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으으…… 얼어 뒤지겠네…….”
눈보라치는 산등성이 위. 은혜는 눈보라를 헤치며 스키장을 걷고 있었다. 두꺼운 스키복, 움직이기 힘든 스키화의 조합은 은혜의 체력을 미친듯이 소모시켰다.
‘힘들어…….’
하아, 하고 숨을 내뱉자 새하얀 숨결이 드넓게 퍼져 나갔다. 이미 스키복 안쪽은 체온 유지를 위해 열을 내뿜고 있었다. 열이 가득 차니 땀이 주르륵 흘렀다.
땀으로 범벅이 된 스키복은 열을 배출하지 못하고 그대로 안에 보관했고, 그로 인해 땀이 더 배출되며 더욱 빠르게 체온이 내려간다.
악순환이었다. 체온 유지의 악순환. 어딘가 쉴 곳을 찾아야 했다. 땀범벅이 된 스키복과 부러진 스키를 질질 끌면서, 은혜는 드디어 쉴 수 있는 건물을 찾아냈다.
‘여긴?’
산등성이 한복판에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 내열 스티로폼 컨테이너. 곧장 그리로 달려간 은혜는 열려 있는 문에 안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추, 추워…….”
내열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컨테이너 안쪽은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은혜는 주위를 둘러보다 기름으로 작동하는 난로와 기름통 하나를 발견했다.
‘써도 되나?’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기민했다. 손에 기름때를 묻혀가며 콸콸 기름을 쏟아 붓는다. 기름도 얼었으면 어쩌지 싶을 정도로 추웠으나 다행히 기름이 얼거나 하진 않았다.
난로의 전원을 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료를 태워 열을 발휘한다. 기름 냄새가 방안에 가득 풍겼지만 문을 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느정도 열이 생기고 나서, 은혜는 그제야 스키 장갑을 빼고 난로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하아, 하아. 입김을 불어 손을 녹인다.
“으으…… 더 춥네.”
그러나 몸은 솔직하다. 스키복은 내열성이 좋고, 다르게 말하면 열배출과 땀배출이 안 된다. 밖이라면 모를까 난로를 틀고 안에 박혀 있으면 등까지 땀이 차오른다.
더위를 느낀 은혜는 지퍼를 내려 스키복을 벗어던졌다. 스키복을 입고 남자를 꼬시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스키복 안에는 방한용 내복이 세 벌 정도 겹쳐져 있었다.
내복을 펄럭이며, 은혜는 땀을 빼내었다. 몸을 녹이고 휴식을 취하자 남아도는 에너지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
물론 여기서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름은 여전히 충분하고 이런 눈보라 속에서 자신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음을 정우가 발견하고 조치를 취해줄테니까.
그저 심심할 뿐이다. 혼자서 아무것도 없는 컨테이너 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면, 심지어 놀러 와서 혼자 낙오된 끝에 이런 꼴이 된 거라면.
그 마음은 상당히 처참하고 흉 져 있을 게 분명했다.
‘빨리 누구 안 오려나.’
그렇게 삼십 분. 한 시간. 두 시간. 아무것도 없는 침묵과 어둠 속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초침이 틱틱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 공허 속에서 은혜는 몸을 감싸 안으며 잠에 빠진다.
‘졸려…….’
연료식 난로가 산소를 태우고 있었기에, 환기하지 않은 컨테이너 안은 이산화탄소 농도를 올려 졸음을 유발했다.
은혜는 꾸벅꾸벅 고개를 꺾으며 잠에 들었다. 엉성한 자세였지만 졸음 앞에선 몸의 피로마저 자장가가 되었다. 잠에 들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깨지 못했다. 그녀에게 들이닥친 졸음은 조금의 소음은 무시하며 그녀를 잠에 빠트렸다.
“……혜야.”
툭툭, 누군가 그녀를 건드렸으나, 은혜는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완전히 잠에 빠졌다. 달콤한 향기의 탄탄한 몸. 어디서 먆이 맡아 본 냄새.
‘아, 정우다.’
무의식의 그녀가 자신을 껴안은 상대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정우였다. 그가 왔다는 사실에 그녀는 절로 안심했다.
그래, 내복만 껴입은 상태였다는 걸 완전히 잊어버린 채.
* * *
철퍽, 하고 푹 젖은 무언가가 얼굴 위를 덮는다. 기분 나쁜 축축함에 은혜가 눈을 뜨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호텔 방 안이었다.
“아, 깼어?”
은혜의 머리 위에 젖은 수건을 올리고 있던 우림이 그녀를 보며 방긋 웃었다. 마음 같아선 영영 실종됐으면 했지만, 그랬다간 정우가 슬퍼할 테니까. 사지 멀쩡하게 살아온 걸 기뻐해야 하는 걸까.
“다들 너 찾느라 개고생했다.”
하지만 그를 직접적으로 말할 생각 없던 우림이는, 간접적으로 은혜를 비난했다. 너무나 노골적인 그 발언에, 하물며 그 말을 하는 상대가 상대인지라. 은혜는 쉽게 그 의도를 알아들었다.
