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호텔 방에서 스키복으로 갈아입은 정우는 금세 방에서 나와 다른 아이들을 기다렸다. 이 세계에서도 여자는 여자인지라, 옷을 갈아입는 것도 한참 걸렸다.
정우가 옷을 다 갈아입고 5분이 지난 이후에야, 다른 애들이 방을 빠져 나왔다.
“어, 정우야! 기다렸어?”
“아니, 별로.”
“미안…….”
“그럼. 갈까?”
“응!”
스키복은 추위와 부상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는 옷이라, 상당히 두껍고 뚱뚱했다. 체격이 얇은 사람도 스키복을 입으면 호빵맨처럼 통통하게 부풀어 올라 보였고, 반대로 살이 좀 찐 사람도 스키복으로 가리고 말랐다고 우길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스키복을 입고서 매력을 드러내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었다. 거기에 방한모와 스키용 고글까지 낀다면, 외모로 상대를 평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이름 확인하겠습니다.”
“하정우요.”
“……네. 하정우 님 외 5명. 확인되셨습니다. 다른 한 분은 나중에 오시나요?”
“네. 내일 올거에요.”
호텔 부속의 스키장은 평일에는 호텔에 숙박하는 숙박객들을 위한 전용 스키장이었는데, 덕분에 스키장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돈 많은 금수저들이나 스키를 즐기는 스포츠맨들이 주로 보였다.
“호텔 숙박객 여러분은 스키 및 보드 대여가 무료입니다.”
그 비싼 방 가격에는 당연 스키장 이용료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정우는 스키를 빌려 끼고서 천천히 앞으로 미끄러졌다. 스키를 타본 건 어렸을 때가 전부였지만, 스키가 그리 어려운 스포츠는 아니었다.
“혹시나 여기 스키를 한 번도 안 타보신 분 계십니까? 원하신다면 초보분들을 위한 강습이 있습니다만.”
스키장 직원의 말에 정우는 다른 애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이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스키장에 몇 번 와본 적 있어 스키를 탈 줄 알았기에,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는 그 사실에 경악했다는 듯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손을 들까말까 고민했다. 자기 혼자만 빠져서 교육을 받는것도 뭐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배우고 타기엔 두려웠다.
은혜가 그런 고민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챈 정우는 곧장 스키장 직원에게 말했다.
“저희끼리 알아서 탈게요.”
“알겠습니다. 혹여나 문제가 있으면 곧장 불러주세요.”
직원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할 일을 하러 떠났다. 비성수기인 지금 시기엔 할 일이라고 해봐야 창고에 쳐박혀서 노가리나 까는 게 전부겠지만.
스키를 받고 밖으로 나온 정우는 가장 먼저 은혜에게 말을 걸었다.
“은혜야.”
“으, 응?”
“한 번도 타본 적 없지?”
“어,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알지.”
정우는 그럴 줄 알았다며 은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쩍 내밀어진 양손을 붙잡은 은혜는 그대로 툭 미는 정우의 힘을 못 이기고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꺄앗!?”
푸석, 하고 눈밭 위에 쓰러진 은혜는 깜짝 놀라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밭 위에 따라 앉으며 말했다.
“자, 일단은 일어서는 것부터.”
“으, 응.”
“이렇게 땅을 짚고, 한 번에!”
다리를 한쪽으로 모은 정우는 그대로 땅을 짚고 반동을 이용해 일어섰다. 은혜도 마찬가지로 땅을 짚은 뒤 천천히 일어섰다. 일어나려는 은혜의 팔을 붙잡아 일으킨 정우는 그 다음 코스로 나아갔다.
“앞으로 갈때는 이렇게 몸을 숙이고.”
“응…….”
“속도를 줄일때는 이렇게 팔八자로 스키를 모으면 브레이크. 아, 너무 빨리 내려오면 위험하니까 자주자주 속도를 조절해야해.”
“알았어.”
그 다음 초보자용 경사 낮은 코스에서 몇 번 스키를 타던 은혜는 이제 대충 알겠다는 듯 곧바로 정우와 함께 중급자용 코스로 올라갔다.
그리고 후회했다.
“……이, 이게 중급자용이야?”
“그런 모양인데.”
중급자용 코스는 시작부터 짧은 S자 코스로 시작하여, 초보자 코스의 세 배쯤 되는 높은 경사가 이어진 코스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초보자인 은혜가 타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코스.
“뭐해?”
이미 중급 코스를 다섯 번쯤 타고 한 번 더 타려고 리프트를 타고 올라온 우림이 그런 은혜를 보고 툭, 물음을 건넨다. 은혜는 침묵했으나 가끔은 침묵또한 질문의 답이 될 수 있다.
“아, 너 쫄았구나?”
“뭐, 뭐?”
“괜찮아. 처음이니까. 못 탈수도 있지.”
그녀 답지 않은 상냥한 말투. 은혜는 얘가 왜 이러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림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평생 여기 있어. 난 아래에서 정우랑 재밌게 놀테니까? 아. 무섭댔지. 저기 아저씨한테 내려가는 리프트 타겠다고 말해봐. 내려갈 수 있겠지.”
