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NO.1H 겨울밤의 스키장
“섹스해, 섹스!”
갑작스런 섹무새의 등장에 정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리를 노려보았다.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마치 술 취한 취객마냥 깽판을 부리고 있었다.
‘취객?’
그 생각이 든 정우는 마리의 몸에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마리는 갑작스레 자신의 냄새를 음미하는 정우의 모습에 놀라 살짝 뒤로 빠졌지만, 이미 정우는 냄새를 포착하고 난 이후였다.
“……너 술 먹었냐?”
“응! 술 먹었지!”
“어디서 구해서?”
“몰라, 냉장고에 있던데?”
끄흑, 하면서 그녀의 단 숨냄새를 맡는다. 와인이다. 예약할 때 부모님 이름으로 예약을 해서 그런걸까, 아니면 아직 헐렁헐렁한 시대이기 때문일까.
마리는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냉장고에 비치된 와인을 까마셨다. 호텔 측에서도 조심했어야 하는 일이다. 미성년자한테 술을 팔았다는 걸 들키면 영업 정지를 당할테니까.
“그거 돈 내야 하는데.”
“하하, 나도 이제 일 하는데! 까짓거 내면 되지!”
“한 십 몇 만원 할껄?”
“……이거 지금 토하면 환불 되냐?”
소주 한 병이 천 원을 넘지 않는 이 시대에서. 소주 백 병짜리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 마리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정우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그녀에게 술값은 알아서 계산하라 말해주었다. 월 200이 넘는 월급을 받는 그녀였지만, 저축의 재미에 빠져 돈을 모으고 있는 그녀의 입장에서 갑작스레 십만 원의 지출은 크나큰 출혈이리라.
순식간에 우울해져 터덜터덜 걸어가는 마리를 뒤로 하고, 정우는 다시 자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나눌 이야기도 없었다. 에둘러 표현하긴 했으나 이야기의 본질은 마리가 말한 것처럼 ‘나 너랑 자고 싶어.’ 가 전부였으니까.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꺼낼 말이 없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서로의 알몸을 부끄러워했듯이, 마리라는 선악과가 그들의 본심을 벌거벗겨 버렸다.
“어, 음. 그러니까…….”
“내가 말실수를 좀 했네. 미안.”
먼저 입을 연 건 자희였다. 정우보다 한 살 많은 연상의 여유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모든 걸 털고 일어났다.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본 정우는 떠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겨울의 찬 바람이 피부를 서늘하게 식히기 시작했다. 겉이 차가워진 만큼, 속은 뜨거워지기 마련이다.
속에서 열불이 난다. 부글부글 끓는다. 그게 무엇인지. 정우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성욕이었다. 약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이 세상 여자들에게서 쉽게 느낄 수 없던, 약한 모습을 내보인 여성을 지키려 하는 남성 특유의 본능이다.
“춥네.”
“……그렇지. 겨울이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바람이 사무친다. 춥다. 추위를 떨쳐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체온을 나누는 것이다. 정우는 자희를 끌어당겨 껴안았다. 그녀 역시 찬바람에 식어 서늘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딱 달라붙어 있으니 금세 따듯한 체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하는거야.”
“추워서.”
“……추우면 들어가지?”
“아니, 지금은 그냥 이러고 있고 싶은데?”
남자 품에 껴안긴 여자라는, 원래 세상에서 보자면 아무런 문제 없는 애정행각이었으나. 이 세상에서는 주로 반대되는 상황이 많이 일어나기에. 자희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어필했다.
이런 건 보통 어른 남자가 어린 여자아이에게 하는 행위였으니까. 원래 세상에선 전문 용어로 이런 걸 오네쇼타라고 불렀다.
“……애들이 보고 있는데.”
“보라고 하지.”
그 말에 정우도 힐끔 다른 애들을 확인했다. 폭죽을 구경하던 애들은 폭죽이 모두 다 떨어지고, 둘이서 꽁냥대고 있는 정우와 자희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배시시 웃으며 자희를 더욱 강하게 껴안는다.
자희는 옴쌀달싹 하지 못하게 된 몸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리 싫은 내색을 보이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의 품에 껴안겨 놓고 싫어할 사람은 없다.
하물며 지금은 샤워도 화장도 완벽하게 마치고 나온 상태. 몸에서 냄새가 나거나, 옷이 이상해보일 염려도 없다. 그저 몸을 맡기기에 딱 좋은 상태.
“아무도 놓치지 않아.”
