구매해야 하고.’
그렇다면 그녀를 프로 데뷔 시키는 게 정답일까? 정우의 직감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것도 방법 중 하나겠지.
그러나 고등학생이 된 그녀를 체육계에 집어넣고, 프로의 길까지 인도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갈 것이며.
그로 인해 따내지 못 할 온갖 히로인들의 호감도와 이벤트들을 생각하면, 그건 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몸을 쓰면서, 돈은 많이 주고 시간은 지금보다 널널하게 남는 그런 곳에서 일을 시키면 되겠지.
마침 정우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고, 그곳 사장과 인연또한 있었다.
생각을 마친 정우는 점심시간, 마리를 깨워 도시락을 먹이며 물었다.
“……알바?”
“응. 할 생각 있어?”
“아니, 나 지금도 잠못자고 일하고 있는데.”
정우의 제안은 고마웠으나, 마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들만 해도 피로로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녀가 괜히 학교에서 하루 종일 자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정우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생각 없어?“
“없다니까?”
“으음, 시급 쎈데.”
“……얼마인데?”
들어나 보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정우에게 시급을 물었다. 정우는 손가락 하나와 한 손을 쫙 펴 보이며 말했다.
“6천원? 쎄긴 한데…….”
“아닌데? 만 오천원.”
“……만 오천원?”
지금 그녀가 받는 시급의 4배 가까운 금액. 모든 알바를 접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알바 하나 잡으면 이득이었다.
계산이 끝난 마리는 정우의 두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어딘데?”
“그치만, 네가 못 한다고 하니까…….”
“아니,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게 무슨 일이든, 시급의 4배를 받는다면 당연지사 해야할 일이 된다. 설령 그 일이 시체닦이같은 일이더라도.
“정말 한다고 했다?”
정우는 악마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마리는 그 미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으나, 돈의 위력 앞에선 악마도 실직하기 마련이다.
* * *
“……야, 내가 뭐든 들어준다고 하기는 했지.”
“네.”
“그런데, 이런 애송이를 내 가게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그것도 시급 만 오천원씩이나 줘가면서?”
“네.”
“내가 왜?”
3성급 레스토랑의 메인 쉐프이자 주인, 배유나는 정우의 당돌한 부탁에 헛웃음을 날리며 그에게 그래야만 하는 명분을 물었다.
그러자 정우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제 레시피, 쓰고 계시더라고요.”
“……아, 아닌데?”
“에헤이, 요즘같은 시대에 무슨.”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정우는 최근 이 가게의 맛이 좋아졌다는 평이 늘어난 걸 확인했다. 물론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대인기 레스토랑이니만큼, 전에 먹었던 사람이 또 다시 감동을 느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뭐라나, 굽기가 달라졌다나?”
“아, 아니. 내 가게고, 내 요리고…….”
“그리고 제가 알려드린 방식이죠.”
“하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정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학생에다가, 요리도 할 줄 모르고, 신용도 없는 고등학생 한 명을. 몸값 4배나 주고 써야하는 상황이 왔다.
그러나.
“……다음에.”
“네?”
“다, 다음에 한 번 들리라고. 먹어줬으면 하는 요리가 있어서.”
“오올, 정우 너. 인기 죽인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너! 그게 무슨 말 버릇이야? 쉐프라 불러라! 알았나!”
“예써, 맘.”
마리는 그렇게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일이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편한 일이 됐으리라.
‘이걸로 일단락.’
그녀에게 더 많은 돈과 시간을 남겨 주었다. 즉, 무언가를 심을 땅을 만들어주었다는 뜻.
땅이 고르게 되었으면, 씨앗을 심을 준비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