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NO.5 미주알고주알공자왈
공자희.
공부 밖에 모르는 냉혈한으로, 실은 속이 따듯했다든가 그런 일말의 설정따윈 없이 꿋꿋하게 쿨데레를 밀고 나간 히로인.
다만 그녀가 공부밖에 모르는 건 그녀의 경험부족이 주된 문제로, 그녀에게 색다른 경험을 경험시켜주면 개안해 세상의 넓음을 깨닫는다.
게임 속에서는 그게 섹스였다. 섹스의 참맛을 알아버린 그녀는 어느새 주인공의 자지 없이는 살 수 없는 암컷이 되버린다.
그리고 그런 설정 때문인지 공략하기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캐릭터였다.
‘주인공의 개입에 상관없이 엔딩이 곱창난다는 것도 있고.’
대부분의 엔딩이 주인공과 연관되어 운이 꼬이고 그로 인해 망한다는 설정이라면. 그녀는 본연의 설정 때문에 굳이 주인공이 개입하지 않아도 인생의 나락을 겪는다.
예를 들어 대학 첫 OT때 질 나쁜 선배를 만난다든지. 그 선배의 눈에 띄어 성착취를 당하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아무 말 못한다든지.
그렇게 쾌락의 노예가 된 끝에 약물까지 손에 대고 폐인이 된다든지. 그런 뒷설정이 있다. 물론 주인공과 연관되면 그냥 평범한 육변기가 되어 쾌락에 허덕이다 복상사하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암울하다.
‘아니, 그게 그건가?’
아무튼 중요한 건 그녀가 외부의 침입에 손쉽게 무너지는 쉬운 히로인라는 거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정우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선배.”
“그래.”
그녀는 정우가 내민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공부만 아는 냉혈한이긴 했지만 사회생활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몸으로 겪어 알고 있었다.
“선배는 왜 하겠다고 했어요?”
“내신.”
“아, 그러시구나. 저도 그런데.”
일단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자. 그렇게 생각한 정우는 천천히 천천히 그녀의 거리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은 처음 본 사람이 1m 이상 접근하면 불안해한다. 그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 예전에는 모두가 적이요, 다가오는 모든 게 악의였으니까 어쩔 수 없다.
현대에는 필요 없어진 기능이지만 유전자라는 게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녀도 마찬가지. 그녀는 정우의 접근을 불편해했다.
하지만 정우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에게 점점 더 접근했다. 그녀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그에 대해 뭘 배우지는 않았다.
당연, 이성을 밀어내는 기술 또한 배우지 못 했다. 그저 최대한 관심을 주지 않으려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무시했다.
그 모습에 정우가 씨익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아니, 이제부터 같은 팀인데. 공부를 얼마나 하셨는지 좀 보려고요.”
“그거랑 손잡는 게 무슨 연관이 있는데?”
“연관 있죠.”
정우는 그녀의 엄지와 검지 사이의 손틈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살덩이가 손가락에 파고들어 기분 좋은 느낌이 올라왔다.
“자, 공부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야 잘 하면 되지.”
“네. 열심히 하면 되겠죠? 그리고 당연한 소리지만 오래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어나기도 할테고요?”
필통에서 볼펜 하나를 꺼내들며 손에 쥐었다. 손가락 사이에 볼펜이 딱 들어 맞는다. 그러나 딱딱한 볼펜을 부드러운 살결에 장시간 대고 있는데 괜찮을 리 없다.
당연, 공부를 오래했다면 이 부분에 굳은살이 생긴다. 딱딱해지는 것이다. 물론 몇 달 펜을 놓으면 금세 회복되기에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지만.
그녀의 손에도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그럼 이렇게 굳은살이 생기겠죠?”
“너는 없는데?”
“저는 똑똑해서 학교 수업으로 충분하거든요.”
“그 말, 상당히 재수 없는 거 알지?”
50cm 안에서 손을 잡고 약간의 시간을 보내자, 정우가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약간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정우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부터가 중요하다. 기왕 가까이 좁힌 거리를 벌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선배. 선배는 무슨 과에요?”
“이과.”
“와! 이과. 이과 가는 여자들이 머리도 좋다던데.”
“다 그런 건 아니야.”
칭찬에 목말라 있던 그녀는 정우의 가벼운 칭찬에도 쉽게 기뻐했다. 봐라. 지금도 본인이 똑똑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 않은가.
그녀가 원하는 걸 캐치한 정우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마음을 살살 긁어주기 시작했다.
“에이, 이런 대회에도 나가는 거 보면 완전 똑똑하신 거 같은데.”
“멍청하진 않지.”
“똑똑하단 거네요?”
