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7화 〉Chapter2. 1학년의 끝 (87/218)



〈 87화 〉Chapter2. 1학년의 끝

겨울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정우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주 주말에 약속 있는 사람?”

“나. 일해야 해.”
“나도, 부모님이랑 약속이…….”

가장 먼저 마리와 우림이가 제외됐다. 정우는 그쪽도 라는 표정으로 자희와 예슬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었다.

“파티 같은  비효율적이야.”
“으음, 이번 크리스마스에 공연이 잡혀서.”

“정말요? 그럼 그거 보러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아니, 괜찮아.  내고 보러 와야하는 공연이라 부르기도 좀 그래.”

예슬의 거절의사를 듣고, 정우는 단  사람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은혜를 바라보며 설마 너도 약속이 있냐는 듯 눈망울 글썽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눈빛을 보게 되면 약속이 있어도 없다 말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은혜는 약속이 없었다.

“나, 나는 괜찮아! 응.”

“그래. 그럼 우리 그 날 데이트네.”

“……응?”

은혜는 갑작스런 말에 머리를 굴려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중 크리스마스에 그를 독점하는 게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절로 신에게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무교인 그녀는 드물게 신에게 감사를 드리며 주말을 기다렸다. 시간은 드럽게 느리게 흘렀다. 이게  아인슈타인 때문이다. 이상한 공식이나 만들고 시간이 느리게 가게 만들고.

그렇게 속으로 감사기도와 욕을 동시에 내뱉던 그녀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찾아왔다.

* * *

눈발이 듬섬듬섬 하늘에서 내려왔다. 누군가는 악마의 가루라 욕하고, 하늘의 비듬이라 욕했지만 사회에 있는 사람들에겐 사랑을 축복하는 하늘의 선물로만 느껴졌다.

은혜도 그러했다. 피부에 닿아 녹아 내리며 열을 빼앗는 눈 하나 하나가 마치 자신의 상황을 축복하는 신의 선물로 느껴졌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풀고 고데기질로 웨이브를 만들었다. 화장도 평소보다 조금 더 진하게, 그렇지만 연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고.

어느 여성 잡지에서 본, 머리가 길면 3배 이뻐보인다와 눈이 내리면 3배 이뻐보인다는 공식에 따라 평소보다 9배 예뻐진 은혜의 미모는 본인이 생각해도 오금이 다 저릴 정도였다.

“은혜야.”

“앗, 정우……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아본 그녀는 코트를 입고 눈에 띄게 반짝이는 정우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여자에게만 통하는 줄 알았던 그 공식은 남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눈에 반사되어 더욱 반짝이는 피부, 약간 젖어든 머리카락. 그 모든  정우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두근!

은혜는 미친 듯이 두근거려 호흡마저 방해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살짝 무릎 꿇었다 일어났다. 아주 미세하게 움직여 정우는 그녀가 무릎을 굽혔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와, 왔어?”

“응.”

“가, 가자!”

이제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1년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자신이 남자랑 크리스마스에 데이트를 나오다니.

분명 방구석에서 시린 옆구리나 부여 잡고 인터넷으로 커플을 욕하면서 밤새 딸딸이나 칠 줄 알았다.

현실은? 자신이 욕하던 커플의 형상 그대로였다.

뽀드득 뽀드득 쌓인 눈을 밟고 지나가며, 은혜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보이지 않을거라 생각해 정우의 팔에 머리를 기댄채 희미하게 킥킥 거렸다.

“왜 그래?”

“으, 응?”

“뭐 재밌는 일 있어?”

“아니, 그, 그냥.”

이렇게 정우랑 팔짱을 끼고 있으니 알아차린 건데, 정우의 키가 상당히 자랐다. 처음 만났을 땐 자신과 비슷한 정도였는데 이젠 살짝 올려다봐야 했다.

“……너,  컸네.”

“아, 이거. 그치. 성장기니까.”

160대이던 정우의 키는 170대까지 자라났다.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으니 앞으로 더욱 자라나리라. 아마 180은 가뿐히 넘기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작은 정우는 지금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은혜는 작은 키라서 할  있는 게 뭐가 있는 지 곰곰히 생각했다.

‘키스.’

