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네 사랑도, 가짜야?”
그 말을 들은 이후, 정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빠졌다. 그 사실에 은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아는 정우라면 망설임 없이 곧바로 아니라고 대답했을테니까.
고민한다는 건 여지가 있다는 뜻이요, 그건 그가 속삭였던 사랑이 거짓이라는 뜻이다.
‘안 돼.’
제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렇지 않다고 말해줘. 거짓으로 거짓을 덮고, 가짜로 가짜를 만들어도 좋으니. 부디, 제발.
“……아니.”
그녀의 마음이 통한걸까, 다행히 정우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가 원했던 대답을 꺼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안심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숨쉬는 것조차 잊어먹을 정도로 긴장해있었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해.”
정우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 스스로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했다. 처음에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게임하는 감각으로 그녀들을 노렸다면.
일 년 남짓한 시간동안 그녀들과 함께한 지금은? 여전히 그녀들을 그저 일개 캐릭터로 생각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
‘얘들도 사람이야.’
이 세상이 만들어진 세상이라고 할지어도, 그녀들은 그들만의 에고를 가지고 있었다. 가짜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들의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도 가짜가 아니다. 자아를 가지고,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순간부터. 만들어진 무언가라 할지어도 진짜가 된다.
“적어도 그 마음은, 가짜가 아니야.”
그래서일까, 가짜로 시작했던 정우의 마음도 어느샌가 진심으로 물들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토록 갈대 같다. 술렁술렁 흔들려 연기로 시작한 일이 진실이 되었으니까.
“그러면 상관없는 거 아니야?”
“응?”
“이 세상이 가짜라도, 정우 네 마음만 진짜라면.”
정우의 말을 들은 은혜는 생각했다. 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마음인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그는 진심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이 가짜라는 말에 동의해줄 수 있다. 당장 은혜에게도 이 세상은 정우가 전부인데, 그가 없어진다면 세상은 가짜나 다름없게 변하니 그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구나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색으로 세상을 칠할 수밖에.
“그렇다면 상관없지. 네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은혜는 은근슬쩍 정우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라면 안 먹기를 잘했다. 먹었더라면 매운 스프 냄새가 배겼을테니까.
“정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정우는 그럴 자격이 있다. 그렇게 해도 될 여유가 있다. 적어도 자신은 그를 뒤에서 밀어줄테니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몇몇 사람들도 덤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응.”
은혜의 말을 들은 정우는 침묵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마음이 항상 돌아가는 데, 이 세상을 클리어 하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마음은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라니까, 그렇게 시키니까. 그런 운명이니까. 그래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왠지 모르게 그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고마워. 은혜야.”
“마음은 정리됐어?”
“응.”
생각은 정리됐다. 그렇다면 이젠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줄 차례겠지.
“나는 너랑…….”
* * *
정우의 답을 들은 은혜는 정우에 팔에 매달려 휴게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마침 휴게소로 들어오던 마리가 발견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고글을 벗고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뭐야?”
“응? 뭐가?”
“아니, 너희들…… 왠지 모르게 딱 달라 붙어 있는데.”
“그래서?”
평소엔 마리에게 말도 잘 못 붙이던 은혜가 당당히 그녀와 맞선다. 그 사실에 마리는 무언가 바뀌었다는 걸 직감했다. 유약한 그녀의 성격을 뒤바꿔 놓을 정도의 큰일.
뭐가 있을까. 사실 이 나이대 여자에게 있어 그런 큰일은 많지 않다. 꿈을 찾는다든가, 목표가 생겼다든가, 아님 애인이 생겼다든가. 그런 일들.
그리고 지금 상황에 뜬금없이 장래를 결정했을리 만무, 당연하게도 은혜와 정우가 사귀었다고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아니야.”
“아직 질문도 안 했는데.”
“우리 사귀는 거 아니라고.”
대답은 은혜에게서 나왔다. 정우도 눈웃음으로 그를 수긍했다. 이렇게 팔짱을 끼고 나왔으면서 사귀는 게 아니라니,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녀는 누군가 그러하다면 그런 줄 알 정도로 순수하지도, 세상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부정하고, 비판하고. 그게 그녀의 성격이었다.
“그 꼴로?”
“아, 이거? 정우가 해도 된댔어.”
