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구경하던 마리는 대뜸 물었다.
“그래서, 이제 뭐 하면 되냐?”
“응?”
“나, 이런 데 오는 게 처음이라. 뭐하면 되냐?”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 하지 않고, 무식임을 숨기고 부끄러워 하는 걸 수치스럽게 여기는 그녀는 당돌하게 물었다. 모르는 걸 물어보는 게 뭐가 창피하냐는, 약점을 숨기는 현대인들에겐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함이었다.
“스키장 있으니까, 스키타면 돼.”
“오, 스키. 보드같은 것도 있냐?”
“있지.”
한 번도 와본 적 없어서일까, 그녀는 생전 타본 적 없는 보드와 스키를 타는 걸 고대하며 먼저 스키장으로 뛰쳐 나갔다. 그런 그녀를 보내고, 정우는 은혜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정우의 생각대로 그녀는 살짝 굳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우가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리자, 그제야 멍하니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 왜?”
“……아니, 오늘은 스키 탈 기분이 아니라서.”
“그, 그래? 나도 그런데.”
그녀는 두려워 하고 있었다. 우연에 우연이 겹친 사고였다고는 해도 일개 고등학생이 죽을 위기에 처한 다음 날 태연하게 스키장에 갈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거나 전문 치료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이대로 스키장은 그녀에게 있어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우리 썰매나 타러 갈까?”
“응?”
“여기, 썰매장도 있더라고.”
그렇기에, 오늘 하루동안 그녀와 붙어 움직이기로 마음 먹었다. 스키를 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솔직히 썰매도 여간 재밌는 게 아니었다.
“썰매……?”
“응. 썰매.”
“……갈까?”
은혜도 썰매는 괜찮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정우와 함께 썰매장으로 향했다. 스키장 직원은 어제 그런 일을 당하고도 또 찾아온 은혜를 보고 살짝 움찔했지만, 손님이 스키장을 이용하건 말건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기에 묵묵히 스키와 보드를 대여했다.
“저기, 썰매는 어디서 빌려요?”
“아, 썰매요? 썰매는 썰매장 입구에 보시면 잔뜩 있습니다.”
안내를 받고 썰매장으로 간 정우는 2인용 썰매라는 걸 발견했다. 원래라면 한 사람에 하나가 정석이지만, 커플이나 부모자식용으로 만들어 놓은 2인용 썰매가 있었다.
정우는 냉큼 2인용 썰매를 집었다. 은혜는 혼자 타는 썰매를 집었다가 정우의 손에 들린 썰매를 보고 눈치껏 내려놓았다.
“가자!”
그리곤 신나게 정우를 이끌고 썰매장 위로 올라갔다. 어린아이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썰매장답게,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한 눈에 썰매장 전체가 들어온다.
그게 안심이 되는 건지, 은혜는 발을 둥둥 구르며 어서 빨리 썰매를 타기를 원했다. 비성수기에 비싼 호텔이라는 점이 합쳐져서 썰매장에는 안전요원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즉, 마음대로 타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 재빨리 썰매에 올라탄 정우는 다리 사이에 은혜를 끼고 내려갔다. 퉁, 퉁. 굴곡진 썰매장을 타고 내려가면 순식간에 아래에 도착했다.
“와아아아!”
그러나 썰매는 썰매 나름의 속도감이 있다. 스키나 보드에 뒤쳐지지 않는다. 거기에 안전한다. 스키장에서 조난당한 사람은 있어도, 썰매장에서 조난당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여러 가지 조건이 합쳐져서, 은혜는 점점 마음을 녹였다. 일단 스키장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녹여냈다. 은연중에 품고 있던 공포가 점점 녹아내린다.
“고마워.”
“응? 뭐가?”
“그냥, 이것저것…….”
그 사실을 눈치챈 은혜는 정우에게 고마움을 품었다. 그는 오늘 썰매를 타러 올 계획이 없었으리라. 자신 때문에. 자신 때문에 그 귀한 시간을 버려가며 썰매를 타러왔다.
나 같은 애한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허비한다. 그게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지 은혜는 잘 알고 있다.
“우리 사이에 뭘.”
그런 쓸모없는 짓을, 정우는 거리낌 없이 행했다. 전혀 아깝지 않다는 듯.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게 너무 고마워서, 또 미안해서. 은혜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크흥!”
“아, 춥지? 조금 쉴까?”
“……응.”
눈물을 삼킨다는 게 콧물을 삼켜버렸지만, 정우는 굳이 캐묻지 않고 그녀에게 휴식을 권했다. 은혜도 그 제안을 받아들여 단둘이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 안에는 온갖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호텔 숙박객은 모두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컵라면 먹을래?”
“……응.”
