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5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105/218)



〈 105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시간이 빠르게 흘러, 저녁 시간이 되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마지막 저녁. 아직 추억을 만들지 못한 자에겐 마지막 기회. 그러나 자희는 그런 것에 관심 없다는 듯 음식을 깨작였다.

그 모습에 정우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그릇에 담겨 있는 마카로니를 퍼다 날랐다. 그나마 그녀가 비운 음식이 그거였기에, 이거라면 더 먹을까 싶어.

“괜찮아.”

하지만 정우가 내미는 숟가락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자희는 고개를 저었다. 오고 갈데 없어진 숟가락은 그렇게 허공에서 잠시간  있다가, 옆에서 정우의 옷자락을 자꾸 잡아당기는 은혜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선배, 어디 아파?”

자꾸 자신을 밀어내는 자희를 보며, 정우도 살짝 벽을 치곤 말했다. 자희는 곧장  사실을 깨달았지만 자존심일까 계락일까, 고개를 저으며 그냥 컨디션이 좋지 않다 말했다.

그녀가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정우도,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그냥 옆에서 꽁냥대기 시작했다. 자희도 정우가 꽁냥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움찔거리며 반응했지만, 그 외에 다른 행동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괜찮아. 아직 괜찮아.’

자희는 자신이 굉장히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라는 생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했을 때,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보다 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니까.

그녀의 생각이 옳았을까, 한때 그녀에게 시선을 떼놓았던 정우는 힐끔힐끔 그녀를 훔쳐보곤 했다. 그러나 먼저 오진 않았다. 괜찮다.  정도 관심이면 충분했다.

“먼저 올라갈게.”

자희는 빠르게 식판을 비우고 방으로 올라갔다. 모든  완벽했다. 이제 정우가 그녀를 뒤따라오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생리하나?’

이 세상의 남자들과는 약간 다른 가치관을 가진, 그러므로 여자에 대해서 잘 알면서도 모르는. 정우는 그냥 생리라도 와서 기분이 별로인갑다 여기고 그녀를 뒤따라가지 않았다.

그게 자신에게 관심을 달라는 어필이라는 건, 절대로 깨닫지 못했다. 지금껏 그에게 관심을 요망했던 인물이 없었으니까. 남자로 태어났던 그는 관심을 받는 존재라기보다, 관심을 주는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굳이 관심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다가와 주는 미소녀들이 넘쳐났으니, 한 명에게 쓸 관심이 부족하기도 했다.

‘버리진 않겠지만…….’

아니, 이젠 버려져도 상관없나. 정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음식을 넘겼다. 현실보다  현실 같은 이 세상에서 먹는 밥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 * *

‘안 와…….’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자희는 아무런 내용이 담겨 있지 않은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거짓 웃음을 자아냈다.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담아도 그녀의 마음은 꽁꽁 얼어 그녀의 정신과 몸을 조금씩 좀 먹어갔다.

‘재미없어.’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다.  말이 딱 어울렸다. 보고 있으면 바보처럼 웃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누구도 바보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멍청한 행동에는 끝이 있다.

‘어째서?’

자신이 틀린걸까, 자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멍청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기보다, 자신이 틀림으로서 불러올 후폭풍이 두려웠다. 자신은 정우에게 등을 돌렸다. 그에게 가시를 들이댔다.

자신을 찌르는 생물은  누구도 다가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희가 바랬던 건 무관심이었지 적대가 아니었다. 자신이 정우에게 적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희는 후회와 자책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똑똑.

“……들어와.”

그러나 결국 그녀가 맞았던 걸까, 자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노크한 손님을 불러들였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 사람은 정우가 아닌 예슬이었다.

“……뭐야?”

“아, 저기. 우리 이제 마지막 밤이잖아? 정우가 앞에서 불꽃놀이 하자는데. 안 갈거야?”

“……갈래. 먼저 가서 기다려.”

“그래, 1층에서 기다릴게. 빨리 와라?”

예슬은   마디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그녀가 방을 나선  잠시 후. 자희는 자신이 챙겨온 가장 멋들어진 옷을 뒤적거렸다. 꾸민 티를 내면 안 되면서, 그리 추워도 안 된다. 안에는 가볍게 반팔 반바지, 위에는 안쪽에 털이 달린 털코트를 걸쳤다.

꽁꽁 싸매고 있으면 따듯하고, 은근슬쩍 각선미를 자랑할 수도 있는 옷이었다.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온 자희는 1층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늦어.”

“미안.”

“사실 우리도 방금 나왔어. 가자.”

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비닐봉투를 들어 올렸다. 봉투 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폭죽이 눈에 들어왔다.

