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미쳤어. 이건 미친 짓이라고.’
알고 있다. 이게 미친짓이라는 걸, 그리고 사회에서 비판받을 일이라는 것도. 그러나 거부할 수 없다. 모든 미친일들은 미칠만한 이유가 있다. 마약은 미칠듯한 중독성때문에, 도박은 미칠듯한 승리감과 성취감때문에.
사랑도 그렇고, 단것도 그렇고. 미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달다. 너무 달아서, 미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다. 역사 속 성인(聖人)쯤 되어야 이를 마다할 수 있으리라.
아쉽게도 마리는 성인이 되지 못했다. 아직은 미숙한 미성년이었고, 자기 감정을 뛰어넘을 정도로 이성적이지 못했다.
“……정우 너, 진심이야?”
“뭐가?”
“정말로, 모든 애들이랑 사귀겠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나?”
정우는 살짝 싸늘한 눈빛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눈빛이었지만, 그렇기에 확연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부감, 경계심. 마리를 밀어내는 그런 감정.
‘안 돼.’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
“그럼 됐지?”
그제야 미소를 피우는 정우의 모습에, 마리는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닫았다. 야생성 강한 날것 특유의 감각이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예민했다.
마치 껍질을 막 깨고 나온 아기새처럼, 모든 것에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그렇기에 건드리는 건 악수였다. 새끼는 부모를 제외한 모든 걸 경계하고 거부하니까.
‘은혜 네가…….’
하필 그 부모 역할을 은혜가 맡았다는 게 불만이라면 불만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은혜가 저렇게 딱 달라붙어 있는 것도, 정우가 그를 용인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분명 정우가 가진 깊은 트라우마나 고민을 해결해주었겠지. 그녀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녀는 알 수 없는 경험으로.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 부모 다음으로 소중한 건 애인이다.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된다. 마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었다.
“어라, 은혜야. 스키 타게?”
스키장에 도착하자, 스키에서 보드로 갈아끼고 있던 우림이와 마주했다. 우림이는 은혜와 마리가 정우의 팔짱을 끼고 있다는 사실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금세 표정을 풀어헤쳤다.
주름은 여자의 적이었으니까.
“둘이 사이 좋네. 팔짱도 다 끼고.”
“그치? 나도 알아.”
“……오늘따라 기운차네.”
마치 우림이에게 자랑하듯 팔을 더 강하게 끌어안는 은혜, 그걸 본 우림이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봤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으음, 뭐하는거야? 정우랑 무슨 놀이?”
그래서, 그녀는 현실 도피를 시작했다. 때마침 평소라면 정우에게 애교따윈 부리지 않는 마리도 정우에게 팔짱을 끼고 있겠다, 현실에서 눈돌리기엔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야, 잠깐 이리 와.”
“어? 어? 왜? 급해? 중요한 거야?”
“중요한 거니까 일단 따라와.”
마리는 힘으로 우림이를 이끌고 두 사람에게서 떨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삥을 뜯는 양아치 같아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뭔데?”
“……추측인데 말이야.”
“추측같은 거 들을 시간…….”
“정우가 고백을 한 거 같아.”
“……뭐?”
앞뒤 다 자른 문맥에 우림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백이라, 누가? 정우가? 누구한테? 그년한테?
‘말도 안 돼.’
정우는내꺼야나만을사랑해누가감히그런일을하는데누가누가대체누가은혜그년이어째서선택받아내정우에게나만을사랑하는정우에게말도안돼거짓말하지마죽어죽여버려
“야, 야? 소우림?”
마리가 이상함을 느끼고 우림이의 어깨를 흔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림이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 뭐라고?”
“그러니까 정우가 좀, 바뀌었다고.”
예전의 정우는 벽을 치고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벽. 다른 애들은 느끼지 못한 듯했으나, 그녀는 짐승같은 감각으로 그를 깨닫고 있었다.
그녀가 정우와 하룻밤을 나누고, 평생 하지 않을 애교를 부리며 아양을 떨고 있을 때도 그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정우는 그 벽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가족처럼, 둘도 없는 애인처럼. 은혜는 물론이고 자신마저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게 뭐? 그거랑 정우가 고백한 게 무슨 상관인데?”
“정우의 마음이 바뀐거지. 아마…… 은혜랑 사귀자고 말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더라면 어째서 은혜를 받아주지 않은건지 의문이지만, 마리의 부족한 머리로는 그정도 추론이 한계였다. 그마저도 틀린 게 흠이지만.
