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정우와 찐한 정사를 나눈 우림이는, 그대로 침대 위에 축 늘어져 몸 안에 남은 여운을 즐겼다.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즐거움이자,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살짝 옆으로 돌아누운 그녀는, 색색 숨을 쉬며 잠에 든 정우를 보며 미소지었다. 잘생겼다. 그녀 눈에 콩깍지가 심하게 낀 걸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평균 이상의 외모였다.
‘잘생긴 게 최고야…….’
하물며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면, 서로 상사상애하는 사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우림이는 잠든 정우의 볼따귀를 살짝 꼬집어보았다. 뭘 먹고 바르는지, 갓난아기보다 부드러운 우유피부가 손가락을 튕겨낸다.
그렇게 몇 번 볼따귀를 갖고 놀자, 정우가 으음…… 잠꼬대를 내뱉으며 뒤척였다. 그러면서 팔다리가 우림이를 얽매이고 껴안자 그녀는 가슴에 정우의 머리를 품으며 쓰다듬었다.
“……푸하아! 뭐야!?”
그러나 그녀의 커다란 가슴은 흉기였다. 사람을 가볍게 죽이는 흉기. 정신적인 의미가 아닌, 물리적인 의미로도 동일했다. 거대한 지방 덩어리는 정우의 코입에 달라붙어 숨을 막았다. 숨이 막힌 정우가 팔다리를 흔들며 깨어났다.
“아, 미안. 일어났어?”
“……뭐야, 가슴이었네.”
자신의 숨을 막은 물건이 커다란 가슴이라는 걸 깨달은 정우는 오히려 가슴에 뺨을 묻고 잠에 들었다. 진짜 아기마냥 가슴을 찾는 정우의 모습에, 모성애를 자극하는 그 모습에 우림이는 그를 꼭 껴안고 부비부비 비볐다.
“……둘이 뭐해?”
그리고 그 모습을, 문을 열고 들어온 자희에게 들키고 말았다. 자희는 오전부터 발가벗고 껴안고 있는 문란한 두 남녀에게 불쾌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쉬잇.”
하지만 우림이는 같은 여자에게 알몸을 보인다고 당황하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이 모습이 찍혀 전세계 포르노 사이트에 공개되더라도, 그녀는 곤란한 일이 없었다.
물론 정우의 알몸을 다른 여자들이 본다는 사실에 큰 불쾌감을 느끼기는 하겠지만. 이미 정우와 정을 나눈 자희가 보는 일 정도는 그녀도 눈감고 넘어 가줄 수 있었다.
“정우 자잖아요. 선배.”
“나도 알아. 왜 그런 모습으로 껴안고 자고 있냐 그거지.”
“어라, 선배. 남녀가 알몸으로 붙어 있으면, 하나밖에 없지 않아요?”
자희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담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 재확인하는 게 불쾌했을 뿐.
“알아. 대낮부터 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
“언제부터 낮에 섹스가 금지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럼 선배는 밤까지 기다리세요. 아직 낮이니까요. 아, 저는 한 번 더…….”
“잠깐.”
우림이 자연스레 정우의 아랫배로 손이 가는 걸 확인한 자희는 성큼성큼 다가가 우림이의 손을 막아 세웠다. 우림이는 짜증난다는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자희는 표정변화 하나 없이 말했다.
“얘 자잖아.”
“……그러네요.”
그건 우림이 자희에게 입을 다물게 할 때 써먹었던 변명. 자승자박이라고, 자기가 했던 말에 그대로 당한 우림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냥 정우를 껴안고 쓰다듬는 데 그쳤다.
아쉽게도 그건 막아내지 못했다. 정우가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굳이 정우를 깨우면서 까지 그녀를 말릴 명분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어요?”
“너 다쳤다길래, 약 사왔는데.”
자희는 그렇게 말하며 상처에 바를 연고와 밴드가 든 봉투를 들어올렸다. 마침 씻고 붙일 밴드가 없던 우림이는 고맙다는 듯 그걸 받아들여 손톱위에 붙였다.
손톱이 뜯긴 거지 상처가 생긴 건 아니라 연고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려오는 손톱을 지그시 내려보던 우림이는 피가 새어 나오는 손가락을 살짝 입에 물어 피를 쪽쪽 빨다가, 침과 피로 범벅이 된 손가락을 그대로 정우 입에 집어 넣었다.