“욕심이 많네. 찔린다. 그러다?”
“누가? 네가? 아니면, 우림이가?”
“……그것도 그러네.”
정우는 대놓고 양다리도 아니고 문어다리를 치겠다 말했지만, 그럼에도 정우를 떠날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평범하게 남녀 둘이 만나서 친구가 되고, 어쩌다 보니 서로가 좋아지게 되서 연인이 된 게 아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좌지우지하는 사춘기. 그 사춘기에 인생을 바꿀만한 경험을 준 게 정우였던 것이다. 이건 그 어떤 남자가 와도 줄 수 없는 경험이요, 바꿀 수 없는 고유의 감정이다.
그녀들은 평생 정우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고, 그렇기에 평생 정우에게 속박되어 있다. 정우를 죽인다? 상상도 못 할 일. 당장 사고로 그가 죽는다면 따라 죽을 정도로 그녀들은 그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균등하게 사랑해줄 순 없잖아.”
“노력할게. 힘들겠지만.”
“노력이라. 듣기에만 좋은 말인걸.”
정우가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한다 말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만 보아도 어떠한가. 그녀를 제외한 모두와 하룻밤을 이미 나누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공공연하게 알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누군가는 덜 사랑받게 된다. 사랑한다는 사실이 차별로 돌아온다. 모순이었다. 그러하기에 하렘이나 역하렘이나, 일대다의 사랑은 언제나 실패한다.
“말뿐인 노력은 그치. 이제부터 실천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정우는 시리디 시린 손을 그녀의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녀도 그리 두껍게 입고 나온 건 아니어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겨울임에도 두 살덩이가 맞붙는 부분은 후끈했다. 작지 않은 크기인 그녀의 가슴골 사이도 그러했다. 겨울임에도 난로에 손을 넣은 양 화끈거렸다. 가슴 난로가 따로 없었다.
“……차가워.”
“조금만 참아.”
“응. 참을게.”
툭, 하고 스스로를 지탱하던 그녀의 체중이 정우에게 쏠린다. 두근두근, 그녀를 유지하던 체온이 정우에게 몰린다. 몸도 마음도 모조리 빼앗긴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걸까.
추위에 사무치는 몸이 좋았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정우에게 몸을 맡기면 얼마 안가 돌아오는 체온이 좋았다. 그냥 모든 게 좋았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둘이 뭐해에─?”
그리고 사랑으로 향하는 길은 항상 가시밭길이다.
“보면 몰라?”
그렇기에 그 길을 걷는 자, 스스로를 두꺼운 장갑으로 둘러싼다. 날카로운 우림이의 말에도 자희는 기죽지 않고 턱 끝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리켰다.
“애정행각.”
너는 못하는 거. 살포시 흘려준다. 우림이는 삐죽거리는 입을 채 숨기지 못하고 정우와 눈을 마주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는 눈빛. 정우도 알았다며 자희의 가슴 속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녀의 열기가 남아 있어 따듯했다. 손이 식지 않게 곧장 주머니로 향하자, 틈을 노린 우림이가 그대로 정우의 팔뚝에 달라붙었다.
“돌아가면, 할래?”
너무나 노골적인. 그럼에도 정우는 싫어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언동. 그리 길지 않은 인연이었음 에도 불구하고 우림이는 정우가 남자보단 여자에 가깝다는 걸 쉬이 깨달았다.
은유적인 표현보단 직설적이게, 감성보단 이성적으로, 그러면서 때때로 본능에 몸을 맡기는 생물에.
“아니.”
그렇기에 우림이는 정우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여성성은, 정우가 알고 있는 ‘남성성’에 한없이 근접하긴 했으나,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았으니까.
“오늘은 네 차례가 아니지.”
정우는 그걸 의리라고 불렀다. 여성들에게는 존재할 수 없는 감정. 감각. 이 세상에서 정우만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감각. 너무나 이성적이게 바뀐 남성이나, 더욱더 본능적이게 된 여성은 알 수 없을 단어였다.
“응……?”
“네가 말했다며. 누나한테.”
“뭘?”
우림이는 가볍게 시치미를 똈지만, 그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미 정우의 머릿속엔 그녀의 행각이 각인되었으므로.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자희 누나 차례지.”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겨울 방학. 스키장에서의 마지막 밤은 자희가 가져가게 되었다. 자고로 사람이란 마지막을 기억하는 법이라. 다른 이들은 진정한 승리자가 그녀가 아닐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