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NO.3 그녀를 김말이라고 부르지 마요.
마리와의 데이트를 끝내고, 그녀의 호감도를 상당히 올렸다고 만족하고 있던 정우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착신번호 없음. 콜렉트콜이나 장난 전화를 쓰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번호. 원래라면 무시했겠지만 정우는 웬 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마리?”
약간 풀이 죽고 잠긴 목소리였지만 정우는 상대방이 마리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마리는 정우가 자신을 알아보자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저기, 부탁이 있는데.]
“뭔데?”
[나, 재워줄 수 있냐?]
“??”
여자애가, 남자애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연 들어줄 사람도 없으리라.
“……일단 우리 집으로 올래?”
하지만 정우는 아니었다. 그는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떨어진 남성이었으며, 기본적으로 히로인들에게 친절한 남자였으니까.
마리에게 주소를 말해주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정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리는 초인종에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너머엔 오늘 자신과 신나게 데이트를 즐겼던 마리가 기죽은 채로 서있었다.
“들어와.”
“……실례할게.”
마리는 평소와 달리 힘없이 걸어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소파로 안내해 잠깐 앉아 있게 만든 뒤, 음료수와 과자를 든 정우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나, 가출했어.”
“가출?”
그 소리를 들은 정우의 머릿속엔, 그녀의 가정사항이 떠올렸다. 편부모 가정에 어머니는 전형적인 쓰레기. 폭력도 서슴지 않고 학대를 일삼는다는 정보가 머릿속에서 빠져 나왔다.
“그래서, 여기서 재워달라고?”
“……응.”
“다른 애들은? 여자애들 중에 친한 애 없어?”
“……전화해봤는데, 안 된다더라.”
아무리 그녀가 무서워도, 집은 성역이었다. 심지어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성역. 그런 상황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가출소녀를 재워줄 사람은 없으리라.
“역시 안 되겠지? 미안, 나 그만…….”
“아니, 괜찮아.”
“……뭐?”
“어차피 집에 방도 많이 남고. 그냥 여기서 살아.”
정우의 말에 오히려 마리가 역으로 놀랐다. 너무 갈 곳이 없어, 당장 오늘 밤 이슬을 피하고 추위를 지샐 장소가 없어 푸념삼아 내뱉은 말인데 정말로 받아줄 줄은 몰랐다.
“……괜찮겠어?”
“뭐가?”
“아니, 나는 여자고. 너는 남자인데…….”
“그렇게 가슴이 작아선, 여자로 안 보이니까 괜찮아.”
“…….”
마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평균 이하. 껌딱지라는 말이 어울리는 빈유. 서양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가슴이 이렇게 작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가슴이 작다는 사실은 이름 다음으로 그녀의 콤플렉스였다.
“야.”
“─?!”
정우의 팔을 잡아당겨 강제로 소파에 눕혔다. 세계관 최강자의 악력에 저항도 하지 못 하고 끌려온 정우는 깜짝 놀라 자신의 위에 올라탄 마리를 바라보았다.
“가슴이랑 상관없이, 나도 여자거든?”
그렇게 말하며 매혹적으로 정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가슴이 좀 작고 눈매가 사납다는 걸 제외하면 그녀는 아름다운 미녀였으니까.
지금도, 살짝 부풀어 올라 흥분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가슴이나 바지 너머로 느껴지는 두툼한 조갯살이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안 내려와?”
“어, 안 내려가. 네가 여자 무서운 걸 깨달으면 그때─!”
그러나 정우도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이 세상 남자들보다 강한 근력과 정력, 거기에 시스템 제 격투기까지 배운 실력자였으니.
정우는 발을 걸고 몸을 튕겨 순식간에 마운트 자세에서 빠져 나왔다. 이런 기술은 배우지 않으면 평생 모르기에, 격투기 도장을 다닌 적 없는 마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제압당했다.
“여자가 뭐?”
마리의 위에서 그녀의 몸과 팔을 완전히 제압한 정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마리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마리는 발버둥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정우는 그녀와 달리 체중을 낮춰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기에 쉽게 탈출할 수 없었다.
“윽, 야. 너 무슨…….”
“됐지?”
정우는 마리의 위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풀어주었다. 마리는 정우의 무술 실력을 보고 감탄했다.
‘싸우면 이기겠지만…….’
쥐고 휘두르고 뜯고 패는 길거리 싸움이라면 그녀가 이기겠지만, 방금같은 상황이라면 그를 이길 수 있었을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정우의 자신감은 근거없는 자신감이 아닌, 그 무술 실력에 기반한 자신감이었던 것이다.
“아니, 넌 무슨 남자애가 계집애마냥 힘 쓰고 다니냐?”
“불만 있으면 나가.”
“아니아니아니, 불만 없지. 응. 없어.”
그렇게 마리는 정우네 집에서 묶게 되었다. 그 사실에 정우는 속으로 기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뒤 문을 두드리는 그녀에 의해 다시금 문을 열고 나왔다.
“왜?”
“……진짜 미안한데.”
“뭔데?”
“밥 없냐?”
“……잠시만 기다려.”
정우는 그녀에게 저녁을 차려준 뒤 같이 저녁식사를 끝냈다. 사람다운 식사를 하는 게 오랜만이었던 그녀는 눈물이 차올라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 * *
쾅쾅쾅!
“야! 정우야!”
이른 아침. 정우는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큰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깨어났다. 오랜 백수 생활을 해왔기에 아침엔 상당히 약했다.
그나마 주말 아침에는 푹 자고 10시까지 깨지 않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대체 누가 방해를 하는건지.