두 번째. 그녀의 자존심을 살살 긁는다. 자신이 접근할 만큼 접근했으니 이젠 그녀쪽에서 접근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럼 누나.”
“왜?”
“체스 잘 해요?”
그녀는 누나라는 호칭에 전혀 연연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우가 자신을 뭐라 부르든. 하물며 말을 놓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런 만큼 자신의 주 분야. 그러니까 ‘지성’이 의심당하거나 무시당하면 열불을 낸다. 체스는 인간이 컴퓨터에게 가장 먼저 패배한 오락.
다르게 말하면 그 무엇보다 지능에 영향을 많이 받는 종목이라는 뜻이었다.
“잘 하지.”
머리 쓰는 건 특기. 그 누구에게도 져본 적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럼 한 판?”
“좋아.”
“기왕이니 내기도 같이 할래요?”
“도박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승부욕 고취를 위해서.”
“그런 이유라면야.”
그녀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를 좋아한다. 뭐든 적당한 이유만 달라 붙으면 수긍해준다. 그리고 그게 바로 그녀의 약점이다.
‘월척 한 마리 들어 갑니다.’
어서와라. 내 어장에. 나가는 길은 없다.
* * *
탁.
“체크.”
“으음…….”
정우의 묘수에 자희는 한참을 고민하다 다음 수를 놓았다. 그러나 그건 악수. 곧바로 폰에 의해 나이트가 먹히고 열린 공간에 의해 퀸이 적진까지 파고 들어간다.
“체크메이트.”
“……!”
결국 체크메이트를 선언하자, 자신이 졌다는 사실에 자희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다시 체스 말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한 판 더.”
“싫은데요. 벌써 3판째잖아요.”
“마지막. 한 판만 더.”
“아까도 그 소리 하셨거든요? 정 하고 싶으시면…….”
뭐라도 걸어라. 정우가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희에겐 걸만한 물건이 없었다.
‘돈?’
이런 장난에 돈을 거는 건 무리수였다. 그녀는 스스로의 뛰어남을 증명하고 싶은거지 도박의 수렁텅이에 빠지고 싶은 게 아니었다.
결국, 자희는 정우가 하는 말을 두 개 들어주기로 하고 다시 한 판 시작했다. 그러나 자희의 수에 적응한 정우는 전판 보다 더 빨리 체크메이트를 걸었다.
‘게임도 예술에 들어가서 다행이지.’
예술계 최고 스킬을 가지고 있는 정우에게 이기기 위해선, 예술이 아닌 종목에서 승부했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수학 문제 많이 풀기라든지.
그런 종목이었더라면 제아무리 정우라도 추가 포인트 소모 없이 그녀를 이길 순 없겠지. 하지만 예술 항목에 들어가는 게임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마치 치트라도 쓴 것 마냥 이길 수 있는 수가 눈에 보인다. 미래를 읽는 것 처럼 상대방이 다음에 무슨 수를 낼지 예상할 수 있다.
그런 치트를 쓰고도 지려면, 아마 모든 말을 폰으로 사용해야 하리라.
“또 제가 이겼네요?”
“……말도 안 돼.”
“언 되는 게 어딨어요?”
“하지만, 이건…….”
그녀가 놀라는 것도 이해는 한다. 지금껏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겠지. 전문적으로 체스를 두는 프로 상대라면 모를까, 같은 일반인 상대로는.
하지만 그녀는 오늘 첫 패배를 경험했다. 성공이든 실패든 첫 경험이란 각별하다.
“패배, 인정하시죠?”
“그래, 패배는 패배니까.”
“자, 그럼 뭘 시켜볼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면서 부담되지 않는 거. 마침 그런 게 딱 두 가지 있었다. 정우는 우선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전화번호? 그건 왜?”
“이제 같은 팀이니까요. 왜요? 다른 걸로 할까요?”
“아니, 좋아. 이걸로 됐지?”
혹여나 정우의 마음이 바뀔까 그녀는 재빠르게 정우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이렇게 소원 하나를 버릴 수 있다면 곧바로 알려주는 게 좋았다.
“나머지 하나는?”
“말 놓을게.”
“그게 끝? 마음대로 해.”
“응. 알았어. 누나.”
두 번째로 빈 소원은 말을 놓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정우가 초면부터 대뜸 반말을 내뱉어도 크게 신경쓰진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그녀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반말을 하며 다녔다간 다른 사람들에게 안 좋은 소문이 퍼지리라.
은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자희는 그 의견에 따라 정우에게 적개심을 가질거고. 그렇다면 처음부터 허락을 맡는 게 좋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흽쓸리지는 않을테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친해보인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고.’
일석이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