“……정우가, 바뀌었다고?”
그 말을 들은 우림이는 살짝 충격을 먹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변하는 정우의 모습 따위 보기도 싫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우는 은혜에게 물들어 변해버렸고, 그걸 무식한 마리가 눈치챌 정도니.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래, 어떻게 바뀌었는데?”
아쉽게도 우림이는 정우가 어떻게 변한건지 알지 못했다. 현장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정우 앞에서 그걸 티내고 싶지 않았다. 정우에게 있어 우림이는 언제나 그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유일한 아군이어야만 했다.
만일 정우에 대해 모르는 게 생긴다? 그리고 그걸 정우에게 들킨다? 우림이는 수치심과 자책감으로 혀를 깨물고 자살하고 말리라.
“벽이 사라졌어.”
“벽, 벽이라.”
그런 거,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림이는 마리의 말을 신용했다.
‘거짓말해서 이득볼 것도 없고, 그럴 머리도 안 되는 애니까…….’
신용되는 이유는 상당히 신랄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신용이 간다. 벽이 사라졌다라. 어떻게 생각해야하는걸까. 실은 정우가 벽을 치고 있었다고? 대체 무슨 벽?
‘그러고보니.’
정우에게도 벽이라는 게 있기는 했다. 특히 연애쪽에. 은근슬쩍 밀어내는 벽 같은 게 존재하기는 했다. 물론 우림이는 항상 진심이었고, 그녀의 진심이란 결혼이었으니까. 정우가 밀어내는 것도 이해했다.
결혼이란 서로에게 소유되는 것. 자유롭게 여자를 만나고 다닐 수 없게 되니, 학창시절 마지막 놀이라는 걸로 풀어주었다.
그러나 그게 결혼에 속박되는 걸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누구랑도 사귈 생각이 없어서 그랬던 거라면?
‘설마.’
그리고 놀랍게도 그 벽을 은혜가 처음으로 뚫어낸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더러운 역겨움이 온몸을 기어오른다. 꿀을 바른 개미가 살을 타고 올라와, 뒤따라오는 개미들이 그 살을 파먹는듯한 감각.
간지럽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옷 위로 살을 벅벅 긁어댔다. 두꺼운 스키복이 아니었더라면 피부가 찢어져 피가 날 정도로. 그러나 가녀린 손톱은 스키복을 뚫지 못하고 뜯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야! 뭐해!”
마리가 우림이의 손을 억지로 떼놓고 나서야, 우림이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피가 철철 흐르는 손톱을 내려보다가 생각했다.
‘정우가 걱정해주지 않을까?’
이걸로 정우의 관심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나만의 정우로 돌아와주지 않을까?
그래. 그럴거야. 내가 아프면 찾아와줬으니까. 나만을 생각해줬으니까. 내 정우라면, 분명.
우림이는 그 길로 정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실수로 넘어졌다는 듯 은연중에 손을 감추며 시선을 그리로 끌었다.
“어, 우림아. 다쳤어?”
“아, 별거 아니야. 그냥…… 넘어졌어.”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숨긴다. 정우는 자연스레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살핀다.
‘역시, 변하지 않았다.’
정우는 여전히 자신만을 봐준다. 자신을 사랑해준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보살펴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주고.
“괜찮은 게 아닌데? 손톱 다 부러졌잖아.”
우림이의 손 상태를 확인한 정우는 그대로 그녀를 이끌고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 안에는 의무실이 있었고, 의사는 다 깨진 그녀의 손을 보더니 침음성을 흘렸다.
“약 바르고 붕대 해드릴테니까, 술담배 하지마시고, 과한 운동 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네.”
“일단 처리는 해드렸는데, 돌아가신 후에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병원에 들려서 진료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우림이는 혹심을 담아 물었다.
“저, 선생님.”
“네?”
“물도 닿으면 안 되죠?”
“어휴, 당연하죠. 물 닿으면 클나요. 샤워도 자제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진료가 끝나고 나온 우림이는 밖에서 기다리던 정우에게 다가갔다. 우림이를 기다리던 정우는 그녀를 보고 곧장 고개를 들어 물었다.
“괜찮데?”
“응. 괜찮대. 아, 근데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 조심해야겠네.”
“그래서 말인데…… 나, 사실 땀을 조금 흘려서 씻고 싶거든.”
“물 닿지 말라며?”
“그러니까…… 씻겨줄래?”
“……어?”
우림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걸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정우야, 어떻게 할래?’
그는 분명 그럴 것이다.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