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NO.4 성예슬의 예술성
방학이 끝났다. 학생들이 모두 활기찬 웃음꽃을 피우며 등교하고 있었다. 매일 매일 늦잠을 자고 자유롭게 놀다가 그 여유가 끝났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하는 방학이 끝났다는 사실에 더 기뻐했다.
물론 그 기쁨도 일주일을 채 가지 못 하겠지만, 학교에 오는 데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자, 방학은 잘 보냈냐? 숙제는 끝냈고?”
“아─ 맞다.”
“쌤, 안 하면 안 되요?”
“안 한 놈들은 남아서 하고 가라.”
한 달 남짓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담임선생님은 마치 엊그제 헤어진 것 마냥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아무튼, 이제 즐거운 방학도 끝나고. 2학기다.”
어느새 2학기가 시작되었다. 1학년이라고 안심하고 있는 시기도 다 갔다. 이제 어, 하는 사이에 2학년이 되고, 어? 하는 사이에 3학년이 된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다른 사람들의 공략도 시도해야한다는 뜻이었다. 정우는 반 아이들을 둘러보며 히로인들을 물색했다.
‘이 반에는 더 없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한 반에 3명이나 되는 히로인이 있는 것도 과하다. 고전 미연시 같은 경우엔 한 반이 아니라 한 학교에 3명 있으면 많은 거였으니까.
‘다른 학년에서 찾아 봐야지.’
누굴 찾아가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아침조례가 끝난 뒤 곧바로 교무실로 가 담임선생님을 찾았다.
담임선생, 신주희는 갑자기 찾아와 말을 거는 정우를 보고 살짝 당황했다.
“……갑자기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다고?”
“네.”
동아리. 이 학교에는 학생들의 취미 생활 및 학업 성적 고취를 위한 동아리 제도가 있다. 이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그쪽 업계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 무슨 동아리?”
“밴드요.”
“밴드?”
지금껏 그와 단 하나의 연관이 없던 동아리. 동시에 고등학생 청춘들의 심금을 울리는 멋들어진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드럼과 피아노가 담임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모든 건 학생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지옥의 구렁텅이다.
“어, 음. 그러니까…… 그래. 정우 네가 하고 싶다면야.”
주희는 학생의 성적과 하고 싶은 걸 하는 일 중 어느쪽이 더 중요한가 세심하게 고민하다 결국 정우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래. 일단 등록은 해놓을게. 위치는 아니?”
“네.”
게임 속에서 주구장창 들렸으니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5층 가장 구석진 장소. 방음을 위해 다른 교실과 동떨어진 구석탱이에 있는 동실.
“그럼 방과후에 찾아가보고. 교실로 돌아가렴.”
“감사합니다.”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서 교실로 돌아가 시간을 기다렸다. 개학 첫 날부터 수업을 하느라 아이들이 굉장히 질색을 했지만, 방학 중에도 자습을 하던 정우와 은혜, 우림이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 하고 수업에 적응했다.
그렇게 방과 후가 되었다.
* * *
“응? 정우야, 오늘은 집에 안 가?”
“할 게 있어서.”
“그래? 나도 남을까?”
“먼저 가.”
따라 남겠다는 은혜를 돌려 보내고 정우는 천천히 학교의 5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학교의 끝. 대부분의 학생이 하교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학생들이 빛을 발하는 시간.
그 공간에 정우가 발을 들였다.
지이잉─
‘벌써…….’
밴드부에는 부원이 한 사람밖에 없다. 그건 바로 졸업 이후 세계를 평정할 천재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질 나쁜 주인공에게 걸려 스캔들로 인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여주인공.
성예슬.
문 밖까지 새어 나오는 기타의 연주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치 전설 속 세이렌의 노랫소리마냥 정우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부실 안으로 향한다.
얼마나 오래 되었으면 툭툭 걸려 제대로 열리지도 않는 문을 꾸역꾸역 열고 들어간 곳에는, 속옷만 입은 채 기타를 잡고 있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엑─.”
“아, 죄송합니다.”
정우는 문을 닫고 곧바로 등을 돌렸다. 어차피 이 세상에선 여자 알몸을 봐도 무죄니 경찰에 끌려갈 걱정은 없다. 그럼에도 이런 공공장소에서 속옷 차림 여자를 보는 건 상당히 저항감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문이 천천히 열렸다.
“……들어와.”
“네.”
정우는 밴드부로 들어갔다.
* * *
부실은 훵했다. 일본 만화에서 따온 주제에 이런 부분은 전혀 닮지 않았다. 교실에 있는거라곤 방음용인지 벽지 대신 주렁줄어 달린 정체불명의 나무판자와, 예슬이 들고 있는 기타가 전부였다.
정우가 그녀만의 왕국이었던 교실로 들어오자, 방금 전 까지 속옷차림으로 연주를 하던 예슬은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 후배님.”
정우의 명찰 색깔을 보고 그가 자기보다 어린 1학년이라는 걸 깨달았고, 사람이 그렇듯 1살 차이라고는 해도 자기보다 어린 사람 앞에서는 긴장이 풀리기 마련.