‘몇 시야?’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본 결과, 이제 막 8시가 되었다. 평일이라면 약간 늦은 시간, 그러나 주말이라면 엄청 이른 시간이었기에 정우는 머리를 긁으며 문을 열었다.
“……뭐야?”
“일어나야지. 8시인데.”
“……오늘 일요일인데?”
“주말이라고 사람이 게으르면 안 돼.”
평생 부지런하게, 정확히는 게으름 피우면 학대 당하는 삶을 살아온 그녀답게, 남들이 게으른 꼴을 보지 못 했다.
정작 본인은 학교에서 매일 골아떨어지는 주제에, 말은 번지르르 한다고 정우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아, 알았어. 일어나면 되잖아.”
“아, 그리고 나 아침밥 좀.”
“내가 무슨 네 엄마냐?”
정우는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은 간단한 베이컨에 스크럼블 에그, 그녀가 무슨 미국인이냐며 따지길래 추가로 밥.
“생긴건 미국인이면서.”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
마리는 정우의 말을 무시하며 밥을 목구녕 너머로 씹어 넘겼다. 뜨끈한 밥과 달달한 스크럼블 에그, 짭짤한 베이컨에 밑반찬으로 김치와 김까지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한국인의 밥상이 완성되었다.
“여기에 국까지 있으면 최곤데.”
“네가 만들게?”
“아니, 미안.”
요리를 할 줄 모르는 마리는 곧장 사과했다. 생각해보니 여긴 정우의 집이었고, 지금 먹는 밥도 정우가 해주는 밥이었다.
여기선 그가 갑이요, 자신은 정쯤됐다. 갑을병정할때 그 정.
“맛있네.”
그녀는 계속해서 감탄사를 터트리며 음식을 칭찬했다. 나중가선 듣고 있는 정우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로.
“그만 해.”
“알았어─.”
“그리고 설거지도 해.”
“알겠습니다.”
밥을 모두 먹어 치우고, 마리는 매일 식당에서 하는 것처럼 세제를 풀고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하라고 소리 지르는 식당과 달리, 여기선 그 누구도 재촉하지 않으니 콧노래를 부르며 느긋하게 닦아갈 수 있었다.
그릇을 닦으며 콧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마치 신혼부부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매일 아침 신랑을 깨우는 신부…… 신랑은 아침에 약해서 짜증을 내면서 아침밥을 해주고…….’
어렸을 때 몰래 훔쳐보던 TV에서 자주 나오던 장면이었다. 그때 봤던 드라마에서의 신혼부부와, 지금 자신의 상황이 똑같았다.
뚝.
그 사실을 눈치 챈 순간 그녀의 손이 멈춰 섰다. 그릇을 닦는 걸 멈추고 상념에 빠졌다.
‘아니, 설마. 잠깐…….’
마리의 머릿속은 그렇고 그런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자인 자신을 집에서 재워준 것도 모자라서, 아침밥도 해줘, 욕실도 빌려줘. 이건 완전…….
‘정우가 나한테 반한건가?’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콧대가 높아져 재빨리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누워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 정우의 옆에 다이빙했다.
갑작스레 달라붙는 마리를 보고 정우는 귀찮다는 듯 물었다.
“뭐야?”
“아니아니, 우리 정우. 이제보니 귀엽네? 이런 면도 있고.”
“??”
당연하게도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정우는 갑자기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 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생각을 읽게 되는 건, 아마 평생이 지나도 무리이리라.
* * *
‘애는 왜 이래?’
정우는 자신의 품속에서 마치 고양이마냥 몸을 감싸고 잠든 마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분홍색 깃발을 보고 머리를 골썩였다.
‘아니, 뭘 했다고?’
게임에서도, 그녀는 애정결핍에 가까운 히로인이었다. 강철같은 육체와 날카로운 성격으로 무장해 남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 하게 하지만.
갑주가 두터울수록 그 속살은 부드러운 법. 그녀의 외모와 성격을 뚫고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쉽게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됐다. 어떻게든 땄으면 됐지.’
호감도가 홀로 이상할 정도로 높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마리를 제외하더라도 정우에게 무차별적인 사랑을 주는 히로인은 둘이나 있었다.
이제 와서 하나가 더 늘어봐야, 간에 기별도 안 차리라.
“그르릉─.”
자신의 품속에서 잠든 마리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으며, 정우는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그녀를 가지고 놀았다.
“으음…….”
그러다 가끔 그녀가 몸을 비틀어 무방비하게 속살을 내비칠 때면, 정우는 저도 모르게 그 살덩이에 집중했다.
원체 먹지 못 해 살이 그리 많이 붙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여자아이의 속살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
정우가 마리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던 그때, 마리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잠결에 정우의 다리를 만지작거리다 자신이 어디에서 자고 있던 건지 깨닫고는 재빨리 일어났다.
“……안녕.”
“잘 잤어?”
“아, 음. 어.”
그녀는 말을 잇지 못 하고 계속해서 어버버 거렸다. 그런 그녀가 귀엽게 느껴젔던 정우는 다시금 그녀의 머리를 눌러 자신의 허벅지에 눕혔다.
‘무릎베개…….’
모든 솔로 여성들의 꿈.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다니, 마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건지 파악하지 못 하다가, 겨우내 상황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남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던 강철의 갑주는 그녀를 지키는 갑옷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내성을 기를 기회조차 앗아갔다.
지금처럼 그녀를 지켜주는 갑주가 사라지고, 속마음을 전부 맨살로 드러냈을 때. 아무 내성 없는 그녀는 버틸 수 없었다.
“아, 으으으…….”
결국 그녀는 정우의 무릎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하루종일 게으름을 피웠다.
죄악으로 가득찬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