“미안, 걱정시켜서. 너 따라가려다가 그만.”
“어머, 그랬니? 네가 따라오는 줄 알았으면 중간에 서서 기다렸을텐데. 너무 굼뱅이처럼 행동해서 있는 줄도 몰랐네.”
“노안 생긴 거 아니야? 그 나이에 벌써 그러면 안 돼.”
둘은 속 터지는 말싸움을 계속해서 주고받다가, 우림이 먼저 포기하는걸로 싸움은 일단 중지되었다. 환자를 싸우는 건 윤리도덕적으로 옳지 않았기에 남들이 보면 그녀가 은혜를 괴롭힌다 생각할 수 있었다.
자신의 평가에 악평이 남는 건 좋지 않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불쾌하다.
“야, 정우가 너 찾더라.”
“……정우가? 진짜!? 바로 가야…….”
“그 꼴로 가게?”
“……어?”
은혜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땀범벅이 되어서 였는지 피부는 땀으로 반들거리고, 냄새도 좀 난다. 아포크린 특유의 암내.
거기에 입고 있는 옷은 누가 갈아입힌 건지 방한용 속옷위에 흰색 면 티셔츠 한 장이 전부였다.
“이, 이거. 누가 입혔어?”
“입히는 건 내가.”
“……그럼 벗기는 건?”
“후후.”
우림이는 그 대답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은혜는 얼굴을 부여잡고 푹 쓰러졌다. 말하지 않아도 예상이 갔다.
“저, 정우야?”
“말하지 않을게. 그걸로 네 자존심이 지켜진다면야.”
충분한 대딥아 됐다. 은혜는 지금 당장 이 잘에서 혀를 깨물고 자살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정우가 자신을 부르고 있으니까.
‘이, 일단 샤워부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은혜는 방안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뜨뜻한 물을 맞으니 몸이 축 늘어졌다.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좋았다.
* * *
똑똑.
“들어와.”
“드, 들어갈게.”
정우는 자신의 방문을 노크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들어오라 언질했다. 은혜였다. 깨어나면 방으로 오라 전해두었더니, 이제 막 깨어난 모양이었다.
“미, 미안.”
“뭐가?”
“아니, 그냥 전부…….”
그녀는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그러나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잘못이 무어가 있던가? 그저 불운이 겹쳤을 뿐이다.
실력이 부족함에도 중급자 코스에 올랐고.
운 나쁘게 넘어져 스키가 박살났고.
또 걸어 내려오니 재수없게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거기에 그녀의 잘못이 있던가. 굳이 따지자면 실력이 없음에도 홀로 중급자 코스에 들어간 거?
하지만 실력을 늘리기 위해선 어려운 코스를 타야하니, 그것까지 그녀의 잘못이라 말할 순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리라.
“네 잘못이 아니야.”
“응?”
“만약 네 잘못이 있으면, 내 잘못도 있겠지.”
그리고 그럴땐, 정우는 자진해 그녀의 죄를 덜어주리라 생각했다. 초보자인 그녀를 홀로 둔 자신의 잘못이다. 초보자인 그녀를 홀로 중급자까지 보낸 자신의 잘못이다.
그렇게 타고 타고 올라가다보면, 결국 모두의 잘못이다. 고작 넘어지는 걸로 부숴지는 스키를 대여한 스키장의 잘못. 눈보라가 오는 날 스키장을 개방한 호텔의 잘못.
모두의 잘못이다.
“아, 아니야. 그러지 마…….”
“그건 됐고, 몸은 괜찮아?”
“……응. 푹 자고 일어나서. 괜찮아.”
“어디 봐.”
정우는 은혜를 그대로 끌고 침대 위로 던져 놓았다. 침대에 털썩 주저 앉은 은혜는 살짝 당황하며 정우에게 몸을 내주었다.
그녀의 발을 쓰다듬은 정우는 여전히 그녀의 발이 서늘하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막 샤워를 하고 온 듯 부드럽고 보송보송하지만, 뼛속 깊이 냉기가 서려있었다.
“아직도 차가운데?”
“그, 그건 오는 동안 식어서…….”
“아니야. 손발은 따듯하게 해야지. 기다려봐.”
정우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수건과 따듯한 물을 담은 대야를 들고 나왔다. 수건에도 따듯한 물을 묻힌 뒤 쭈욱 짠 정우는 수건으로 은혜의 손을 감싸고, 그녀의 발을 대야에 담았다.
“녹여야지.”
“잠, 안 해도 돼. 이미 씻고 와서…….”
“씻어도 해. 아직도 손발 차갑다. 너.”
정우는 묵묵하게 그녀의 손발을 씻겨 나갔다. 손이 호텔 수건으로 둘둘 말려 따듯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와중에, 은혜는 발정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왠지 SM같다.’
손발이 묶인 자신. 그걸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정우. 자신이 마치 노예면서 주인같은 이 모습에,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반쯤 죽을 위기에 쳐했다가 살아났기에 그런걸까, 그녀의 흥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