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화 〉NO.3 그녀를 김말이라고 부르지 마요. (54/218)



〈 54화 〉NO.3 그녀를 김말이라고 부르지 마요.

“어…… 가,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야. 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이고.”

“아, 아니. 그럼 나는 어디서 자?”

“유나 누나한테 부탁해놨어. 방 좀 구해달라고.”

“……그래?”

정우의 말에 그제야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그녀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한 번 정을 나눈 상대랑 같은 집에서 잘 생각은 없다.

만일 그랬다간 들끓는 성욕을 이기지 못한 그녀든 자신이든 둘 중 하나가 계속해서 관계를 요구할테고, 끊임없는 관계는 무언가 사고를 칠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호감도 관리 면에서도 헤어지는  좋지.’

유부남, 유부녀들이 흔히 말하는 말 중에, ‘결혼 하지마‘ 라는 말이 있다. 이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사랑이 식는다는 반증이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상당히 힘들다는 뜻이었다.

정우는 그녀를 데리고 새로운 집으로 향했다. 월세는 월급에서 깎는다고 했던 말도 전해줬다. 마리는  사실에 아쉬워했지만 언제까지 돈도 안 내고 정우네 집에 얹혀 살 수도 없는 노릇.

새로운 집에 들린 그녀는 그나마 당장 누울만한 침대와 TV, 냉장고같은 가구가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좁아…….’

그러나 지금껏 살던 정우네 아파트에 비하면 한없이 좁았다. 굳이 따지자면 방 한 칸정도의 크기. 그녀가 어려서부터 살아오던 원래 집과 비슷한 크기.

“그럼, 나 가볼테니까. 일 열심히 하고. 아, 공부도 열심히 해.”

“아……. 응. 잘 가라.”

저 멀리 떠나가는 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리는 힘없이 침대에 누웠다. 그래, 혼자라서 지금껏 하지 못했던 일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오히려 좋다.

“배고프네.”

밥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리는 습관처럼 정우를 불렀다. 그러나 정우는 이제 없다. 밥을 먹는것도, 씻는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일어나는 일도.

모두다 자신이 스스로 해야할 일이다.

‘아, 그렇구나.’

그녀는 그제야 혼자서 산다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대충 쌀을 씻고 밥을 지은 그녀는 집 앞 편의점에서 사온 반찬으로 대강 식사를 때웠다. 정우가 차려주던 식사가 그리워지는 맛이었다.

‘요리부터 배울까.’

마침 자신에게는 세계제일이라 해도 다름없는 사람과 교보재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 날 멋대로 요리에 손을 대려 했다는 사실에 크게 혼났다.

* * *

“이런 썅. 알바년이  안다고 건드리긴 건드려?”

레스토랑의 보조 요리사인 그녀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마리에게 쌍욕을 퍼부은 뒤 그녀를 데리고 주방장이자 이 레스토랑의 주인인 유나의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

“뭐야?”

“접니다. 주방장님.”

그녀는 주방장실로 마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마리의 얼굴을 확인한 유나는 무슨 일로 왔냐는 듯 그녀를 노려 보았다.

“이년이 멋대로 음식을 해서요.”

“팔리는 음식에?”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 무슨 상관이야?”

“아니, 멋대로 재료에 손을 댄 게 잘못…….”

“야. 나랑 장난해?”

유나는 고작 이런 일로 자신을 찾아온 보조 요리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래도 바쁜데, 그깟 재료좀  일로 자신을 찾아와?

“하아,  그래도 그 날이라 신경질나는데─.”

그녀는 마리를 노려보며 왜 그랬냐 물었다. 마리는 유나의 매서운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요리를 배우고 싶어서…….”

“배우고 싶으면 요리 학원에나 가지? 여기가 너 가르치는데인줄 아냐?”

“아, 그게 아니라. 해보고 싶어서요.”

“어이가 없네.”

요리를 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가게의 재료를 멋대로 사용하다니, 그녀가 그녀의 스승 밑에서 배웠을 때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야, 가져와 봐.”

“네?”

“이년이 만든 요리, 가져와 보라고.”

최고 주방장, 동시에 가게의 주인인 그녀의 말을 들은 보조 요리사는 후다닥 뛰어 주방에서 마리가 만들었던 요리를 냄비째 챙겨왔다.

아직 열이 식지 않은 따듯한 요리. 유나는 뚜껑을 열고 안을 확인했다. 그제야 그게 가게에서 에피타이저로 내놓는 수프라는   수 있었다.

“뭐야 이거.”

방안에 있는 수저로 스프를 휘적휘적 휘저은 뒤, 한 입 떠먹은 유나는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마리를 노려보았다.

