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9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99/218)



〈 99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가 조난 당할줄.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당연히 그 얘기는 무의식적으로 거리끼게 되었다.

그런데 조난당한 사람이 온몸에 살짝 붉은 빛을 띄고는, 정우와 함께 나타났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했네.’
‘했구만.’

정우는 마치 창남이라 불러도  정도로 문어발을 퍼트리고 있고, 여기에 있는 모두가  마수에 걸렸다는 걸 그녀들은 잘 알고 있다.

물론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몸을 섞는 건 싫다. 하지만 정우는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저 본인의 상냥함때문에 몸을 섞고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이를 찌른다면.

그러니까 정우에게 사귀자고 고백한다면 깨질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만 탈락할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정우를 독점할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자신만 버림받을  있다. 정우가 주는 쾌락과 따듯함에 중독된 그녀들은 나유타의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몸은 괜찮아?”

“……어, 뭐. 조금 쉬었더니? 괜찮아  거 같은데.”

“다음엔 조심하고.”

자존감이 너무 넘쳐서, 자신감도 그만큼 넘쳐 흐르는 우림이가 아무렇지 않게 은혜에게 물었다. 민감한 주제였으나, 동시에 은혜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 모습에 2학년 선배들은 살짝 감탄한다. 자신들은  수 없는 1학년들만의 유대. 그래, 이런 식으로 정우와도 그녀들만 아는 비밀을 몇 가지 간직하고 있겠지.

‘1년만 늦게 태어날 걸 그랬나.’

예슬이 이제와 후회해보지만 자신이 태어나는 시기를 자신이 정할 수 있을 리 없다. 하물며 그녀의 태생은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처음부터 정해놓은 운명이니만큼 더더욱.

“아, 맞다. 정우야. 마리 왔다.”

“어, 정말요? 지금 어딨는데요?”

“내 방에서 쉬고 있어. 3일치 일을  번에 하고 왔다나? 걔는 거기서 자게 냅두고…… 방, 정해야지?”

예슬의 말에  자리에 앉은 모두의 눈빛이 바뀐다. 방은 세 개. 사람은 여섯. 당연히  명씩 짝지어 자는 게 맞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한 사람이 남자라는 것.

만일 이 중에 연인이 있다면 괜찮았으리라. 연인끼리  방을 쓰면 되니까. 그러나 여기 정우의 애인은 없다. 애인이 되고 싶은 여성만 다섯.

다행히 한 사람은 오자마자 지쳐 쓰러져, 기절하듯 잠들었으므로 한 사람을 제외하면 남은 건 넷. 네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자신이 정우의 방을 써야하는 이유를 설파했다.

“제 방에서 주무세요. 선배.”

“아니아니, 후배님 움직이게 할 순 없지? 그냥 남아 있는 침대에서…….”

“죄송해서 어떻게 그래요? 제가 침대 이불 정리도 다 해놨으니 그냥 몸만 오시면…….”

우림과 예슬이 서로 불꽃 튀기는 신경전을 펼치고 있을 때, 자희가 스리슬쩍 정우의 옆으로 움직여 귓가에 속삭였다.

“나, 네 방에서 자도 돼?”

결국 본인을 함락시키면 되는 일. 그렇게 판단한 자희는 합리적으로 움직였다. 합리와 효율. 뭐든 이를 따르면 실패할  없다.

“자희야, 뭐 하는 거야?”
“선배. 저희 지금  같이 정하고 있는데.”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과서  이야기. 현실에서, 사람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합리성과 효율성은 뒷순위로 밀려난다. 수십, 수백 이상의 단체가 아닌 이상 개인과 개인의 사이에서 중요한건 합리, 효율같은듣기 좋은 단어가 아니라 본능과 감성 같은 원초적인 감각.

자희는 살짝 뜬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조금 더 은밀히 움직였어야 하는 걸까. 노골적인 적의가 그녀를 노리고 날아왔다.

원래 세계든  세계든 여자들의 싸움엔 끼어서 안 된다는  잘 알고 있는 정우는 조용히 그들이 결론 내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정해도 좋았지만, 그럴경우 불만과 원망이 남는다. 남에게 원망을 사면서까지 누구를 고를 정도로, 정우는 누군가를 편애하지 않았다.

“미안.”

결국 자희는 한 발자국 물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말로는 끝나지 않을 거 같아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우가 귀찮다는  툭 던졌다.

“가위바위보로 해.”

“응?”

“가위바위보로 하라고.”

누구랑 자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물론 이건 모두 연기였다.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기 위한 연기.

본인이 가위바위보로 정하라는데 다른 의견을  사람은 이 장소에 없었다. 정우에게 미움받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왜 정우 말을 따르지않냐며 공격받을 수도 있었기에. 결국 오랜 신경전이 무색하게 마지막은 운에 맡기는 가위바위보가 되었다.

’아니, 가위바위보는 행운이 아니야.‘

머리 회전이 빠른 자희는 벌써부터 그렇게 생각하며 이전의 기억들을 되짚었다. 가위바위보는 단순히 운에 맡기는 게임이 아니다. 물론 상대방이 감정 없는 컴퓨터라면. 0과 1로 이루어진 기계라면 운일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동안의 패턴과 현재 심리 상태, 그리고 여럿 심리학적인 통찰로 무얼  지   있다.

“그럼, 가위바위……보!”

그녀의 머리가 미친듯이 회전하며, 정답을 이끌어낸다. 정답은 바위!

“아, 이겼네.”
“와, 누가보면 짜고 친 줄 알겠네.”