“아니, 사귀는 사이 아니라며.”
“응!”
흘기는 눈으로 은혜를 보고 있던 마리는 자기가 선문답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물어봤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누가 그러고 다녀?”
“뭐 어때. 사귀는 사이가 될 수도 있는데.”
“……아, 그래?”
그 말엔 마리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 확실히 사귀는 사이가 될 예정이라면 그럴수도 있겠지. 사귀기 일보 직전. 그러니까 썸타는 사이라면.
‘결국 은혜로 정했나.’
정우와 몸을 섞는 관계인 얘들은 많지만, 하필이면 그 중에서 은혜를 고를 줄이야. 그녀는 얘들 중에서 가장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곤 금세 혀를 내둘렀다. 정우가 누구랑 사귀든 그건 그가 정할 일이지,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명분은 없다.
“그래? 그거 좋겠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마음을 담아 빈정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걸 눈치챈건지,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는건지. 은혜는 마리의 팔을 끌어 당겨 정우의 다른 쪽 팔을 내주었다.
“……뭐야, 왜 이래?”
자신의 팔이 아님에도 거리낌 없이 건네는 모습이나, 또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모습이 그녀답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 두 사람이 양쪽에서 정우의 팔을 붙잡으니, 마치 범죄자를 연행하는 모습처럼 되어 버렸다. 어떤 의미에선 범죄자에 가깝긴 했다.
“같이 가자!”
“아니, 이러면 정우가 불편…….”
“괜찮으니까! 그치 정우야?”
“응. 난 괜찮지.”
정작 팔 주인인 정우가 괜찮다 하니, 그녀도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조차 잊어버린채, 마리는 그대로 은혜와 정우에게 끌려 다시 스키장으로 나섰다.
화장실을 쓰러 잠시 나왔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스키장으로 향하는 리프트에 올라탄 이후였다.
* * *
“헤헤.”
“……그렇게 좋아?”
“그럼!”
정우는 아까 전 자신의 대답을 떠올렸다. 그녀를 받아들여준다고 하진 않았다. 그저, 누구든 평등하게 사랑하겠다고 말했을 뿐.
그래. 현대인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이상한 발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그에 수긍했고, 기뻐했다.
‘이상한 애라니까.’
유일이 되지 못해도 좋다. 버림받지만 않으면 된다. 은혜는 그렇게 타협했다. 어차피 그가 없다면 자신의 인생은 남는 게 단 하나도 없으니까.
남들과 공유하게 되더라도 자신을 사랑해준다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
“뭐라고 했는데?”
급하게 화장실을 다녀온 마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돋았다. 무슨 말을 했길래 저렇게 좋아하는걸까. 사귀는 것도 아니라면서.
마리의 질문을 들은 은혜는 정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걸 말해도 될지 아닐지, 정우가 정해야만 했으니까. 다행히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은혜는 아무 생각 없이 지껄였다.
“정우가 나를 사랑해준댔어.”
“……그러니까, 너랑 사귀자고 했다고?”
“아니? 나를 사랑해준다고 했다고.”
“그게 뭔…… 그게 사귀자는 거 아니야?”
“아닌데?”
마리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사랑해준다니, 그런데 사귀는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 밥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녀가 아는 사랑이란 상사상애. 즉, 남녀간의 연애였다. 사랑은 하되 연애하지 않는 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설마.”
은혜는 ‘사랑해준다고’ 했다. 그건 이상한 단어다. 보통은 사랑받는다니까. 사랑해준다니, 마치 여럿에게 뿌리는. 그리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듯한 말투.
그리고 정우 곁엔 버리기 아까운 미소녀들이 즐비해 있었다. 대체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를 정도로.
“정우, 너…… 설마.”
“왜 그래?”
경악할만한 비밀을 알아차린 마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뭐라 말할지 고민했다. 그런 건 나쁜 짓이다. 다른 애들에게 말하겠다?
‘안 돼.’
다른 아이들은, 그러니까 우림이나 예슬, 자희는 안 된다. 그녀들은 이미 정우에게 빠질대로 빠져 버렸으니까. 막을 수 없다.
‘미친.’
생각해보니, 말해도 바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 미쳐버린 계획에 반대할 사람이라는 걸.
‘이런 미친 일이 다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