은혜는 정우가 건네는 컵라면을 받아들였다. 뜨거운 물을 넣고 4분. 침묵의 시간. 라면이 끓는 그 시간동안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컵라면 용기만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결국, 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우야.”
“아직 안 돼.”
“……응?”
“어? 컵라면 얘기 아니었어?”
아직 4분이 지나지 않았다며, 능청스럽게 넘어가려는 그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한 번 흔든 뒤, 은혜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거 아냐.”
“그러면?”
“……있지. 정우야.”
꺼내기 힘든 말이다. 항상, 그리고 어느 오랜 시간. 자신의 안에 담고 끙끙 짊어지고 있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꺼내야만 하는 말.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
“좋아해.”
“……응. 나도.”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게 아니다. 오늘은 쉽게 얼버무릴 수 없으리라.
“사랑해.”
너는, 어떤 대답을 줄까. 웃으며 넘어갈까, 내 귀에 사랑을 속삭일까. 아니면, 아니면…….
‘거절할까.’
은혜는 조용히 정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 * *
후루룩.
말없이 면발을 삼키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다. 사람은 욕심 많은 동물이고, 성욕은 삼대욕구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욕망 중 하나니까.
독점하고 싶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었다.
“……은혜야.”
“응.”
“나도 널 사랑해.”
“그럼 됐네. 나도 널 사랑하고, 너도 날 사랑하면…….”
“하지만, 그렇다고 사귈 수 있는 건 아니야.”
“……어째서?”
은혜의 눈빛이 죽는다. 텅 빈 공허한 눈동자.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눈빛. 그 눈동자에 눈을 마주하며, 나는 고심했다.
‘말할까.’
어쩌면, 은혜라면 나를 이해해주는 아군이 되어주지 않을까. 이 세상이 가짜고, 너도 가짜며. 나만이 진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너라면 나에게 의존해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 해본 적 있어?”
“무슨 생각?”
“이 세상은 모두 가짜가 아닐까, 나는 통속의 뇌가 아닐까. 뭐 그런 생각.”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은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다. 내가 생각해도 정신 나간 소리인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아직 고등학생인데. 공부도, 운동도, 요리도. 못하는 게 없어.”
“으음…… 나는 그걸 전부 못해서. 모두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잘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은데.”
“다르게 말해볼까, 그래. 이런 거.”
나는 손바닥 위에 상점에서 구매한 피로회복제를 소환했다.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 위로 피로회복제가 툭 튀어나온다. 물리법칙을 무시한 마법같은 일.
“어…… 마술? 마술도 할 줄 알아?”
“그렇게 생각해?”
이번엔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위로 소환한다. 누가봐도 이상한 상황. 마술이라고 얼버무릴 수 없는, 그런 모습.
그제야 은혜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는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걸까. 아니면 자기 인지 능력을 뛰어넘은 사건을 목도해서?
어느쪽이든 좋다. 어느쪽이든.
“나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가짜야.”
그래. 너도. 너희들도. 모조리.
그럼에도 너는 나에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해달라 말할 수 있을까.
대답해줘.
부디.
* * *
“나에게 있어, 이 세상은 가짜야.”
그 말을 들었을 때, 은혜가 가장 먼저 생각한 건 의심이 아닌 미혹이었다. 가짜니 뭐니,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단숨에 이해하거나 납득할 정도의 머리가 그녀에겐 없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럼.”
그럼, 이 마음도 가짜인걸까.
“그럼, 내가 널 사랑하는 이것도, 가짜라는거야?”
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았음에 그게 충분한 답이 되었다. 이 마음도 가짜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뜨거움이. 이 열망이 어떻게 가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정우야.”
“응.”
“예전에, 기억나?”
예전이라고 하기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정우와 첫날밤을 치루었을 때. 그때 정우는 그녀에게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였다. 너무나 달콤해서 거짓이라 생각될 만큼 감미로운 말들을.
“그 말.”
내 사랑은 거짓이어도 좋다.
내 기억이 거짓이어도 좋다.
다만, 하지만. 네 사랑만큼은 거짓이어서 안된다.
“네 사랑도, 가짜야?”
은혜의 말을 들은 정우가 순간 멈칫했다.
‘……어?’
머리가 굳었다. 일부러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떠나려고만 했으니까. 만들어진 세계에서 벗어나려고만 했으니까.
‘네 사랑도, 가짜야?’
은혜의 말이 계속해서 머리에 맴돈다. 사랑, 사랑이라. 그래. 그녀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히로인들의 사랑은 만들어진 가짜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만큼은 그래선 안 된다. 자신의 마음만큼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만 한다. 만일 자신의 감정또한 히로인들처럼 조작된 거라면. 그렇다면.
‘나도 가짜가 되니까.’
여기에 모순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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