마리는 자신을 노려보는 유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나는 아무 말 없이 한 입 더 떠먹은  입을 열었다.

“요리 배운 적 있냐?”

“아, 아뇨. 없는데요.”

“그렇겠지.”

마리의 사정은 유나도 잘 알고 있었다. 편부모가정에 지속적인 학대끝에 버티지  하고 가출했다고. 그 정도 사정이 없으면 아무리 빚이 있어도 실력도 없는 미성년자를 자기 가게에 고용하진 않는다.

그러나, 요리를 한 입 먹어본 다음 그녀의 생각은 바뀌었다.

‘고용하면 재밌을거라고 했지.’

마리를 소개한 정우의 말이 그제야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야.”

“넵!”

“얘, 요리 보조로 돌려.”

“……네?”

“요리 보조로 돌리라고.”

“아니, 갑자기 왜…….”

“네가 먹어봐라.”

유나는 아무 말 없이 수저를 넘겼다. 보조 요리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프를 한 입 입에 담았다. 맛있다. 마치 가게에서 내놓는 것처럼.

그러나.

“이게  특별한가요? 저희 애들 중에서 이정도도 못 만드는 녀석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개내들은 레시피를 내가 알려줬잖아.”


유나는 그 사실을 지적했다. 당연, 가게에서 일하는 요리사중에 이정도도 못 만드는 머저리는 없었다.

레시피도 공개했으며, 노하우도 전달했다. 직접 요리 강습까지 했다. 그런데도 못 만드는 머저리는 이미 진작에 모가지다.

“……주방장님, 그 소리는.”

“그래. 얘는 그냥 지가 보고 느낀걸로만 그대로 따라한거야. 우리 주력 스프를.”


물론 스프라고 해도 특별한 레시피가 들어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레시피가 없으면 완벽히 따라하는 건 불가능하다.


단순히 조미료를 넣는 순서만으로도 맛이 바뀌는데, 그걸 레시피도  보고 완벽하게 따라한 다는 건 두 가지.

레시피를 몰래 훔쳐봤거나.

“절대미각.”


한 번  본 음식을 완벽히 재현하는 절대적인 재능! 그 재능이 마리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나는 그녀에게 다른 음식들을 먹인  재현을 시켰다.


“음, 모르겠는데요?”


“……뭐?”


그러나 결과는 그녀의 생각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쉽게도 그녀는 경험이 적었다.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어려서부터 많은 음식을 먹어오며 경험과 지식을 쌓지 못한다면 재능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녀의 재능은 확실하다. 허나, 경험이 부족하다.  사실을 깨달은 유나는 결정했다.

“얘는 내가 키운다.”

“예?”

“예는 무슨. 하긴, 그냥 알바를  돈 주고 쓰기엔 조금 아깝지.”

그러나 총 주방장. 헤드 셰프의 수제자라면 월 200정도는 아깝지도 않다. 그만한 가치를 더 뽑아낼 수 있으니까.

“오늘부터 지옥훈련이다.”

마리는  날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 *

“네, 네. 아, 제자로 키우기로 하셨다고요.”


정우는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살짝 당황했다. 그녀가 요리사가 되는 루트도 있던가, 그의 기억과 경험속에는 없었다.

‘내가 바꾼건가.’


아니, 이건 그녀의 재능이다. 마리가 타고난 재능이 우연히 꽃피웠을 뿐이다. 그러나 정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바꿨어.’

자신이 세상을 바꿨다. 운명을 비틀었다. 그 사실에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이렇게 게임에서 불가능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뤄가게 되면 가능해진다.


하렘엔딩이.
 세상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이.

“으음, 그럼 마리는 바빠서 공부도 못 시키겠네.”

유나는 세계 제일의 요리사다. 그런 사람의 수제자가 된다면 미래는 창창하다. 먹고 살 걱정도 하지 않으리라.


공부가 필요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소홀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방학도 슬슬 끝이고. 어찌어찌 해냈네.”

이 세계로 들어오기 전 제작자에게 말했듯이. 자신은 1학기가 지나기 전 주요 히로인 3명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섹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처녀를 따는 걸 목적으로 스피드런을 하면 1학기동안 100명의 처녀를 취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모든 이들의 호감도를 조절하면서 섹프 이상 연인 미만의 오묘한 관계에 들어서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 힘든 걸 제가 해냈습니다.”

그 결과 포인트는 대략 900포인트 언저리. 1만 포인트에는 아직 멀고 먼 여정이지만,  자릿수를 찍는다면 그 미래가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니.

‘3년은 1000일. 개학 후 150일 정도에 1천 포인트를 모았다면, 가능하겠지.’


클리어를 위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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