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NO.4 성예슬의 예술성
밥을 다 먹은 정우와 아이들은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지 시험하기 위해 각자 자리를 잡았다. 우림이는 키보드 앞에, 마리는 드럼 앞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은혜는 마이크를 잡았다.
“내, 내가 보컬을 하라고?”
“그럼 베이스 할래?”
“베, 베이스가 낫지 않을까?”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건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은혜에게 그런 용기는 없었다.
가끔 정신 나간 행동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건 용기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집착으로 보여주는 행동이었으니까.
결국 베이스를 잡은 은혜는 어설픈 몸동작으로 가볍게 줄을 튕겼다. 팽팽한 줄이 연약한 손가락에 의해 퉁, 튕겨 소리를 내고 동시에 그와 같은 반탄력을 손가락에 반사한다.
“이거 손가락 아픈데…….”
“벌써?”
연약하던 은혜의 손가락은 고작 한 번 베이스를 튕긴 것 가지고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정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에게 마이크를 쥐어 주었다.
“노래 부르자.”
“아니, 노래는 조금…….”
“그럼 아무것도 못 하는데. 쉴거야?”
“……응. 미안.”
은혜는 매우 아쉬워했지만, 밴드는 놀이가 아니다. 기타줄도 못 잡을만큼 약한 손,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용기조차 가지지 없는 유약한 마음.
드럼이나 피아노는 기타나 베이스보다 배우기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으니, 아예 논외다. 결국 은혜는 노래를 듣고 응원하는 응원단장 역할을 맡았다.
“열심히 해!”
부실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과자를 까먹으며 응원하는 은혜를 보며 가볍게 연주를 시작했다.
“자, 우림아. 악보대로 치면 돼.”
“응.”
“마리 너는 내가 알려준대로만 해.”
“어.”
마리는 드럼을 치는 법을 몰랐지만, 그녀는 남을 보고 따라하는 걸 굉장히 잘했다. 정우가 모범을 보여주자 금세 그 동작을 따라했다.
즉, 그녀는 이론상 녹음기나 다름 없다. 그녀에게 기본적인 비트를 각인 시킨 뒤, 예슬 선배와 호흡을 맞춰 연주를 시작한다.
디리링─♪
기타가 가장 먼저 연주를 시작하고, 그에 맞춰서 베이스, 드럼이 따라온다. 연주하는 곡은 이 세계 유명 밴드의 .
가사만 살짝 바뀌었을 뿐이라, 한 번 듣는 것 만으로 그게 무슨 노래인지 정우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돌려막기하네.’
하긴 아무리 남녀의 성욕이 뒤바뀐 세상이라고는 해도, 완전히 새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으리라.
잡생각을 하던 정우는 어느새 연주가 하이라이트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라면 베이스답게 기타. 그러니까 예슬 선배를 띄어주는 쪽으로 연주를 진행했겠지만.
‘조금 나가볼까.’
그러기엔 기껏 산 스킬이 아깝지 않은가. 정우는 베이스의 속도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알려준대로 연주하기 바쁜 우림이나 마리는 깨닫지 못 했지만.
앞에서 생생하게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은혜나 연주자인 예슬이는 정우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
베이스가 기타를 잡아먹는다. 누구보다 눈에 띄는 위치에 있는 기타의 존재감이 조금씩 베이스에게 먹혀 들어가기 시작한다.
원래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 그러나 관객들에게는 재미와 흥미를 주는 일.
자신을 잡아먹는 베이스에 예슬은 흥분을 느꼈다.
‘어쭈.’
이렇게 남과 연주해보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원래라면 자신을 따라오기도 벅찰 베이스가 자신을 잡아 먹는다.
즉, 정우의 실력이 자신보다 월등히 높다. 그 사실에 마음을 놓은 예슬은 전력을 내기로 마음 먹었다.
‘어디까지 따라오나 볼까.’
그녀는 최소 1년간 제대로 쓰지 않은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팔에 엔진이라도 붙은 듯 재빠르게 기타를 쳐대기 시작했고, 결국 전체적인 템포가 빨라지자 불협화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지직─
“……!”
“…….”
동시에 예슬과 정우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연주를 하던 우림이나 마리는 아, 그냥 자기가 늦게 쳤구나 생각하겠지만 이 연주를 주도하던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이 연주를 망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두 사람은 속도를 맞추고 다시 신경 싸움을 시작했다.
결국 연주가 끝날때까지 처음과 같은 완벽한 화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를 듣고 있던 은혜는 연주가 끝나자 박수를 치긴 했지만,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와아─ 잘 했어.”
“왜 그래?”
“응? 뭐가?”
“뭐가 이상한지, 관객이 알려줘야지.”
“어…… 그런거였어?”
이 흉악한 재능덩어리 밴드의 평가를 해야한다는 사실에 은혜가 살짝 떨기는 했지만, 최대한 머리를 굴려가며 자신의 안에서 그럴싸한 대답을 끌어냈다.
“처음엔 좋았는데…… 나중에는 약간 안 맞는 느낌?”
“잘 들었네. 잘했어 은혜야.”
“어? 나 잘했어?”
자신이 뭘 잘했는지도 모른 채 칭찬을 받았다고 기뻐하는 은혜를 뒤로 한 채, 정우는 예슬을 바라보았다.
