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NO.6 아름다운 그녀가 다가온다
무사히 겨울 방학을 마치고, 정우는 2학년이 되었다. 물론 아직 2학년이 된 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1학년이었다.
“얘들아. 겨울 방학 동안 재밌게 놀았냐?”
“재밌게 놀았죠! 쌤은요?”
“하아…… 니들이 뭘 알겠냐.”
거의 몇 달 만에 얼굴을 보는 담임 선생님. 신주희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애초에 방학이라고 해서 신나게 놀 수 있는 건 학생들뿐. 선생들은 방학 도중에도 학교에 나와 방과 후 수업을 진행하거나, 방학 특강을 진행해야만 했다.
물론 학생들과 실랑이 하는 것보다는 편하다. 그래서 그런지 방학을 일종의 휴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주희는 양쪽 다 아니었다. 그냥 일하는 게 싫었다. 어여쁜 미녀로 태어나 잘생긴 남편에게 부양받으며 사는 가정주부가 되고 싶었다.
현실은 꿈처럼 달콤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차피, 일, 이주 나오면 봄방학이니 뭐니, 또 쉬잖아? 왜 이렇게 방학이 많은 거야? 공부는 안 하나?”
“쌤. 선생이라는 사람이 그런 말 해도 돼요?”
“뭐 어때. 꼬우면 너희도 공무원 해라. 지금 니들처럼 공부해선 못 하겠지만.”
선생이 잔혹한 현실에 대한 냉담을 쏟아붓자, 아이들이 야유와 탄식을 내지른다.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문이과 선택 말인데, 바꾸려면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혹여 방학 전에 생각이 바뀐 사람은 교무실로 와라. 니들 인생이랑 직결된 거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네에.”
‘문이과라.’
정우는 그제야 고등학생에겐 그런 게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뭘 선택했었는지 떠올렸다. 문과였다. 우림이나 선생님은 그의 두뇌가 아깝다고 이과로 오라고는 했지만, 정우는 이 세상에서 미래를 볼 생각이 없었기에 문과를 선택했다.
‘문과가 수업도 더 편하고.’
지금은 어떨까. 포인트는 넉넉히 벌었지만, 여전히 멀고 먼 길이요. 이 세상에서 평생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지금은?
‘지금도 마찬가지지.’
일단 이과로 가면 가장 큰 문제가, 새로운 히로인과 만날 수 없다. 앞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히로인은 모두 문과로 갔을 때만 만날 수 있으니. 설령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한다고 할 지어도, 히로인을 만나는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이제 얘들이랑도 잘 못 보겠네.’
지금까지야 같은 반이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2학년이 되면 반이 갈린다. 반이 갈리면 자연스레 몸도 마음도 멀어지게 되있다.
이미 공략이 끝난 그녀들이 자신을 배신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그녀들이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떠날지.
‘걱정해봐야 소용없나.’
정우는 선생님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몇 달 뒤 있을 일에 대해 대비했다. 이제 2학년이다. 3학년. 수능이 끝나고 졸업식을 엔딩으로 본다면 앞으로 2년.
이제 겨우 스토리의 3분지 1이 지나갔다. 반도 오지 못했는데 이렇게 힘들어해서 쓰겠나.
‘조금만 더 힘내보자.’
* * *
시간이 흐르고 흘러 봄이 오는 3월. 아직은 서늘한 날씨에 패딩을 걸치고 있는 학생도 있고, 이 정도면 괜찮다는 듯 동복만 걸친 채 뛰어다니는 학생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새로 만날 아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성실고등학교 입학식을 마치며, 학생 여러분들은 각 반 선생님의 인도에 따라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들, 인솔 부탁합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교장의 훈시가 끝나고, 정우는 눈앞의 선생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행이라고 할까, 불행이라고 할까. 2학년 담임은 1학년 때와 같은 신주희였다.
“아, 2학년이니까 별다른 말 안 해도 되지? 묻고 싶은 게 있으면 꾹 참고. 자기소개는…… 할까? 해야 되나?”
올해로 담임 2년차인 그녀는 짬이 찬 말년병장 마냥 모든 걸 귀찮아하며 대충대충 넘기길 원했다. 익숙한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다 흩어졌나.’
정우는 반 아이들의 면면을 훑으며 아는 사람이 한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아는 사람마저도 그리 친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냥 1학년 때 같은 반. 딱 그 정도 수준의 인연.