침으로 중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살짝 비릿한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정우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익숙하다는 듯 손가락을 쪽쪽 빨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가락을 빠는 정우를 보면서, 우림이는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아랫도리에서도 물이 질질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식어가기 시작하는 몸이 다시금 달아오른다. 숨이 가빠진다. 마침 몸을 식히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알몸의 남성이 눈앞에 있다. 허벅지를 부비대며 우림이는 다시금 정우의 아랫도리에 손을 가져가댔다.
자희가 막지만 않았더라도.
“뭐하는거야.”
화악! 이불을 들춘 자희는 알몸의 두 남녀를 확인하고 이불을 아예 저 멀리 던져버린다. 아무리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다른 여자 앞에서 섹스를 할 정도로 맛탱이가 가 있는 건 아니었던 우림이도 하던 짓을 멈추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깔끔하게 이불을 정리한 자희는 빨리 씻고 나오라는 듯 눈치를 준다. 우림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욕실로 들어갔다. 떠나가는 가슴을 붙잡는 손길이 그녀의 엉덩이를 스치고 지나간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어느새 일어난 정우가 목욕타월 하나만으로 하반신을 가리고 있었다. 우림이 나온 걸 확인한 정우는 허리춤에 타월을 두르고 욕실로 들어간다. 뒤 따라 들어가고 싶은 걸 자희가 막는다.
하지만 우림이에겐 한 가지 필살기가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희를 고꾸라트리고,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 수 있는 필살기가.
“그거 알아요?”
“알아.”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줄 알고?”
“그건 몰라도 돼.”
그러나 자희는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릴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흥미 없다는 듯. 호텔 객실 내부에 비치된 TV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때웠다. 흥미 없어 보이는 그녀의 옆에서, 우림이는 옷을 주섬주섬 걸처 입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에 여행 온 사람 중에서, 정우랑 못해본 사람은 선배밖에 없는 거 같은데.”
“…….”
“하물며, 하루 늦게 온 마리도 한 모양이더라고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빠른 것도 정도가 있지.”
“……뭐 어쩌라는거야?”
“아뇨, 별 건 아니고.”
마리에게서 정우의 마음가짐이 바뀌었다는 걸 들은 우림이는, 일단 경쟁 상대를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오는 여자 안 막는 정우가 먼저 누군갈 떠나 보내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 우리끼리 알아서 위아래를 정하고, 떠날 사람 떠나 보내는 게 맞겠지.
“이번 여행동안, 한 번도 못 한 사람은 정우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웃기는 소리네.”
“하지만, 그렇잖아요? 정우는 이미 다섯이나 되는 여자가 있는데. 그 중 한 둘에겐 소홀해질 수도 있죠.”
사랑이 떨어졌다. 우림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어떤 사랑을 속삭였든간에, 이제와선 소용 없다고. 사랑이 식은거라고.
그만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찾아 가라고. 은연중에 그렇게 둘러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자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기죽지 않았다. 자신 빼고 모두 정을 나누었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고, 설령 사실이어도 상관없다. 그를 기반으로 다음에 그를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한 대 얻어맞은 게 분해서 반격하는 거다.
“은혜도, 마리도, 예슬이도. 벌써 다 했다는 거 아니야?”
즉, 너는 그 둘 중 네 번째다. 나와 네가 다른 게 뭐가 있나.
“게네들보다 네가 매력이 떨어지나 보지?”
“……설마요.”
씨익, 우림이가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도 내심 그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여성성을 쓸데없이 부각하는 큰 가슴과 엉덩이. 정우는 좋아라했지만, 보편적인 남성은 커다란 둔부와 거유를 선호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무의식에 각인된 상식은 그리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실제로 결과가 말해주고 있잖아.”
“아니야.”
“네 매력이 떨어진거야.”
“아니야!”
“뭐가?”
철컥, 하고 큰 소리를 들은 정우가 머리를 닦으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을 강탈하는 모습에 자희와 우림이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미소를 펼치며 말을 돌렸다.
“응, 아니. 그냥. 선배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별거 아니야.”
캣파이트는 생각보다 추하다. 자고로 여자든 남자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들은 본연의 모습을 감췄다.
“그래? 그럼 됐고.”
정우도, 여자끼리의 싸움에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