“선배.”
“응.”
“저, 잘 치죠?”
“잘 치네.”
“선배가 실력을 숨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알고 있었구나.”
그 말을 들은 예슬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홀로 기타를 칠 때만큼은 전력을 다했다.
허나 남들과 연주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밴드에 대한 열정과 노력, 그리고 타고난 재능이 그녀를 너무나도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다.
“저랑 하면 숨길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정우는 그런 그녀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세계제일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릇 그녀뿐만 아니라 전세계 누가 오더라도 정우 앞에서 실력을 자랑할 순 없다.
“선배의 실력. 보여주세요.”
예슬이 기타 피크를 집어 들었다. 연주가 다시금 시작됐다. 이 날, 그들은 밴드의 신과 마주했다.
* * *
“와, 와─ 와아아아!”
사람이 크게 놀라면 뇌의 기능이 정지한다고 하던가, 예슬의 연주를 들은 은혜는 감탄사를 내뱉는 것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만큼 전율적인 연주. 어떻게 같은 고등학생이 이런 연주를 할 수 있는가 의심이 들 정도다.
“선배, 진짜 쩌네.”
남에게 큰 관심 없는 마리도 이것만큼은 인정한다는 듯 예슬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예슬은 쑥쓰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기타로 고개를 떨궜다.
자신이 사랑하는 기타로 칭찬을 받는다는 게 이렇게나 기쁠줄이야. 평생 상상도 못 해본 일이라 더더욱 감명깊다.
“얘들아.”
그때, 정우가 모두의 시선을 모은다. 방금 전의 연주는 예슬의 실력도 있지만 정우의 베이스가 그녀를 완벽하게 보조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연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예슬은 그에게 감사했다. 시키기만 한다면 알몸으로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할 판이었으니. 그의 말에 집중하는 건 당연.
“우리, 경연대회 나가보지 않을래?”
“경연……대회?”
“네. 대회요.”
이 솜씨를 썩혀 두기에는 아깝다. 그게 정우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다른 아이들도 대회에 나가는 걸 찬성했다.
예슬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건 너무나도 아깝다. 낭중지추라고, 그녀처럼 뛰어난 인물은 언젠가 떠오르는 별이 되겠지만 기다리기 아쉬우니까.
무엇보다, 지금 그녀를 대회로 데려간다면 그녀들은 밴드계의 문익점이 되는 것이다. 성예슬이라는 기타리스트계의 신성을 데려온 문익점이.
“난 좋아.”
우림이가 말했다.
“나도 찬성.”
마리도 그에 동의했다.
“나는 뭐, 아무것도 안 하는데…….”
은혜가 우물쭈물대며 손을 들었다.
먼저 참가하겠다고 말을 꺼낸 정우를 제외한 모두가 그녀와 함께 대회에 나가기를 희망했다. 같은 부원이 있다. 동료가 있다.
그 사실에 감동을 받은 예슬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너희들, 연습은 힘들걸. 공부 안 해도 돼?”
“어차피 전교 1등이라.”
“아, 나는 천재라서.”
“저는 아무것도 안 하니까…….”
정우와 마찬가지로 전교 공등 1등인 우림이와, 드럼 연습에 교보재만 있다면 천재적인 재능으로 기술을 바로 습득하는 마리는 아무 걱정 없이 말했다.
물론 은혜도, 어차피 응원단장이니 상관없다 말했다.
모두가 동의한 가운데, 정우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대회, 나가죠.”
“……한 번 시작하면, 뒤는 없다.”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본다.
그게 락(Rock)의 정신이니까.
그 날 예슬은 전국밴드경연대회에 참가 신청서를 냈다.
대회 시작까지 D─30.
* * *
“아, 나는 일하러 가야해서.”
방과 후, 가장 먼저 마리가 자리를 비웠다. 그녀를 잡아둘 수는 없었다. 대회가 아무리 중요해도 생계보다 중요하진 않았으니까.
드럼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 궁여지책으로 은혜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
“자, 이렇게 하면 돼.”
“이, 이렇게?”
째애앵!
은혜는 심각한 음치였다. 거기에 몸치이기까지 했다. 천재인 마리에 비해 몸치에 음치인 그녀의 드럼 실력은 형편없었다.
“미안…….”
“사과를 왜 해?”
은혜는 스스로의 실력이 형편 없다 못해 절망스럽다는 사실에 미안해했다. 정우는 그럴 필요 없다고 그녀를 위로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실력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어쩌지? 아무리 그래도 드럼 없이 연주하기엔 좀…….”
“드럼을 빼놓고 연습을 할까요?”
“나중에 헷갈리면 어쩌지?”
“저기.”
그때, 우림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을 모은 가운데 그녀가 묘안을 발의했다.
“그냥 기타랑 베이스만 치면 안 돼?”
“어?”
“어차피 나랑 마리 실력이 한 달동안 크게 늘 거 같지도 않고, 그냥 두 사람 호흡만 맞추면 될 거 같은데.”
그녀의 의견은 정당했다. 연습에서 드럼이 없다면 아예 피아노도 빼놓고 기타와 베이스에 집중하자는 의견.
그 의견을 받아들인 정우와 예슬은 단 둘이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