쑤욱, 그 말을 남기고 우림이는 쏜살같이 내려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워서, 한참을 시선을 빼앗기던 은혜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리프트 관리직원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솔직히, 좀 쪽팔렸다. 무서우니까 다시 리프트를 타고 내려가는 일은.
하물며 정우가 보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니, 그런 일은 더더욱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마음을 다잡은 은혜는 결국 출발했다. 그리고 3초만에 엎어졌다.
“꺄악!”
스키 폴대가 저 멀리 떨어진다. 이미 그녀의 손에 닿지 않는 곳까지 떨어져 버렸다. 하필이면 자신보다 높은 곳에 떨어져서 주우러 갈 수도 없다.
‘젠장. 젠장젠장.’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나 운동을 못 하는 걸까. 재능없이 태어났으면 잘하는 거 한두 개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나? 머리도 나빠, 운동신경도 없어.
대체 잘하는 게 뭔지. 그녀 스스로 자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도전했다. 불가능에.
“흐으읍!”
기합을 가득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 은혜는 다시 아래로 출발했다. 스키를 밀 폴대도 없었지만 경사가 워낙 높다보니 금방 금방 내려갔다.
‘오, 오오!’
지금 이 순간, 은혜는 둘도 없는 스피드 레이서가 되었다.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 속도를 즐기는 바이크나 F1이 왜 존재하는지 몸소 이해했다.
그리고, 결국 한계에 도달한다.
팍!
‘어?’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느낀 순간, 몸이 앞으로 굴러갔다. 구르고 굴렀다. 은혜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굴렀다. 몇 바퀴나 굴렀을까, 아마 인생에서 가장 많은 횟수로 굴렀을 것이다.
“으으으…… 어라? 멀쩡하네?”
비싼 스키복을 챙겨 입어서 그런걸까, 십수바퀴나 굴렀음에도 은혜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러나 그녀의 스키는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던 중, 툭 튀어나온 얼음덩이를 밟고 그대로 깨진 스키를 들고, 은혜는 몇 번이나 스키화에 스키를 고정 시키려 노력했다.
‘마, 망가졌나?’
그녀가 넘어진 이유가 그러했다. 스키화와 스키를 고정하는 부분이 망가졌다. 고정이 되지 않으니 스키가 멋대로 튀어 나갔고, 한쪽 발만으로 스키를 탈 정도로 은혜는 능숙하지 않았다.
결국, 다른 한쪽도 벗어던진 은혜는 천천히 스키장을 내려가려고 했다.
“……멀어.”
그러나 멀었다. 기본적으로 스키를 타고 내려가게 설계되어 있는 스키장은 쓸데없이 길었다. 거기에 더해.
툭.
“아, 눈이…….”
눈이 내렸다. 12월의 추운 겨울. 애초에 스키장들은 대부분 눈이 잘 내리는 지역에 있었으니,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위이이이잉!
[손님 여러분, 폭설이 예정되어 있으니 모두 복귀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폭설이 예정되어 있으니…….]
“……폭설이 예정되어 있으면 미리 알려달라고.”
저 아래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은혜는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오기는 할까 고민하다, 직접 걸어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잘못된 결정이었다.
* * *
“후우, 재밌었다.”
“그러게.”
스키를 즐기고 내려온 정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인원체크를 했다. 우림이, 예슬, 자희. 모두 있었지만 은혜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다.
“어라, 은혜는?”
“초보자 존에서 타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서 초보자존을 훑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은 눈이 내린다 하여 사람들이 하나 둘 복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난 당했나?”
“스키장에서? 그거 참 웃긴데.”
“그런가?”
우림이의 말에 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어디 산도 아니고 스키장에서 눈 내린다고 조난 당하는 건 상당히 웃긴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안에 들어가 있자. 춥다.”
“그럴……까?”
정우는 예슬의 말을 듣고 호텔 안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은혜를 찾지 못했으니 호텔 방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호텔 방은 잠겨 있었고 은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정우가 곧장 은혜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은혜의 전화는 생전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정우는 심장이 덜컹였다. 혹여나 납치라도 당해 NTR 비디오라도 찍히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세계가 남녀역전 세계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야겜이니까.
[아, 저는 스키장 관리 직원인데요. 휴대폰 놓고 가신 거 같은데요?]
“휴대폰을 놓고가요?”
그럴 리 없다. 정우는 직원에게 다른 걸 물었다.
“그거 주인, 장비 반납 했나요?”
[네? 잠시만요…… 어, 어? 안 하셨네요?]
“……119좀 불러주세요. 아, 호텔측에도 말 좀 전해주시고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 주인이, 조난 당한 거 같아요.”
[조난이요!?]
스키장에서 조난 당한다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닌지, 스키장 직원의 대응은 빨랐다.
[알겠습니다. 손님들은 걱정하지 마시고, 잠시 기다려주세요.]
은혜가 조난당했다는 사실에 우림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와, 내 말이 복선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