예슬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아까 전 속옷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도 딱히 신경쓰고 있는 듯 보이진 않고, 빨리 용건을 해결하고 내쫓기만 하면 되리라.
“아까는 왜 벗고 계셨어요?”
“응? 으응? 무슨 소리일까─ 나는 잘 모르겠는데에.”
그녀는 눈을 돌리며 시치미를 떼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째서 속옷 차림으로 연주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건 이용해먹어야지.
“그래요? 그럼 선생님한테 말해도 되죠?”
“야, 야야! 우리 인간적으로 그러지 말자. 응?”
이 장소는 그녀가 연습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자, 그녀가 이어받은 추억의 장소였다. 그녀가 1학년 때 학창시절을 전부 이곳에 쏟아부은 3학년들이 남기고 간 장비와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
그런 곳에서 속옷 차림으로 연주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최소 동아리 활동 중지다. 그녀도 그정도 분별력은 있다.
다만 옷을 입고 있으면 답답하고 연주가 잘 안 되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여긴 통풍이 안 된다.
“너도 지금 덥지? 그렇지?”
방음을 위해 붙여 놓은 나무판자들이 단열재 역할을 하고, 구석직 교실이라 아무도 쓰지 않아 그 흔한 에어컨도 달려 있지 않다.
예슬이 자비로 사서 들여 놓은 선풍기 하나로는 열이 식기는 커녕 더위만 더 자극한다. 그래서 벗었다.
처음엔 셔츠만 벗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감이 생겨 치마도 벗어 던졌다.
어차피 누군가 오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 이 부실은 자기밖에 쓰지 않으니까. 그래서 벗었다.
그 사정을 들은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출증 걸린 변태가 아니었네.’
만일 그랬다면 아무리 정우라도 그녀를 히로인으로 꼬시는 데 조금은 망설였으리라. 노출증 변태를 히로인으로 삼으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길테니.
“덥긴 하죠.”
“그치? 여기가 통풍도 안 돼, 방음도 안 돼, 그냥 되는 게 하나도 없거든!”
정우가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자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주제를 넘긴다. 여기서 더 물고 늘어질 수는 있었지만 그만하는 게 좋다는 판단이 섰다.
“그럼 그건 둘째치고.”
“응! 둘째치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선배.”
“……선배?”
예슬은 정우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2학년이긴 하지만 앞으로 볼 일이 뭐가 있다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는가.
그것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동아리에 들어갔을 1학기도 아니고, 방학이 막 끝난 2학기에 들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어? 아직 못 들으셨나요?”
정우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건 동아리 가입을 신청하는 종이. 그리고 그를 인정하는 선생의 인장까지.
그걸 본 예슬은 볼을 살짝 긁으며 얼떨떨하게 말했다.
“밴드부에 어서와…… 라고 해봐야 있는 건 악기 몇 개가 전부지만.”
그녀의 말대로 밴드부에는 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놓고 간 베이스나 전자 키보드 정도가 끝이었다. 그와중에 쓸만한 기타는 이미 그녀가 쓰고 있었고.
“이정도면 충분해요.”
어차피 뭐가 좋은지는 알 지 못한다. 평생 기타줄 한 번 만져보지 못 한 인생이었으니까 베이스가 좋을 지, 기타가 좋을 지, 키보드가 좋을 지. 모두 알지 못 한다.
허나.
“이거, 쳐봐도 돼요?”
“응? 어. 잠깐, 그거 조율기가…….”
“괜찮아요.”
둥둥─
코드 몇 개를 잡아 소리를 확인하고, 귀로 들으며 적절한 화음을 찾아낸다. 일반인은 불가능한 기교. 그 모습에 예슬은 정우가 어느정도 음악을 배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이게 더 듣기 좋네.’
상점에서 구매한 100 포인트짜리 스킬. [음악의 대가]가 가장 좋은 음을 본능적으로 찾아낸다. 남들이 보기엔 배운자의 기교로 보일 행동. 그러나 천재의 본능적인 조율.
조율을 끝낸 정우가 가볍게 베이스를 튕기고, 자기 세계에서 유명해질 노래의 베이스를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한다.
─♬
“…….”
수 백만을 넘어, 수 억명을 감동 시켰던 노래의 연주. 가사는 없었지만 음정만 들어도 예슬은 그 노래가 얼마나 대단한 노래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발끝도 따라가지 못 할 정도로 완벽한 음정.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
“좋은 베이스네요.”
연주를 끝낸 정우가 가볍게 베이스를 내려놓으며 웃음짓자, 예슬은 곧장 그에게 달려가 어깨를 부여 잡았다.
“그거! 무슨 노래야!?”
“네? 이거요? 그냥…… 떠오른 노래라 제목은 잘.”
“!!”
정우는 미래에서 들었다는 사실을 숨기며 최대한 진실만을 말했다. 머릿속에 떠오른것도 사실이고 제대로 된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슬에게는 정우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내가 만든 노래라 아직 제목은 안 지었다.’
그야말로 천재의 오만! 자신이 찾던 인재를 발견한 예슬은 눈을 반짝이며 정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말했다.
“나랑 밴드 하지 않을래?”
그가 있으면, 세계 최고의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