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NO.5 미주알고주알공자왈
은혜는 최근 우울증에 빠진 것 마냥 전신이 노근하고 기운이 없었다. 이게 모두 정우 때문이었다.
‘왜 맨날 바쁘데.’
소꿉친구이자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정우는 뭐가 그리 바쁜지 항상 뽈뽈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다닐때마다 귀찮은 꼬리를 하나씩 달고 돌아왔다.
‘벌써 넷…….’
한 명만 더 늘어도 한 손으로는 다 세지 못 할 정도로 늘어난다. 더 이상 늘면 안 된다. 은혜는 자신의 매력이 가장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다.
‘소꿉친구 따위로는 아무것도 못 해.’
그것도 초등학교때부터 친밀히 지내온 소꿉친구도 아니고, 반쯤 어거지로 만들어진 가짜 소꿉친구. 종이호랑이 마냥 툭 건드리면 우수수 무너질 관계.
같은 여자가 봐도 매혹적인 우림이나, 마리. 예슬 선배와 달리. 그녀는 아무런 특기도 매력도 없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 한. 그러니까 더더욱 손에 쥔 걸 놓을 수 없는 소녀.
그게 이은혜였다.
‘안 돼. 멀어지지 마. 떨어지지 마. 버리지 마.’
먼저 버림받을 확률이 가장 높은 소녀. 선택 받지 못 할 히로인이 바로 그녀였다. 정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최근 정우가 그녀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가 됐다. 하렘 루트를 타는 주인공은 항상 히로인들의 멘탈을 관리해야 하는데 최근 기호지세인 정우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새로운 히로인들을 팍팍 공략해나갔다.
그 결과 은혜는 불안증세에 떨었다.
“정우야, 정우야. 정우야. 정우야…….”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밥 한 톨도 입안으로 넘길 수 없고, 물 한 모금도 목 너머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가 있어야 한다. 버림받아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런 강박이 그녀의 뇌를 헤집어 놓았다.
이 시각, 정우는 새로운 히로인을 공략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 * *
대회와 학교 축제가 겹치는 바람에, 학교 축제를 나가는 인원들은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우선적으로 경시 대회에 집중할 수 있게 배려 받았다.
물론 축제 때 밴드부로서 연주를 할 계획이 있는 정우는 축제에도 빠질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대회와 축제를 동시에 진행해야만 했다.
“누나.”
“왜?”
“나는 따로 남아서 준비 못 할 거 같은데.”
“알았어. 그리고?”
“그게 다야.”
그녀는 정우의 사정을 듣지도 않고 그가 빠지는 걸 수긍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이유를 물었겠지만 그녀에게 그런 건 필요 없다.
상대방의 눈빛만 보더라도 그가 준비에서 빠지기 위해 꾀를 부리는 지 진심으로 바쁜 일이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동물이 아닌 같은 사람으로 보는 일반인들은 불가능한, 오로지 기계처럼 냉철하게 사람을 관찰하는 그녀만의 묘기였다.
“그럼, 잘 다녀와.”
“……내가 어디 간다고 말했었나?”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알지.”
“알았어. 그럼 다녀올게.”
방과 후 준비된 교실에서 나온 정우는 밴드부 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밴드부에는 정우와 마리를 제외한 아이들이 이미 축제 연습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정우야!”
강아지가 주인을 찾아 달려오듯, 은혜가 보이지 않는 꼬리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정우에게 달려왔다.
웬일로 격하게 자신을 반기는 은혜를 보면서 정우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얘가 이러던 게 하루이틀일이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은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결핍된 애정을 채워주던 정우는 부실 안으로 들어가 사정을 설명했다.
전국적으로 열리는 경시 대회가 있고, 거기에 자신이 참가하게 됐다고.
“그, 그럼 우리 같이 연주 못 하는거야?”
이제 드럼도 어느정도 칠 수 있게 된 은혜가 세상이 다 무너진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글썽이는 눈망울을 보며 죄악감과 가학심이 동시에 솟아난 정우는 일부러 대답을 미뤘다.
그러자 은혜의 눈에서 주륵 눈물방울이 한 덩이 뚝 떨어지고 나서야 황급히 입을 열었다.