지금보다  커지면, 서로 얼굴을 맞대고 키스하는 건 불가능해진다. 은혜는 워낙 키가 작은 편에 속해서 지금보다 더 커지면 정우도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숙이고, 은혜도 까치발을 총총 들고 입을 맞췄어야 했다.

그 생각이 나지 입술이 삐쩍 마르며 정우의 입술을 몰래 훔쳐보게 된다. 립밤이라도 바른걸까 굉장히 부드럽고 반짝였다.

“……정우야.”

“어, 왜? 뭐 하고 싶은거라도 있어?”

“……응.”

은혜는 정우를 잡아 세우고 그의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살짝 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기습뽀뽀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입술에 묻은 립밤이 오고갔다.

“키스, 하고 싶었어.”

그리고 그녀는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길거리였다. 대놓고 이런 짓을 했다간 사람들에게 눈총 받기 쉬웠다.

태생이 소심한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우는 그런 그녀가 사뭇 귀여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근처에 있는 나무 아래 벤치로 끌고갔다.

은혜는 어어, 하면서도 정우에게 질질 끌려갔다. 벤치에 도착한 정우는 곧장 은혜를 벤치에 앉히고 코트 한쪽을 활짝 펼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막았다.

“이리 와.”

그렇게 말하며 고개와 허리를 숙여 은혜와 입을 맞췄다. 누가봐도 키스하는 장면이었지만, 당장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막을 수 있었다.

밖에서 단둘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은혜는 급속도로 흥분이 치솟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아랫도리에선 희멀건한 액체를 뿜어댔다.

푸하, 잠시 동안 입맞추던 두 사람은 입을 떼고 가파른 호흡을 가다듬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호흡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하, 한 번더…….”

“한 번더?”

은혜는 대답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정우는 다시 한 번 그녀와 입맞췄다. 숨이 막혔다. 죽을  같았다. 죽을 듯 행복했다.

* * *

“으으으…… 추워.”

카페로 들어온 두 사람은 곧장 따듯한 음료를 주문한 뒤 손을 녹이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지나다니지 않았지만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헤헤.”

“─?”

그런 은혜를 정우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그럼에도 미소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은혜는 팔뚝으로 얼굴을 숙이고 힉힉 대기 시작했다.

“머리, 풀었네.”

“응? 아! 응!”

정우의 말을 들은 은혜는 고개를 들어 웨이브진 머리를 손가락을 베베 꼬기 시작했다. 꼬인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아 두  엮으니, 마치 회오리감자마냥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카락이 묶였다.

은혜는 엉킨 머리카락에 약간의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손가락을 떼어냈다. 다행히 머리가 빠지진 않았다. 정우는 그녀의 손가락, 머리, 얼굴을 보고 다른 점들을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네일도 발랐고.”


“응.”

“화장법도 바꿨네.”

“응.”


“누구한테  보이려고 이렇게 꾸몄어?”

“……응.”


그녀는 정우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어째선지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없었다. 아아, 몸도 나눴는데 어찌 이렇게 싱그러울 수 있을까.

그녀가 마치 연애 3일차인 것 마냥 힐끔힐끔 정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정우는 자신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럼 나는 어디가 바뀐  같아?”

“……응?”


그 말에 은혜는 눈을 바짝 떠서 정우의 전신을 훑었다. 머리, 그대로다. 얼굴, 화장기도 없다. 옷? 아니야. 손? 아니야.

설마 보이지도 않는 발에 무언가 바르고 물어보는  아니겠지. 그녀는 혹여나 정우가 화를 낼까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음…… 머, 머리?”


“머리가 바뀐 거 같아?”

“아, 아닌가? 그럼─ 이, 입술?”

“정말로?”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대체 어디가 변했지? 우림이라면 눈치 챘을까? 설마 실망하는 거 아닌가?


은혜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정우가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 같은 날, 나 같은 거랑 놀러 와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크게 변했는데.”

순간, 은혜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이해하지 못했다. 뇌가 돌아가지 않았다. 무슨 소리지? 마음이 변해? 자기가 싫어졌다는 건가?


그러나 표정과 손짓, 어투를 보면 그런  아니었다. 그런─ 그런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어, 어, 어어어…….’

순간 은혜는 얼굴이 시뻘겋게 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머리에 열이 오르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저 세상에 그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