우림이와 예슬, 은혜가 배시시 웃는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주먹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까비.‘

사실, 천재도 가끔 틀린다.

* * *

“나다아아아!”

가위바위보의 승리자는 예슬이 되었다. 그녀는 밤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흥분해 오늘 밤 정우의 방에서 무슨 악기를 연주할지 고대하고 있었다. 비싼 호텔이니만큼  오케스트라가 강연되어도 옆방엔 1 데시벨도 들리지 않으리라.

’흐흐, 이게 얼마만의 합방이냐.‘


2학년 말. 내년부터 3학년이 되면서 여러 가지 압박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하라는 둥, 음악으론 먹고 살기 힘들거라는 둥.


그녀의 노래를 직접 듣고, 감동받은 선생님들마저 그렇게 말한다. 그거야 어쩔 수 없겠지. 대한민국의 교사에게 선생이라는 의미의 역할을 수행하길 바라는 건 퇴색한 지 오래고,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한 개의 나사를 만들어 내뱉는  그들의 역할이 된지 오래니까.

특출난 한 사람이 아니라, 어디에 넣어도 작동하는 흔하디 흔한 공장제 부품. 마스터피스가 아닌 그냥 피스.

그러나 선생이라는 직위의 위명은 여전해서, 그들의 설득을 들은 부모님도 살짝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차피 공부해봐야  될거라는  잘 알고 있으면서 음악을 접으라 슬쩍 언질한다.

최근엔 그런 부모와의 대립, 그리고 학업 스트레스로 이래저래 정우와 만날 틈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없다고 하더라도 쟁쟁한 미녀들이 줄서 정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자신을 먼저 찾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안다.

동시에 이런 기회가 있을 때 정우는 자신을 거절하기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안다. 그는 친절하고, 상냥하고, 또 야하니까.

“오늘 밤은 안 재울거니까.”


“어…… 뭐하려고요?”


“뭐, 음악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

물론 음악에 관한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을 거다. 끝내는 입으로 직접 음에 대해 노래하게 되겠지. 예슬은 슬쩍 정우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이다. 그다지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고 있다.

’다행이네.‘

오랜만이라 자신을 거절하면 어쩌지란 생각을 했는데, 정우는 굳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결국 저녁식사까지 마친 그녀들은 자리를 떴다. 예슬은 정우의 방으로, 나머지는 각자 자신의 방으로.


예슬이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 열불이 솟았지만,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여행은 2박 3일이니까.‘


아직 하루 남았다.

* * *


철컥.

방에 들어온 예슬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방문을 잠그는 것이다. 어차피 호텔 구조상 알아서 문이 잠기겠지만, 혹시나라는 말이 있듯이 주의해서 나쁠  없다.

“머, 먼저 씻을까?”


“네? 전 아까 씻었는데요. 안 씻으셨으면 씻으세요.”


“아, 맞다. 그랬지 참.”


그녀는 스키장에서 나옴과 동시에 샤워를 했다는 걸 상기하곤, 어색하게 침대 위로 올라갔다. 방을 나서면서 신청해두었기에 정우와 은혜의 분비물로 더럽혀졌던 시트는 뽀송뽀송한  시트로 교체되었다.

향기로운 침대 위로 몸을 던지며, 정우는 툭툭 자신의 침대를 두들겼다.


“어차피 하고 싶어서 그런거죠?”

“으, 응?”

“섹스 하고 싶어서 안달났구만 뭘.”


“어? 그, 그래 보여?”

애써 부정은 하지 못하고, 예슬은 볼을 긁으며 정우에게 다가갔다. 그  그대로 오랜만이라 그런지 살짝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처녀 딱지를 떼던 그 순간 마냥.


꿀꺽.


침을 삼키고, 정우의 위로 올라탄다. 정우는 자연스레 그녀를 받아들인다. 오랜만에 거미줄 좀 치우게 생겼다.

“선배, 결혼도 할 수 있겠네요.”

“……그치? 생일도 다 지났고. 만으로도 17살이니까.”

여성의 결혼 가능 나이는 만 16세. 고등학생이라면 대부분 결혼할 수 있는 나이다.


“어…… 설마 나랑 결혼하려고? 싫은 건 아닌데, 나 20대는 자유롭게…….”


“아뇨. 그냥 물어봤어요.”

“그렇지? 그런거지? 괜한 생각이었지?”


결혼은 나쁘지 않다. 정우는 사랑하고 있고, 그를 독점할 수 있다면 최고다. 다만 지금은 노래에 집중하고 싶었다. 결혼은, 이른 일이다.

“지금을 즐기도록 하죠.”

“……응.”


둘은 침묵했다. 곧이어 옥체의 연주가 시작된다. 여체와 남체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하모니. 천국에 까지 닿아라.


* * *


다음 날. 반짝거리는 피부를 자랑하며 식당에 나타난 예슬은 여유롭게 기지개를 펴며 아침 식사를 했다. 음기로 가득  방에서 자고 일어난 우림이와 자희, 그리고 아침 늦게 일어난 마리가 한 자리 모였다.


“하아암. 오랜만.”


“어, 오랜만이네.”

마리는 단조롭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눈곱도 떼지 않은 상태로 밥을 먹었다. 우림이와 자희는 누가 봐도 하룻밤을 즐기고 온 예슬의 상태를 보면서 무언가 경쟁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은혜랑은 했을거고, 예슬 선배랑도 했으면…….‘
’남은  우리 셋…….‘

복귀까지 48시간.
이 기간동안 정우와 자지 못한다면, 뒤쳐진다.
이건 경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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