“준비만! 준비만 늦을 거 같아.”
“……어?”
“대회는 꼭 나갈거야. 내가 밴드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잖아.”
“나…… 아니, 우리 안 버리는거야?”
“버리다니, 내가 누굴 버려?”
은혜는 그 말을 듣더니 눈물을 흘리다 말고 방긋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림이는 재밌는 개그 프로를 보는 것 마냥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쿡, 은혜야 우니?”
“우, 울긴 누가 울어! 하품. 하품해서 눈물 난 거야!”
그녀는 우림이의 말에 강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 대고 있을 때, 정우는 재빨리 예슬에게 일정을 전해주었다.
“이 날이랑 이 날은 연습 참가할 수 있고…… 아, 이 날은 안 돼요.”
“그럼 사실상 사흘이네…… 알았어. 열공 해.”
“네. 선배도 연습 열심히 하세요.”
정우가 간단하게 할 말을 마치고 나가려 하자, 우림이와 싸우던 은혜가 갑자기 정우를 붙잡았다. 그녀의 눈빛엔 간절함과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버, 벌써 가게?”
“이 말 하려고 온 건데?”
“조금만 더 있다가지…….”
“미안, 선배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남자야?”
“여자던데.”
“……그럼 가지 마.”
“야, 은혜야. 갑자기 왜 그래?”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우림이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곤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러나 은혜는 우림이의 말따위는 뒷구녕으로도 듣지 않겠다는 것 마냥 무시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오직 정우밖에 없었다.
“가지 마…….”
“가야 해.”
“안 돼…… 진짜 안 된단 말이야…….”
“하아…….”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 그 사실에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은혜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저, 정우야? 나 때문에 한숨쉰 거 아니지? 그치?”
“…….”
마음 같아선 맞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도 사람인 이상 감정이 있고 누군가 자신에게 질척거린다면 짜증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식은땀을 질질 흘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은혜를 보고 있자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제발 대답해 줘…… 응? 제발…….”
“……아니야. 갑자기 피곤해져서.”
“그렇지!? 내가 필요 없어져서 그런 거 아니지!?”
“……뭐?”
“그치!? 나 아직 쓸모 있지!?”
은혜가 소리친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이상행동을 보이는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 그녀를 붙잡은 정우는 그녀의 몸이 상당히 야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뭔.’
그가 매일 점심 도시락을 싸다 주면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기에 알 수 있다. 이건 하루에 딱 한 끼만.
그러니까 정우가 싸주는 도시락만 먹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사람의 몸이었다. 그것도 주말엔 한 끼도 먹지 않고 굶으며.
‘대체 언제부터?’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이렇게 된 게 그리 오래 되지 않아 보인다는 사실. 만일 한 달 정도만 됐어도 그녀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을 테니까.
“은혜야. 일단 진정하고 이거 마셔.”
정우는 급하게 상점을 열어 정신 안정제를 구매했다. 가끔 정우도 신세지는 물건이었다. 효과는 확실했다.
비타민 음료처럼 생긴 안정제를 꼴깍꼴깍 넘긴 은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얌전해졌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얌전 당했다는 말이 올바르리라.
‘얘가 왜 이러지?’
대체 왜. 갑자기 왜?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자신이 하렘을 만들어서? 그럼 양다리를 걸칠 때부터 따지고 들었어야지.
‘대체 왜?’
그러나 정우는 묻지 않았다. 그걸 묻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그녀를 쓰다듬어 주고 난 뒤 우림이에게 그녀를 잘 데려다 주라고 부탁한 뒤 대회 출전 선수들을 위한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에 돌아가자 자희가 먼저 교실에 비치된 컴퓨터로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교실로 들어온 정우를 힐끔 한 번 바라보곤 말했다.
“늦었네.”
“아, 응. 일이 좀 생겨서.”
“그래.”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 사실만으로 정우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 이거지.’
괜시리 은혜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렘 루트가 어려울 거란 예상은 했지만 점점 더 의지가 깎여 나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 세상에서 나가기 위해선 하렘 루트가 필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