폭죽을 진짜 파는구나. 근처 산이 있는데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동시에 호텔에서 점검을 했으니 괜찮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이런 일로 딴지를 걸었다가  이상 정우의 호감도를 깎아 내리는 짓을 하기도 싫었고.

“폭죽은 어디서?”

“여기 앞에 원래 폭죽 터트리는 장소가 있다고, 거기서 터트리래요.”

옆에 붙어 있던 은혜가 기대된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대답했다. 폭죽을 들고 밖으로 나가니, 슬금슬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동글고 예쁘게 뭉친 눈송이를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더 내리기 전에 빨리하자.”

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폭죽을 땅에 박고 라이터를 탁탁, 점화시켰다. 폭죽에 불이 붙고 화약이 터져 나간다. 공중에서 폭발한 폭죽은 화려한 꽃을 수놓는다. 하늘에 형형색색 빛나는 폭발이 일어난다.

보고 있으면 절로 시선을 빼앗긴다. 그러다 시간도 빼앗긴다. 자신이 어째서 여기에 왔는지 완전히 잊어버린다. 열중하게 된다. 그래선  된다. 자희는 고개를 저으며 정우 곁으로 다가갔다.

“…….”

뭐라 말을 시작해야 할까. 세상 온갖 문제를 가볍게 풀어낼 수 있는 그녀의 두뇌로도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시작할 말은 들어 있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는 쉽게 풀어낼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막무가내에 가깝게 말을 던졌다.

“미안.”

“뭐가?”

“……그냥, 전부.”

“하하, 갑자기?”

정우가 배시시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이다. 스키장에 와서 이렇게 눈을 마주치는 건. 처음이었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달은 자희는 눈에서 꿀이 떨어지도록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있잖아.”

자희는 입에 풀이라도 붙은 듯, 딱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놓는  온 힘을 다했다. 힘겹게 떨어진 두 입술 사이. 새하얀 이빨 사이에 분홍빛 혓바닥이 열심히 굴러갔다. 그렇게 말은 만들어진다.

“그거, 정말이야?”

“그러니까 뭐가?”

“……이번에 온 애들이랑, 다 잤다는 거.”


진짜여도 상관없다. 그녀가 왜 나한테만 안 대주냐고 뭐라 할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슬플 거 같기는 했다. 자신이 마지막이고, 다른 아이들보다 뒤쳐졌다고 생각하면.


“누구한테 들었어?”

“그냥, 뭐…… 오고가다.”

“우림이구나.”

정우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순식간에 소문의 출처를 알아내었다. 사실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도 했다. 그녀와 그리 친하지도 않고, 방도 다른 예슬이나 은혜가 먼저 그런 말을 꺼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는 우림이와 정우가 정사를 나눈 뒤의 모습을  눈으로 목도 했으니. 우림이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어도 이상한  없다.


“맞아.”

사실이었기에 거리낌 없이. 정우는 사실을 내뱉었다. 알고 있던 사실도 본인 입으로 듣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생소한 충격이라고 할까.


“왜? 경멸했어?”


남자인 내가 몸을 막 굴려서 경멸했냐고, 실망했냐고. 걸레 같냐고. 정우는 그렇게 물었다.


절레절레, 자희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 인터넷 속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내뱉을 땐.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 버려버리라고. 세상에 남자는 많다고. 욕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상에 널리고 널린  남자지, 정우가 아니었다. 세상에 정우는 단 한 사람이었다. 눈앞에 있는 한 사람. 다른 사람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줄  있는 쾌락도, 애정도, 모든 것들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나는 네가 좋다. 네가 사랑스럽다. 이런 느끼한 말들을 대뜸 내뱉을 수 없는 게 그녀의 단점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도 답답하게 느껴지는 성격에 가슴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용기를 낼 타이밍이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성이 아니라 본능으로 행동할 타이밍. 동물 같은 움직임이 필요할 때였다.


“나는 네가 좋아.”


독점하고 싶다. 다른 여자애들은 접근도 못 하게 만들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자유분방하고 모두에게 인기 있는, 그런 정우가 좋으니까.


모순되는 마음이 사랑의 원천이다. 그러니까─

“나만 사랑해줘, 라고는 말하지 않을게.”


나만이 아니라, 나도.
이런 나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
너는 과연 이런 나를 받아 들여줄까.


* * *

“뭐야, 둘이 무슨 얘기해?”


자희와 정우가 둘만의 사랑노래를 속삭이고 있을 때, 마리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를  마리는 무슨 이야기 도중이었는지 곧바로 깨닫곤 중얼거린다.

“그럴 때는 직설적으로 얘기해. 나도 섹스하고 싶다고.”

“……!?”

그녀는 악질적인 분위기 브레이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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