1년을 함께해온 은혜나 우림이, 마리와는 헤어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림이는 문과가 아닌 이과를 선택했고, 문과는 반이 6개나 있으니까.
‘둘 중 한 명 이랑은 될 줄 알았는데.’
설마 같이 문과에 지원한 둘 모두와 떨어지다니. 이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만일 1학년 떄의 히로인들이 계속 붙어 있다면, 새 히로인이 접근하기 어려울테니까.
‘조금 헤어졌다고 바로 다른 여자를 꼬실 생각 하는 나도, 문제는 있네.’
애정결핍에 걸린 사람 마냥, 끊임없이 히로인을 찾는 자신을 발견한 정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일단 같은 반 아이들이랑 친해지는 게 급선무겠지.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정우는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 않은 남정네들이 많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친구를 사귀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였지.’
이 세계에 오기 전엔 이미 나이를 하도 먹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일 자체가 적었고, 일 학년때는 히로인을 제외하면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으니.
‘이거, 좆된건가?’
아무래도, 나는 왕따가 될 상인가보다.
* * *
일주일이 흘렀다. 아이들은 서로 취향이 맞는 무리를 지어 뭉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어색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상하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은연중에 기싸움이 시작된다.
정우는 여전히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친구?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아, 이게 이런 문제가…….’
다른 반에 여자친구보다 더한, 어찌 보면 아내보다 더 친밀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공략 완료 히로인들이 줄을 서고 있다. 굳이 반 내부에서 친구를 사귈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핑계였다. 그냥, 그냥 말이 안 통했다. 2020년도를 살다 온 정우와 2000년대 초반의 시대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덕분에 반에서 친구를 사귀는 걸 포기하고, 정우는 그냥 원래 알던 애들과 노는 걸 택했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점심시간에도 반에서 자리를 비우는 게 골치긴 했지만.
“정우야. 너네 반은 어때?”
“응?”
“아니, 그러니까…… 뭐, 친구는 많이 사귀었어?”
정작 자기도 자기 반에서 친구를 못 사귄 주제에, 은혜는 자신이 그의 보호자라도 된다는 것 마냥 말을 꺼냈다. 그 모습이 사뭇 귀여워서 정우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기댔다.
“아니, 친구 한 명도 못 사귀었는데.”
“그, 그래? 어떻게 하지…….”
“그냥 은혜가 내 평생 친구 하면 되겠네.”
“으, 응! 내가 할게! 평생 친……구.”
친구라는 말에 집중하여, 설마 평생 그 이상의 관계는 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은혜를 내버려 두고. 정우는 우림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는 괜찮아?”
“뭐가?”
“혼자 이과로 갔잖아.”
“후후, 우리 정우가 걱정도 다 해주고. 이과 가기를 잘했네.”
우림이는 여유롭게 머리를 한 손으로 배배 꼬기 시작했다. 금세 롤 머리가 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던 그녀는 1학년 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면서 입을 놀렸다.
“설마, 내가 은혜도 아니고. 친구 하나 못 사귀었겠어? 그보다는 정우 네가 의외인데.”
“왜?”
“나 꼬실때는 그렇게 말만 잘 걸더니, 왜. 지금은 마음에 드는 애가 없어?”
“……내가 언제 너를 꼬셨다고.”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정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어떻게 보면 그녀를 꼬셨다고 할 수도 있겠지. 사실 그녀에게 접근했을 때 그게 목적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보다. 정우는 그녀의 다른 말에 주목했다. 마음에 드는 애가 없냐는 말. 그건 마치 정우의 행동패턴을 꿰고 있는 듯한 말투였으니까.
“왜, 정곡이야?”
우림이는 그런 정우의 모습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새로운 여자? 좋다 이거야. 하지만…….
“괜찮아. 우리 정우. 여자? 사귀고 싶은 만큼 사귀어.”
겨울방학 때 있었던 일 때문에. 봄방학 동안 그녀는 많은 고뇌와 번뇌 끝에 자신의 행동 패턴을 정했다. 정우가 무얼 하든 믿고 밀어준다. 너무 밀어서 그가 넘어질 정도로.
“우리 정우한테는 삼처사첩도 모자라지. 십처십일첩이 되도 정우 너 하난 내가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어차피 그의 곁에 남는 건 그녀가 될 테니까. 누군가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 말하겠지만, 그녀는 근거는 없어도 가진 돈과 가슴은 있었다.
“안심해. 정우야.”
언제까지고 지켜줄게.